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발트 - 과제로서의 육가공품

비너발트 - 과제로서의 육가공품

"비너 발트"말고도 한국에는 천천히 퍼지고 있는 육가공품 전문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개중에는 인기가 좋아 꽤나 붐비는 곳까지 있으니, 과연 서울은 점점 먹기 좋아지는 도시가 되고, 대한민국 또한 그러한가.
지겨운 대답-내 글은 답이 항상 정해져 있는가? 되물을 일이나 딱히 다른 답이 떠오름도 아니다-이 돌아올 터, "일견 그러하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메종이니 샤퀴테리니 로망스어군의 어휘가 넘실대고 콜드 컷 소시지도 곧잘 사먹을 수 있어서, 이제는 수녀원의 소시지를 주문하지 않게 되는 때인데 왜 그런가.

첫째로, 이 비너발트의 올곧게 만든 뉘른베르거 브랏부어스트(Nürnberger bratwurst)부터 시작할 수 있다. 독일 요리가 대한민국에서 평균적으로 받는 관심 정도를 생각해서 기초부터 이야기해 보자. 여느 요리도 그렇듯이 말을 형태소로 잘라보면 답이 있다. 뉘른베르크에서 만들어서 뉘른베르거이고, 석쇠 등에 보통 굽기 때문에 Brat이며 소시지라서 Wurst다. 참으로 쉽다. 뉘른베르크 식의 구운 소시지. 뉘른베르크가 어디인지는 지도를 찾으면 나오고 뉘른베르크 식이라는 것은 대충 손가락 길이와 두께 정도의 소세지라는 것을 시각적 교육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끝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물론 나는 아예 이런 접근 또한 가능하다고 보지만, 맥락에서 벗어나는 것과 맥락이 없는 것은 조금은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 맥락에 대한 무관심은 내가 아니어도 이 도시에 충분하기에 조금 더 이 소시지에 애정을 쏟아보자. 일단 앞의 단순한 이해부터 고쳐야 한다. 이름은 사실 독일어의 braten과 만나기 전에 고독일어 brät과 만나니 속이 다져진 소시지를 뜻한다. 소시지의 속이 갈리듯 부드럽지 않고 씹는 감이 있는 입자로 구성된 이유 또한 있다. 두 가지가 이름에 겹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왜 소세지를, 짧게, 그리고 거칠게 만들었을까? 소세지가 왜 만들어졌을까부터 시작해야 겠지만 그것은 내 역할을 벗어난 일이므로 소세지라는 공법은 주어진 사실de facto로 생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독일 문화권 중에서도 프랑코니아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 소시지는 겉을 구워버린다는 점을 공통으로 하는 걸 빼면 가능한 모든 종류의 다양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긴 것, 돼지가 아닌 것 등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이미 다 있다. 그러나 독일 전역,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브랏부어스트의 표준형은 뉘른베르크식의 짜리몽땅하고 두께 또한 가늘지 않은 것이다. 브랏부어스트의 심장부인 소Füllung는 입자가 크고 거칠어서 두터운 소시지에서는 쉬이 저항할 수 있고, 무엇보다 소시지의 겉을 그을리는 과정에서 열이 빠르게 고루 전달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만 말하면 선무당을 잡는 셈이다. 두꺼워서 이가 들지 않는다면 칼로 자를 일이고 불이 두려우면 미리 삶은 다음 겉만 그을리면 되는데? 그런 일이 어렵거나 귀찮기 때문에 타협한 산물이 이 사이즈이다. 뉘른베르거 브랏부어스트는 대표적인 패스트푸드나 축제, 길거리 요리이기 때문이다. 브랏부어스트는 보통 빵 사이에 끼워먹거나, 간단하게 찐 감자나 사우어크라우트와 같이 항상 있는 것들과 곁들인다. 내장 등의 풍미가 없음에도 소시지 스스로 충분히 강한 맛을 내야하기 때문에 소금 뿐 아니라 마조람, 커민 씨같은 강렬한 향신료들로 맛을 낸다. 그렇게 왕창 만들어둔 뒤 불에 굽기만 하면 낼 수 있으니 편하게 먹고, 그래도 맛있는 전천후 만능 소시지인 셈이다.
그러니 뉘른베르거 브랏부어스트는 하찮게 대하자. 이런 결말이라면 곤란하다.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지만 노점상이나 시장 음식을 파인 다이닝의 시각으로 재발견하는 작업은 서울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맥락을 무시하지 않되 그 맛의 가능성을 생존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과정을 떠올릴 수 있다면 충분하다. 뉘른베르거 브랏부어스트는 길거리 음식 내지 패스트푸드지만 맛이 없지도, 하찮지도 않다.

둘째로, 이 소시지를 둘러싸고 있는 연출로 시각을 돌려볼 수 있다. 기름에 볶아낸 양송이, 감자 샐러드, 그리고 요청시 나오는 사우어크라우트. 흔한 구성을 그대로 복사했다. 다만 한국의 정서에 맞게 뜨겁게 그을린 접시 위에 올라온 점만이 다르다. 뻔히 있는 구성이므로 둘씩, 셋씩 짝을 맞추어도 크게 어색할 것이 없다. 그러나 뉘른베르거가 서울 동북지역에 존재한다 이상은 없는데, 잘 만든 소시지만큼 이 연출에는 욕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시지는 멀쩡하다. 조합도 멀쩡하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하다. 뉘른베르거 브랏부어스트는 작은 놈이 맛이 강렬하다. 따라서 자극을 둔화하는 빵이나 감자가 가장 먼저 따라붙고, 기름진 요리에 곧잘 따르는 사우어크라우트나 소스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양송이 버섯? 양송이의 풍미는 썩 어울리니 이것 또한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접시 위에 널브러졌다.
다시 말하면, 뉘른베르거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점을 통해 독일 문화권 전역에서 사랑받은 음식이다. 그러나 반드시 갈바닥에서 먹을 필요는 없으므로 맥주 한 잔과 함께 이렇게 앉아서 먹는 세팅까지 품을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이 형해화되었는데, 첫째로 감자 샐러드가 독일의 전형적인 방식에서 이탈했으니 균형추의 역할이 흔들린다. 우유나 달걀이 들어가 한층 묵직하게 자극을 받아낼 베를린식 감자샐러드나 질감의 경우 비슷하게 입자를 살려 함께 씹을 수 있는 남부식도 고려해볼만 하다. 지극히 한국 현지식인 감자 샐러드는 소시지를 기다리지 않고 그저 씻겨 내려간다. 양송이 또한 좋은 동료이나 편안함이라는 기본값과는 거리가 있다. 역시 최적해는 샌드위치 식으로 빵 사이에 포개버리는게 좋겠으나, 기왕에 접시로 낼 것이라면 버섯은 소스의 형태든 뭐든 이런 동거방식보다는 나은 결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여럿이 나누어 먹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므로 딥 방식이 아닌 소스는 기피대상일지도 모른다.

셋째로, 그 결말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다. 소시지는 크게 불만 없이 맛있게 잘 만들었는데 접시에서 구성은 습관에 기댄 느낌인데 왜 이런 거리가 생겼는가. 우리가 현재 육가공품을 대하는 주소가 이 근처 어딘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국밥이 컬트적 유명세를 얻었음에도 달리 돼지의 부속을 이용한 순대의 자리는 대한민국에서 재빠르게 좁아지고 있다. "후토마끼"마냥 인스타그램의 시대에 걸맞게 속이 비대화된 음식 아닌 무언가와 같은 한 부류가 살아남겠으나 반갑지 않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젊은 세대에게 순대의 역사는 계승되고 있지 않다. 국밥이 피에 흐르는 한식의 가장 밑바닥부터 "모던"이니 "세계화"니 추구하는 한식의 꼭대기까지 하나같이 무관심하다. 그런 가운데 드문드문 서구의 육가공품들이 낯섦을 무기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브랏부어스트는 대형 육가공업체들로부터도 구매할 수 있다(이름만일지라도). 독일계가 기업형 시장을 장악했다면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프랑스에 종종 기댄다. 낯선 만큼 현지라는 유령에 더 강하게 기대는 느낌인데, 한 민족이라는 순수성의 가치를 교육하던 시대가 불과 얼마 전이었으므로 현지의 그림자는 흐리기만 하다. 그 결과물이 애매한 재현이다. 우리의 육가공품에도 무관심했으니 남의 것도 연출에는 무관심하다는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언제까지고 적당히 삶은 뒤 접시에 예쁘게 담아 소금 정도를 찍어먹거나, 아니면 맹탕인 국물에 담겨 나오는 연출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서양의 육가공품도 그에 발맞춰 느릿느릿하게 스텝을 밟을 것이다. 다행히도 서구의 것은 낯섦을 유지해야 하므로 순대처럼 당면따위가 속을 채우는 퇴화의 과정은 거치지 않지만, 빚만 늘어간다. 더 맛있을 자격이 있는 소시지가 말뚝에 묶여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먹는 사람이 뭘 하겠는가. 우리가 푸아 그라니 소시지니 내장을 만질 필요는 없다. 수렵 채집의 시대? 별로 그립지 않다. 다만 그 맛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져보자. 애석하게도 이곳의 생존동력은 소시지의 특별한 맛보다는 근처에 멀쩡한 술집이라고는 없는 환경으로 보였다. 학센이 무엇인지도 몰라 주문해본 적 없는 단골, 치킨이나 노가리만 찾는 객의 무리를 보고 있자니 소시지를 만들었을 이들이 애석하다(물론 경제적 관점에서는 이게 더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으나). 소시지가 소주보다도 뒷전으로 밀리면 희망은 적어진다. 그래도 이곳에는 맛있는 소시지가 있다. 훌륭하게도 부드러운 뮌셰너 바이스부어스트도 있다. 소시지 둘을 두고도 색부터 두께니 질감까지 이렇게 다르고 경탄할만한 경험이 있다. 우리에게는 독일인들이 가진 무기가 없지만 우리만의 무기도 있을 것이다.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현지를 경전으로 삼는 대신 자유를 얻는다면 희망이 어딘가에는 있을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