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참 - 차박, 요리로서 추상화

바 참 - 차박, 요리로서 추상화

언제부터 우리는 음식을 통해 일정한 사고를 표현하게 되었다. 물론, 과거에도 음식은 언제나 사고의 결말이었다: 조리도구를 다루는 기술, 재료의 선택, 조리의 순서 등등, 모든 것들은 사고의 결과물이지만, 우리는 그 차원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는 요리가 요리 바깥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미식, 혹은 식문화의 일부로 여겨졌을까? 여러분은 한 그릇의 라면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열에너지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밥을 지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그런 방향으로 요리를 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페란 아드리아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현대 요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식탁 앞에 도착하기까지의 사람이 읽히는 부분이다. 야채와 동물 등 재료가 되기 이전 살아왔던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먹이고 살찌운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가공하고 변화시키는 사람들.. 그 정점에는 셰프로 불리는 요리사가 있다. 모든 게 모여 이 요리사의 손에서 완성되고 우리는 그 사고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서울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소화해내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는데, 크게 세 가지의 단편적인 실패들이 자주 눈에 띈다;
첫째로는, 그러한 누군가의 사고가 낳은 결과물을 모방하는 경우다. 본 블로그에서 이미 신물이 나도록 반복한 피에르 에르메 선생님의 복제판들이 있었고, 그 이외에도 아이디어의 복제 행진은 이어진다. 과연 "왜?"라는 질문 앞에서 그 요리사보다는 외국의 다른 요리사들이 먼저 떠오르고, 주방에서도 답을 들을 수 없는 종류들. 굳이 열거하지 않겠다.
둘째로는, 주제 의식이 있는 요리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되 주제가 요리사 주변에 머무르는 경우다. 「El Celler De Can Roca」에서 세 형제의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얻은 요리를 한다니 다른 레스토랑에서도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 걸 들을 수 있다. 주방의 총책임자가 그 해에 어디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면 그 해외 여행을 본뜬 요리를 보게 되고, 어디 다른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었다거나 누군가를 특히 동경하고 있다면 그 레스토랑이나 사람을 본뜬 요리가 나오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 코스의 아이디어까지 모방하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셋째로는, 마음이 콩밭으로 가있는 경우다. 요리사가 신이 되려고 하거나 레스토랑이 신전이 되려고 하는 경우다. 대표적으로 이런 경우. 단지 요리는 무언가 있어보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종류들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럴싸하게 예술가나 위대한 인간인 척을 할 수 있지만, 현재는 흔적도 남지 않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무명의 기고가 흉내들을 내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경우들은 결코 "좋은 요리"라고 할 수 없는데, 왜냐 하면 그 스스로를 페란 아드리아 이후의 맥락에 위치시코자 하는 욕심은 있으면서도 그 기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러한 맥락에서 이탈하는 것이 낫다. 이를테면 충실하게 먹는 기쁨에 봉사하고자 기술적인 요소에만 집착한다면 요리사의 생각이 오로지 주방에만 머무르더라도 좋다, 넘치게 좋다. 서울같은 도시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요리사의 생각이라고까지 주장할 수 있다. 주방의 바우하우스 미학, 왜 불가능하겠는가?

나는 종종 요리를 맛보기 전에 이 세 가지를 떠올리곤 한다. 혹시 또 해당되면 어쩌지,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주로 지나친다. 생활인으로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도전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웹상으로 소개된 일부와 요리의 경험 전체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희망을 거는 경우다.

「바 참」의 메뉴판을 받았을 때 나는 고민했다. 나무와 나이테라니. 과연 주제의 무게가 무겁다. 나무라고 하면 이미 바의 곳곳에 있다. 당장 바 테이블부터, 서구 주류 문화의 핵심인 오크통, 지중해를 꽃피우는 온갖 열매의 나무들까지, 거기에 더해 나무의 시간까지 어우르자니 참으로 메뉴판이 무겁다. 일단 "참"부터가 나무와는 떨어질 수 없지 않은가.

메뉴를 전부 읽어본 뒤, 나는 이 주제 속에서 주방의 생각을 온전히 읽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과연 주어지는 기호들과 메뉴, 공간 등등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또 메뉴 속에서 어떤 것들은 현실로, 또 주제 이외의 의지들로도 이루어져 있는 듯하여 더욱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저앉은 칵테일은 "차박"이었다(KRW 20000).

기본적으로 벤톤 올드 패션드의 기술과 페니실린의 맛의 얼개를 결합한 칵테일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를 언급하지 않는데, 베이컨 지방을 녹여낸 것과 진저-레몬-피트 모두 생각건대 기호는 명백하게 주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두 칵테일이 자못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가지가 단순한 결합이나 타협을 넘어 변증법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가 이 칵테일의 성패를 가른다.

생강에 불을 붙혀 그을린 탄화의 향에 이어 생강, 그리고 살짝의 위스키의 피트로 이어지는 향들은 이름에서 이어지듯이, 야외 캠핑을 연출하고자 하는데, 목재를 태운 불과 탄화의 결실인 숯 사이에서 잠시 방황한다. 목재에 불을 붙이면 비로소 탄화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장작불과 숯불의 향은 완전히 같다고 하기는 어렵다. 팔레트로 이어져서는 전체적으로 페니실린으로 치우치는데, 지방을 머금은 액체가 형성하는 액체의 질감이 주된 차이점을 이룬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뭐라고 말해야할까? 독자에게는 죄송하나 이 글로 결말을 짓지 않겠다. 바텐더들은 피크드 라펠로 된 자켓 대신 빕팬츠를 입고 있으며, 각종 이국적인 요리들을 선보이는 저렴한 식당들 사이에서 지상에 낮은 건물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아직 이러한 경우에 적용하기 적절한 견해들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다. 이 칵테일은 벤톤 올드 패션드나 페니실린의 개별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만족스러우며, 이러한 경우 나는 불분명non liquet의 개념을 남용하겠다. 판단의 기준 뿐 아니라 아직 판단의 근거들도 충분히 수집되지 않아, 양측 모두 보완을 필요로 한다. 불분명한 경우는 통상 그 불분명함의 불이익을 누가 떠안을 것이냐의 문제가 뒤따르지만, 나와 독자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렇게 책임까지 떠넘기는 대신 잠시 여유를 고르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진정 "차박"에 어울리는 여유 속에서 좀 더 고민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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