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아레아 - 감각과 무감각

아레아레아 - 감각과 무감각

서양 디저트는 본 블로그에서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이다. 현대 한국에서 디저트의 위치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고급 외식을 표방하는 곳들에서도 디저트는 가난하다. 그것도 일종의 주제의식일까 싶을 정도로 구색에 불과한 디저트들이 당연시 여겨진다. 여러분도 간단히 몇 종류를 떠올리시리라 생각한다. 마침 식사의 끝자리 즈음에나 등장하므로 아무렴 좋다는 식으로 얼버무려진다. 그러한 사회적 비용은 결국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서로가 부담한다. 빵도 과자도 불쾌하게 비싸고 그렇다고 팔아서 손쉽게 부를 축적하는 환경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도대체 누구에게 득인가.

불만은 그정도로 미루어두고, 「아레아레아」에서 케이크 두 개와 홍차를 마신 일 이야기를 하자. 먼저 눈에 띄는건 쇼케이스를 가득 채운 계절감이었다. 때에 맞추어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내는 일은 파티셰의 격을 높인다. 특별한 날의, 혹은 특별한 기억이 남는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케이크 두 개와 음료까지 KRW 25000정도를 결제했으니 짧은 간격으로 반복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된다. 근방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데 만 원 한 장으로 가능한 점을 감안하면 주방은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루즈 에 누아>를 살펴보자. 서울에서 의외로 찾기 어려운 것이 이러한 초콜릿 자체를 주제로 한 디저트이다. 가장 고전적인 맛의 주제임에도 좁은 선택지, 카카오가 가진 풍미에 대한 거부감으로 가득찬 객들 덕인지 초콜릿의 다양한 풍미를 즐길 기회는 굉장히 적다. 스탕달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은 스탕달과는 무관하지만 아무렴 좋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색을 통한 신맛의 개입이다. 붉은 결정으로 자리한 신맛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논리적으로도 훌륭하다. 계절이 지나면 또 딸기 뷔페의 때가 오겠지. 무엇이건 많음만이 미덕인 식문화 속에서 케이크 속 과일의 위치는 언제나 고통받아 왔다. 나마저도 주기적으로 생과 따위가 올라간 무감각의 극치를 보여주는 디저트를 먹게 되는 불상사를 접하고 있다. 굳이 여러분과 나눠 무엇하랴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그런 것들 말이다. 이 케이크는 그렇지 않은 점이 나를 유혹한다. 이외의 요소는 케이크의 내면에 숨겨 기대가 부푼다. 맛은 어땠는가. 즐거웠다. 맛의 보편적 논리가 맞아떨어지는 즐거움이다. 석류가 잼이나 퓌레로 채우는 과일의 신맛과 온전히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허용 가능한 오차 내에서 자신의 풍미와 맛의 균형의 층을 더하며, 두터운 초콜릿 무스는 풍성한 쓴맛이 있으며 질감 또한 즐길 수 있는 정도였다. 초콜릿을 커다랗게 먹는 행복을 적절하게 구성했다. 부드러워야 할 부분이 부드럽고 단단해야 할 부분은 단단하다. 단 하나, 왜 석류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다는 점이 걸리지만, 적지 않은 시간 갈고 닦은 기술의 맛이 났다. 입안에서 녹는 유체의 감각과 부스러지는 고체의 감각 두 가지의 균형에서 전자에 지나치게 치우친 감상이 있었지만 멀쩡하게 먹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쿠루미>는 앞선 디저트의 행복이 우연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남겼다. 호두라는 주제를 선택한 이 케이크는 그야말로 계절감의 절정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견과류를 먹는 계절에 맞게 견과류에 도전한다면 견과류의 맛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의도에 따라-견과류를 배제하는 것이 견과류라는 주제에 더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의 연출이나 제공의 방식 등에 있어 낯설게 하기를 전혀 의도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호두를 연출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쪽이 신빙성을 얻는다. 무엇보다 가장 밟히는 지점은 부드러움의 지나침이다. 한껏 젖은 층부터 꼭대기의 무스까지 미묘하게 서로 다른 시간대에 녹으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풍미를 가린다. 전체가 한 번에 녹아들며 풍미가 밀려들어오는 설정은 아니었다. 색의 켜는 쌓여있지만 맛은 쌓이지 않았다. 단순하게 밀가루와 크림, 그리고 호두를 맛보려 했다면 반죽에 호두를 잔뜩 넣고 구운 호두 케이크 Gâteau aux Noix 쪽에 비해 나을 게 없었다. 질감의 재미도 풍미의 재미도 없는 자리에서는 호두의 고장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두 제누아즈나 타르트에 크렘 파티셰나 바닐라 무스를 곁들이는 것은 지극히 예상 가능한 설정이지만 이 케이크의 무스는 그런 방식으로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다. 호두를 주제로 한 디저트에서는 결국 단단함의 몫을 코팅한 호두에게 마지막으로 미루는 경향성이 흔히 보이는데, 질감의 배분이 매끄럽지 않다보니 마지막의 호두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물감만을 남긴다.

재료의 씀씀이에 있어 고전적인 레시피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참으로 쓴 맛 없이 씁쓸한 인상이 남는다. 호두 과자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미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호두는 다양한 질감 위에서 특유의 풍미만을 살리는 조리법으로 세계 곳곳에서 가을을 장식하고 있다. 가장 부드러운 호두 스프부터 단단한 파이지 위에 다시 호두를 잔뜩 깐 호두 파이, 설탕물을 입혀 굳힌 호두까지 호두의 제법을 활용하기에 좋은 기법들은 무수하다. 풍미를 이용하기 좋게 리큐르 형태로 먹는 지혜 또한 우리는 이미 빌리고 있지 않은가. 크림과 바닐라로 전체를 감싸는 이러한 궁합에는 아주 녹아 내릴 수준의 무스나 아예 아이스크림으로 준비했다면 전체를 아우르는 그림이 더욱 또렷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이런 선택을 했다면 나는 이 비용을 치르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제과 학교들도 뻔히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걸 알고 있다. 필립 콩티치니의 호두 케이크와 같이 그 자체의 구현을 목적으로 해볼만한 예시들도 쌓일 만큼 쌓였다. 단맛만을 위한 공간이고 치를만큼 비용도 치른다. 그렇다면 맛이 더 이상 흐려져서는 안된다.

공간부터 음식까지 경험의 모든 측면에 있어 자신만의 요리를 하려는 의도가 묻어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겠다. 이곳의 서비스 경험은 서울에서 각별한 지점도 있다. 그러나 공간의 구성원들이 주제로 드러나는 순간 적당함이나 습관성의 자리는 이제 없을 때가 되었다. 셰프가 감각한 것들에 대한 표현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지만 의식하지 않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하고 있는 지점도 분명 있다. 현실을 보여주는 주방이 보이는 공간의 구성을 보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스스로가 설정한 모든 요소들이 어쩔 수 없음의 여유를 없애버렸다.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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