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렁스 - 후기 피에르 에르메 시대

발렁스 - 후기 피에르 에르메 시대

충동적으로 성수동의 "발렁스"를 찾았다. 일전에 한번 갈무리해둔, 바닐라 타르트들을 아예 쇼 스타일로 수평 비교할 기회를 마련할까 생각한 게 본래의 기획이었는데, 기획 단계에서 취소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어쨌거나 서울에서 바닐라 타르트가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 "발렁스"처럼 아예 새로 오픈하는 곳도 바닐라 인피니멍을 자신들의 시그니처로 소개하는 곳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이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만 한다.
오픈의 소식은 들었지만 본 블로그는 항상 최소한의 차분함을 갖추는 것을 미덕으로 하고, 개인적으로도 뙤약볕 아래에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요새는 꺼리고 있어, 썩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 곳의 디저트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COVID-19가 불러온 방역 위기로 인해 바깥에서 식사하는 일을 자체를 줄이기도 했고, 디저트의 경우에는 정 필요하다면 포장하는 길을 취했으므로 블로그에서 이야기할 인연은 없었다. 그러나 여느 때 방문한 발렁스는 매우 포근한 분위기였다. 다시 말해, 아무도 없었다. 때가 왔다. 케이크 두 개와 한 잔의 음료. 음료를 고르는데도 애를 먹었는데 이는 후술하겠다.

이 디저트가 "시그니처"라고 했을 때,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진다. 단지 소비자의 선택을 용이하게 하거나, 이목을 끌 정도의 목적만이 있지 않다면, 처음 개업하는 매장에서 자신을 상징하는 요리로 선택한 주제가 피에르 에르메의 페티시 인피니멍 바니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맛을 보니 과연 더 이상 바닐라 타르트라는 규정을 벗어나고자 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전체적인 단맛의 균형이 나쁘지 않은 가운데, 캐리멜과 통카 빈과 같은 요소들의 개입을 통해, 페티시 인피니멍 바닐이 설정하는 풍미의 값의 변조를 시도한다. 먼저 쿠마린이 타히티 바닐라의 역할을 모사한다. 마다가스카르 바닐라가 바닐릭산 위주의, 전형적인 바닐라 향만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바닐라와 유사하면서도 꽃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통카를 사용한 것인데, 이러한 문법은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
다만 타히니 바닐라와 통카 빈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쿠마린은 쓴 맛을 낸다는 점이다. 쓴 맛이 난다. 캐러멜의 쓴 맛일지도 모르고, 쿠마린의 쓴 맛일지도 모른다. 태운 캐러멜의 향이 강하지는 않기에 통카에서 오는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와같이 탈(脫) 바닐라를 위한 공세는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바닐라 향이 그렇게 지배적이지 않은 타르트가 탄생한다.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가? 전혀. 각각의 요소들은 평범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다만 향들이 경합하는 사이에 과연 이 타르트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것에 의문을 품는다. 프릳츠의 상표가 걸린 커피 머신은 나를 곧바로 좌절케 한다. 차가 아예 없고, 에스프레소 머신만이 선택지라. 카페 아메리카노는 습관의 산물이 분명했다. 파티세리에서 디저트를 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에게는 디저트만을 취급하는 곳의 케이크와 음료의 시간은 오후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그 시간의 잠시의 호흡으로서, 요리가 기호품의 경지에 오른다. 방향물질들이 꽃피우는 향의 감각으로 살아있음을 깨닫고 내가 요리를, 자연을 좋아한다는 점을 상기하는 시간이다. 이 디저트에게, 이 공간에게 파티세리를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전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맥은 프랑스식 디저트를 한다-서울에서 화제인 타르트 페티시 인피니멍 바니, 통칭 바닐라 타르트를 한다-카피는 이제 지긋지긋하므로 통카 빈이 주는 쿠마린의 터치와 캐러멜이나 견과류까지, 다양한 향을 그 안에 담아내겠다. 그래서 이름이 '균형'이다. 뭐 이런 설정이라고 느낀다.

이러한 도전이 이른바 자기지시self-reference로 이해될 수 있을까? 나는 결단코 아니라고 본다. 해롤드 로젠버그같은 이름은 글에 장식 이상으로 꺼내지 말고, 이 글은 여러분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보고자 한다.

여러분, 우리는 가히 피에르 에르메가 없는 피에르 에르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카페 디올의 컨설팅 메뉴는 변하지를 않고 있으며 매장은 망해서 철수한지가 오래입니다. 그런데 돌연 바닐라 타르트의 돌풍이, 이 도시의 각지를 채우고 있습니다. 마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처럼, 구매력이 남아있는 공백에 개업한 파티셰들은 모두 바닐라 타르트를 만듭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바닐라타르트를 검색해보면 그 위세를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방 각지, 도산공원의 바깥인 서울 등지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타르트는 바닐라입니다. 물론 몇몇 베이킹 클래스들의 도움이 클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판매하기로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겠지요. 맛? 과연 그럴까요?

바닐라 타르트의 맛이 무엇입니까.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피에르 에르메의 페티시 인피니멍 바닐은 페티시 인피니멍이라는 일종의 연작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왜 이름이 페티시일까요, 페티시라고 표현할 정도로, 특정한 재료의 맛과 향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의지가 주제입니다. 단순히 크렘 파티시에와 비슷한 맛이 나는 것들을 묽기만 다르게 해서 겹겹이 쌓은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닐라의 기원이 되는 멕시코 바닐라를 매치하고 프랑스의 자랑인 타히티 바닐라를 얹어서, 바닐라 한 주제로 다양한 향을 풀어내기에, 바닐라 자체를 사랑할 이유마저 보여준다는 게 이 디저트의 설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대의 저변에는 프랑스 미식계가 바닐라에 들인 헌신이 깔려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착취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바닐라의 삶부터 죽음 이후까지 전반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바닐라란 어때야 하는가, 그리고 그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실제로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이들이 프랑스 미식계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알랭 아벨이나 롤랑제 가문과 같은 위대한 향신료업자들의 존재가 프랑스 셰프들의 바닐라 요리의 위대한 완성도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에르메가 올리비에 롤랑제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밝힌 인피니멍 바닐의 개발 비화에서, 그는 어떤 바닐라 요리들도 바닐라가 가진 완전한 만족을 표현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직접 다양한 바닐라의 매력을 전부 느낄 수 있는 디저트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밝힌 적이 있죠. 그렇다면 참조적 맥락을 개입할 경우, 당연히 발렁스의 바닐라는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할 수 밖에는 없게 됩니다. 애초에 인피니멍 바닐은 바닐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 깊은 사랑만지 존재의 이유인데, 바닐라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타 요소들이 개입하게 되며, 핵심과도 같은 타히티 바닐라마저 빠지게 된다면,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잘 만든 타르트일 뿐, 그 이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디저트는 피에르 에르메를 참조적으로 전용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티셰가 진단한 지점은 올바른 부분도 있습니다.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한 종류로만 만드는 바닐라 타르트라는건 장난에 불과한, 수준 낮은 디저트라는 점이지요. 그리고 피에르 에르메와 달리 한국에서는 바닐라의 수급처가 다양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린 것과 같이, 바닐라 생산자와 직접 연결되는 경로도 없고, 매년 열리는 콩쿠르 아그리꼴도 한국에서는 존재 조차 인식되지 않고 있지요. 그런 환경에서 셰프는 값비싼 타히티 바닐라 대신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피에르 에르메를 주제로 삼기 시작한 이상, 저는 파티셰가 더욱 철저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닐라와 통카가 썩 유사한 향 프로필을 가진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에르메도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바닐린과 바닐릭산을 줄이고 쿠마린을 전면에 내세우고, 초콜릿 가나슈를 녹여내는 아이디어는 피에르 에르메가 2004년에 내놓은 아이디어입니다. 바베이도스Barbade라는 이름으로요. 시그니처로 피에르 에르메를 선택하실 정도로 에르메를 사랑하신다면 모르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파티셰께서도 단맛만 나는 납작한 디저트보다 균형이 있는게 좋아서, 쓴맛으로 축을 기울이셨듯이, 에르메는 바베드에 초콜릿과 미량의 소금을 더해 완성합니다. 소금의 짠맛이 초콜릿을 단지 단맛의 매개체가 아닌 향의 구성요소로 느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든요. 에르메는 이 맛의 궁합을 통해서 바베이도스의 따사로운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아방가르드 셰프로서 명성에 걸맞는 창작을 해냈지요. 그의 방대한 마카롱 포르폴리오에서 아직도 종종 이 조합이 쓰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 궁합은 쇼콜라, 마카롱으로 쓰였을 뿐 타르트로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저는 크게 세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첫째로 반죽의 맛과 유지방의 무게가 얹히는 타르트를 만지는 데 있어 향신료만으로 개벽하기에는 바닐라처럼 손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통카를 메인으로 하는 경우 쿠마린의 부작용도 그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EU 규제Regulation (EC) No 1334/2008 Annex III pt. B.에 제시된 기준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쿠마린은 1kg의 음식에서 최대 5mg만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족스럽게 크림에 쿠마린만으로 향을 내려면 통상 5~10mg/kg, 저온의 아이스크림에서는 최대 80mg/kg까지 들어간다고 하고D. Ethlers et al, 1995 현실적으로 작은 주방의 요리들까지 이런 규제로 옥죄이지는 않기도 하고 요리사들에게는 거의 무시되는 규제이기는 하나, 큰 사업을 할 때는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도 이유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알러지 반응이 지속적으로 보고되는 물질이니까요. 마지막 이유는, 통카 빈은 그 자체로 바닐라와 같은 주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향은 바닐라와 유사하면서도 구분되는 확연한 개성이 있지만, 인피니멍 바닐처럼 바닐라의 하나의 세계관에 필적하는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는 통카 빈의 열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정확히는 여전히 우리에게 주제의식으로 서기에는 미지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아마조나스와 파라, 즉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주로 얻어지는 통카 빈이 파티셰의 주방에 진입한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인공 쿠마린과 천연 쿠마린, 어느 쪽이든 바닐라의 대체재로서의 성격이 짙었고 플랜테이션을 통해 재배된 역사가 그 이전에 전무하였기 때문에 경작을 통한 품종의 개량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통카의 품질을 구별할 마땅한 기준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통카는 바닐라만큼이나 충분히 탐닉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이러한 배경에서, 저는 파티셰의 "바닐라 타르트"를 이해했습니다. 한 조각의 타르트를 두고 길다면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8천 원을 상회하는 가격은 근래 재개점한 <메종 엠오>의 타히티 바니유(KRW 8500)나 피에르 에르메 본가의 타르트 인피니멍 바니(일본에서 제 기억에 800엔대를 아직 넘지 않은 것으로 기억)과 같은 제품들에 필적하는 가격의 설정은 하나의 기준이 되어주며, 이러한 맥락 내에서 이 가격은 감히 새로운 창작에, 적어도 기존에 존재하는 참조의 원본에 필적하는 완성도를 스스로 표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제가 이해한 에르메와, 서울에서 바닐라 타르트가 유행하는 풍경 등을 고려할 때, 이것이 파티셰가 운영하는 공간의 정체성, '발렁스'를 구축하는 자기지시보다는, 참조적인 맥락이 과도한 가운데 어긋난 위치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에르메는 좋건 싫건 현재 편의점부터 호텔의 컨펙셔너리 파트까지 단 맛의 거의 모든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 업계의 거인입니다. 그의 요리를 단순하게 대한다는 점은 저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께흐 누아'를 통해서 보여준 긍정적으로 지독한 DIY 정신과, 프랑스 제과의 전통적 요소들이 서울에서 가지고 있는 혼란스런 지점들에 대한 진단점을 감안할 때, 저는 파티셰의 미래에 더 밝은 디저트들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이 도시에서 카시스가 쉬이 거부당하는 재료이지만 사랑스럽다는 점, 그리고 발로나社가 "과나하"를 낸지 오래임에도 천대받고 있는 초콜릿의 풍미와 쓴맛을 위한 디저트로서 께흐 누아는 좋은 주제를 선택했고, 많은 이들에게 그 사랑을 받기를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카카오에 대한 부분은 일종의 불가항력으로서, 발로나의 커버춰 중 재미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초콜릿과 전형적으로 어울리는 카시스를 선택하는 지점은 과연 독특했고, 따라서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카시스 특유의 향이 강한 프랑스의 Noir de Bourgogne나 Royal de Naples로 만든, 르제의 크렘 드 카시스나 쨈이 주는 독실한 그 향기를 사랑합니다. 파티셰가 라즈베리를 사용한 것이 이러한 저의 기호와 갈라선다는 점은 중요치 않습니다. 다만 저는 확실히 다른 베리가 아닌 카시스를 쓴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파티셰께서도 그 이유를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해결책보다는 미봉책에 가깝습니다. 본래 수확철이 되면 잼이나 크렘 드 카시스로 가공하여 두었다가 쓰는 블랙커런트를 직접 라즈베리와 함께 쓰기 위해서 가공하신다면 엄청난 노고가 필요했을 게 분명합니다. 가공의 대상이 될만한 커런트는 적어도 제가 아는 바로는, 벤 종들을 위시로 하여 맛이 결코 맛을 위한 품종들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점 또한 밟힙니다. 한 명으로 돌아가는 업장이라면 이러한 작업의 선택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아예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지점을 영혼과 삶을 다져넣어 자신의 손으로 채웠으니, 이 콩피추르의 맛이 곧 파티셰의 맛이 될 수밖에는 없습닌다. 그 맛 안에는 다듬어져서 옅어진 카시스의 검은 향 속의 아무래도 익숙함에 기대는 베리의 신맛이 있었습니다. 맛이 흐려지고, 재료들의 개성이 옅어지는 결과마저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면, 저는 그 방향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렁스'라는 이름부터, 디저트들의 설계까지. 뻔한 복제보다는 디저트에 파티셰의 영혼을 불어넣고자 하는 모습들이 묻어나는 점은 참으로 제가 바라던 바이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모든 설정들이 의도라면 그것이 과연 어떠한가에 대해서 저는 이견을 남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객이 움직이지 않을 때 요리사는 주방으로 돌아가는, 1인 운영의 설정에도 요리가 적어도 요리사의 계산 밖으로 삐뚤어지지 않은 점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지는 않지만 각 디저트들이 흐뜨러짐 없이 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공간의 운영도 지속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까지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디저트라는 결과물을 위해서 존재하는 배경이며, 디저트를 통해 그 의의가 입증되어야 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주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불가능의 영역에 이른 것들을 해내는 곳들도 있고, 1인 운영으로 쇼케이스를 가득 채워가며 운영하는 것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그러한 의지의 영역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파티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점은 요리이고 맛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에르 에르메와 같은 지점에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발로나의 공급 담당자를 비롯한 무수한 루트를 통해서 파리의 쇼콜라티에들도 쉬이 쓰지 않는 다양한 개성의 초콜릿을 씁니다. 발로나가 아태지역에 공급하는 물건이 뻔히 정해져 있지만, 구운 풍미와 여린 쓴맛을 지닌 까라이브는 파티셰의 균형감각을 표현하는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점을 이렇게 타협하고 나면, 파티셰가 영혼을 불어넣은 심장부가 아닌 대기업의 QC 담당 부서에서 균형미의 위대함을 찾게 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균형을 찾는다라는 말씀을 파티셰께서 해주셨으니, 저는 제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디저트를 만들고, 드시고, 선물하시고, 촬영할 때, 여러분은 왜 그런 행위를 하십니까. 이 도시에서 디저트를 만들고 또 먹어서 만들어가는 이 도시의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후 약 삼십 분여를 즐기는데 KRW 20000을 지불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능해야 네 명이서 옹기종기 앉아 돌아가며 하나의 디저트를 촬영하는 참극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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