566 라멘 - 지극히 서울, 다행히도 음식

566 라멘 - 지극히 서울, 다행히도 음식

일본 요리에 속하는 것들만 이야기하는 데 질린 분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보통 몰아서 적는 것이 쓰는 쪽에서 편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즉 2020년 9월 서울의 식문화에서 단연 주목해야 할 새 유행, <라멘 지로>의 아류로 칭하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나는 이 요리를 처음 접했을때부터 지금까지도 서울에서 인기를 얻을 음식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둘째라는 뜻의 사람 이름일 뿐인 지로에 대해서는 늘어놓지 않겠다.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고 모른다면 한국말로 구글이나 네이버를 두드리는 정도로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 있다. 라멘 지로는 가게 이름이고 지로 라멘이 음식 이름이니 아는 정보를 독특한 용어로 풀어내는 글을 찾는다면 지로라멘이라고 검색하는게 낫다는 점은 굳이 달아보는 추신이다.

실제 지로의 유행은 슬슬 다가오고 있다. 라멘이라는 요리는 서울에서 확실히 정체되고 있다. 거의 광물이나 액체의 혼합물에 필적하게 품질의 표준화를 이루어낸 국산 닭은 백탕이건 청탕이건 요리사들의 열정을 꺾는다. 팬들이야 <콧테리>니 <지로>니 말들을 열심히 수입하지만 나는 다분히 편집된 감각만을 느낀다. 지루하다. 시간이 꽤 지났지 않는가. <해적처럼 말하기의 날>도 아니고. 일본어의 단어 몇 종류를 늘어세우는 일은 우리의 맛의 세계에 그다지 공헌하지 못했다. 일상 언어에서 일종의 매니아들끼리의 은어로 자연히 변화해온 라멘의 각종 용어들은 팬들을 매혹하기는 하지만 일본처럼 사전의 편찬이나 보존을 위한 기록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 철저히 타인과 스스로를 나누기 위한 신호에 불과하게 소비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탐낼 수 있는 것들이 탈락한다. 왜 사노의 아오타케우치青竹打ち에 대해서는 현지의 열기에 비해 한국은 침묵하는가. 반대쪽, 광둥 요리의 죽셍면竹昇面에서 왔다는 데 관심이 없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이거 완전 아시아의 따야린 아닌가. 농담도 건낼 수 있는데. 여전한 생면 전문 파스타 가게들의 생각하면 무시하고 지나치기 힘들다. 시설이 집에서 갖출 수는 없는 형태이므로 가게에서 하기에도 알맞다. 물론 굳이 사람이 올라타는 것까지 재현할 필요는 없지만, 근 몇 년간 라멘 매니아들의 "현지 순례" 러시와 철저한 매니아들의 "현지" 타령을 감안하면 바로 그 현지에서 인기를 얻었던 라멘들에 대한 외면은 의아하다가도 이해가 간다. 간장맛이 녹진한 와카야마 라멘, 다시마의 감칠맛을 키로 선택한 쥬몬지, 여름이 지나버렸지만 그 바이브만큼은 다시 훔쳐오고픈 후쿠오카의 야키라멘과 도테야키 등등, 수많은 형태가 철저히 무시당하고 외면받는다. 물론 당지라멘의 등장과 발전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결국 맛으로 적절한 합리성을 갖춘다면 배척할 필요는 없다. 가장 먼저 언급한 사노 정도를 제외하면 가정에서도 아주 시도를 못해볼 것이 아닐 정도로 불필요한 왜곡이 많지도 않다. 예컨대 야키라멘은 힘줄을 삶은 육수 하나만 좀 타협하면 가정에서도 도전해볼만한 대상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너 라멘 많이 알아서 잘났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나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점을 조금은 전하고 싶었다. 라멘은 결코 욕망에 갇혀서는 안되는 요리이다. 한 그릇 안에 우주의 별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게 아시아의 면요리, 국물과 면의 조합이다. 고작 십 몇분 만에 뚝딱 비우고 오는 식사에서 오는 만족감과 에너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닌가. 왜 그 한 그릇의 깊이를 자꾸 좁히려 드는가.

어쨌거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다행히도 필연이므로 서울에는 종종 스스로를 새로운 것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라멘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라멘을 만드는 요리사가 식객을 "하수 중의 하수"라며 몰아세우던 도시에서 "고수"들이 기지개를 켜는가 보다.(꼭 이런건 지극히도 닮았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유행이 지로다. 서울대입구의 <라이라이켄>이나 정자의 <코이라멘 지로점>이 꽤 오래 밀었던 메뉴인데 올해들어 서울에서도 댓 군데가 보이기 시작했다. 니보시계가 다시 이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바지락이나 재첩같은 조개류는 여전히 한정판, 가오픈같은 딱지를 달고서만 살아남는다. 그렇다고 다 성공적이지도 않았는데, 지로만큼은 맛도, 유행도 서서히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다.

566 라멘의 66라멘은 더할 나위 없이 "지로"다. 서울의 입맛에, 몇 개의 대학교를 근처에 둔 연남동 상권에 꼭 들어맞는다. 첫째로, 숙주를 위시로 한 풍성한 야채가 좋다. 마늘과 숙주, 한국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익숙하고도 친근하다. 돼지기름이 얹어져도 전혀 낯설지 않다. 둘째로 대학가, 젊음의 쏘울이 담긴 요리인 만큼 한국의 라멘 유행의 중심지인 대학가에 가장 필요한 요리이다. 젊은 사람들은 한참 배고프고 잔뜩 먹는다. 가끔은 과한 음식들이 그들의 영혼까지 달랜다. 여느 타국처럼 마약으로 달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가장 기쁜 날부터 가장 슬픈 날까지, 지갑은 가볍지만 입맛은 당기는 이들에게 필요한 전투식량으로 철저히 객을 위한 요리로 자리매김한다. 수북한 지방, 마지막 한 입까지 줄어들지 않는 짠맛과 힘껏 씹어대고 픈 두껍고 튼튼한 면. 꿈 속의 푸짐한 식사가 한 그릇, 만 원짜리 한장 내에서 현실로 강림한다. 가득 채운 만큼 그 안에서 <텐치가에시>니 <뉴카스프>니 나름의 세계관마저 생길만도 하다. 여기까지가 지로가 서울에 있을 이유라면 세 번째로는 566의 지로는 그럼에도 그러한 지로의 컨셉트에 잡아먹히지 않고 한 젓가락, 한 숟가락의 맛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말린 멸치가 떠오르는 쌉싸름한 끝이나 간장의 향등은 생마늘의 향에 난파하기는 하지만 입맛을 돋우기에는 모자라지 않다. 굳이 지로를 찾지 않아도 좋을, 대학가의 외부인, 서울의 라멘 순례자들을 위한 새로운 지로다. 바로 이 도시의 라멘이라는 음식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 그저 일본여행의 어떤 그림자로, 어떤 이들에게는 꿈을 담은 이상향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익숙해져 버린 점심 식사로. 이는 철저하게 뻔한 나이대와 더 뻔한 소득, 지역 위주로 이끌어지고 있고 그 중심지가 마포구 일대이다. 마포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고, 지금 한국의 라멘 문화가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짚고 있는 위대한 한 그릇이다.

맥락에서 모두 벗어날 경우 앞선 말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대학생도 아니고, 마포구 주민도 아닌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철저한 문화의 외지인의 시각에서 <지로 라멘>과 <566>은 연극과 모사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실 앞서 주구창창 늘어놓은 일본 각지의 명물 라멘들을 서울에서 열심히 복각하면 뭐할 것인가. 데드 카피일 뿐이고 맥락도 없고 표기도 없는 인용은 표절에 불과하다. 필요가 있어 인용을 하고 이익이 있어 영감이 되는 것인데 재현을 위한 재현을 하면 곤란하다. 그러한 점에서 라멘 유행의 한 파동은 이제 서울의 라멘을 표절이나 복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듯 하지만, 처절하게도 비좁은 도시인들의 식문화 속에서는 그래서 맑냐 진하냐 따위의, 얕은 파동만을 만들 뿐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일본의 존재하는 문법을 따라해보는 연극은 재미있고 또 유익하다. 서울에는 존재하지 않는 맛의 좌표를 표시할 수 있는데 큰 이익이 있다. 그러나 연극의 인기 배우의 면면을 보면 이것은 복각보다는 좋게 말하면 재창작, 나쁘게 말하면 왜곡으로 흐른다. 지로도 복각되는 경우와 지로만 복각되는 경우는 다르다. <566>에는 '5라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이 도시에 교카이도 있을지는 두고봐야 한다.

말을 하나 빼먹었는데 왜 이 도시에서 지로가 등장하고 또 인기를 얻을 것이라 확신했는가. 지로는 철저하게 왜곡된 욕망을 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직접 맛보라.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이 먹을 음식의 수준을 넘어선다. 어떤 부분은 과하고 어떤 부분은 모자라다. 만약 당신이 잠을 푹 잔 뒤 향이 특별히 없는 세정제로 몸을 깨끗이 하고, 선호하는 방식에 따라 드레스 또는 재킷으로 몸을 감싼 뒤 밑창을 소가죽으로 마감한 신발을 신고 소매가 있다면 손목을 가리고 소매가 없을 경우 장신구를 두어 개 정도 한다면, 앞섶이 살짝 둥글게 말아내고 어깨의 박음질 정도로 의견을 표현하거나 흉부를 시원하게 드러내면서도 허리선을 왜곡하지 않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한 뒤 거리를 나서 이 음식을 맛본다는게 가능할까.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일 테다. 애초에 그런 상황을 상정한 음식이 아니다. 쫓기고 몰리며 지치고 바쁜 현대 도시인들의 꿈이 낳은 메뉴가 지로다. 결심하고 한 끼를 위해 나섰지만 결심 뿐인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내뻗는 구원의 손길이다. 어떤 것들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음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서울은 그리고 그런 음식에 대한 욕망이 여느 곳보다 부족하지 않다. 높이도 쌓인 숙주는 수분의 탑이며 미처 다 녹이지 않고 덩어리째 얹은 지방은 <세아부라>라며 불러보아도 느끼하기 그지없는 지방일 뿐이다. 지방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맛을 늘렸지만 애초부터 지방이 맛보다 많은 요리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삶에는 이런 요리가 필요하다. 라멘의 팬덤이 주로 소통하는 인스타그램에서 인기있는 계정들을 보라. 차슈 추가가 기본 아닌가. 돈까스가 유행하는 이유랑 일맥상통한다. 차량은 운전대 가운데의 상표를, 의복은 가슴 부근에 상표를, 신체는 굴곡진 부분을 촬영하고자 하는 욕망이 여느 때보다 큰 지금이다. 라멘도 마찬가지의 흐름에 치일 수 밖에 없다. 지로는 그런 점에서 선택받은 음식이다. 이기는게 필연이다. 숙주의 삶은 상태가 어쩌구 국물의 농도가 저쩌구 이런 태도와 가장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은 요리가 지로다.

  • 현지에는 이런 음식이 있었는가? 같은 질문의 답이 중요하다면, 답이 필요하다: 있다. 교지로魚二郎니 교카이 지로케이魚介 二郎系니 쉽게 검색하면 산더미처럼 볼 수 있다.
  • 최대한 음식 이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이 블로그의 방향성이지만, 지로같은 음식의 유행은 음식 바깥의 유행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어 불가피하게 일부분을 넣게 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도 양해를 구한다. 그만큼 음식 바깥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음식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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