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식향 - 2020년 여름 오픈

천년식향 - 2020년 여름 오픈

한국의 식음료 업계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음에도 많은 이들이 '씬이 쫍다'는 말을 되뇌이는 것을 곧잘 볼 수 있다. 그 기저에는 양적으로 성장했으되 철저히 영양의 도구, 또는 원초적인 욕망의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는 음식의 자리가 드러난다. 먹거리를 숭상해 마다않는 '푸디'들의 등장은 세계적인 흐름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뿐 결코 담론이 깊지 못하다. '민트초코'냐 '부먹 찍먹'이냐 하는 분쟁 내에서는 민트와 초콜릿, 튀김과 소스에 대한 무관심이 묻어난다. 기믹이나 농담거리로 소비되는 먹거리는 확대재생산에 일조한다. 이런 환경에서 외식에 일정한 이상 시간과 돈을 투자할 도시인들은 많지 않은데, 그나마도 관심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각 무리가 주제별로 삼삼오오 모이게 된다. 그것이 '씬이 쫍'은 이유가 아닐까, 함부로 추측해본다. 어쨌거나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전히 가성비인 시대에 외식에 함부로 일정 이상 액수를 소비하는 이들은 각 분야마다 많지 않고 또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해야 전부 서울시 어딘가이므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것은 마주하는 현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이미 어느 방향으로 조명들이 쏠려있는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서울의 고급 외식은 산업화 시대를 겪은 근현대를 기반으로 해서 가격 내에서 원재료, 특히 동물성 단백질의 원가 비중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엔드급'부터 '엔트리'까지 줄을 서는 '스시 오마카세'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고가 외식의 명실상부한 심장부이며, 그 다음이라고 하면 이제는 프렌치도, 한식도 아닌 '한우 오마카세'다. 뭐가 되었건 이름이 '오마카세'여야 고급으로 쳐주는 젊은 소비자들이 속속들이 목격된다.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프랑스식 정찬(프랑세라고 해야할까?)을 두고도 오마카세라고 부르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고 또 한 켠에서는 '그건 오마카세가 아니고 파인다이닝' 정도로 퉁치려는 시도가 양립한다.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요리에 대한 무관심인데, 나는 이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본 블로그를 개설하며 '바르트'타령을 했다. 아마추어적 글쓰기를 통해 작품을 둘러싼 구조를, 작품을 통해 작품을 만든 이 스스로마저 거부할 수 없는 배경의 존재를 읽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50~60년대 프랑스에서 발전한 문학 비평 논쟁과 2020년의 한국의 외식 소비를 둘러싼 풍경을 동치할 수 없다. 사람들이 현재 식문화의 존재하는 역사의 맥락, 그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있는가? 나는 정 반대를 읽는다. 사람들은 음식을 둘러싼 인류의 역사를 빠른 판단을 위해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사소한 것들이 가장 먼저 버려지며, 모른다는 한 마디가 허용되지 않는 문화가 결국 중요한 것마저 취향의 영역으로 이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야 할 아마추어는 오염되어 한 끼 공짜 식사와 푼돈의 광고비에 영혼을 팔고 유치한 수준의 검색 기반 지식만을 반복한다. 이런 찌꺼기들은 걷어내고 남는 것은 인상비평인데, 글도 그렇듯 맛보는 버릇에도 삶의 경험이 묻어나므로 그런 것들의 기록으로만이 의미 있는데, 결국 훈련되고 관리된 전문가의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서지 못하는데, 맛보는 기관은 외부 환경-바로 두뇌에 입력된 내용-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의 자리에는 노출빈도, 즉 유명세가 수익에 직결되는 광고 수익 기반 매체, 파워블로거부터 유튜브까지, 위에 사람들을 현혹할만한 고가의 비용을 지출하는 사람들의 한 축, 그리고 그러한 비용을 치를 합리적 이유가 있는 업계의 종사자들이 다른 한 축을 맡는다. 고가의 외식을 주로 주제로 삼는 이들이 곁다리로 언급하는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외식의 좌표가 어느 쪽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의심케 한다. 화폐 취급을 받는 클럽의 아르망 드 브리냑이나 돔 페리뇽 루미너스를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다. 물론 소비하는 계층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다른가. 스시의 곁을 지키는 콜키지 돔 페리뇽은 야광이 없다는 것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서울에도 적지 않은 수의 요리사가 서방 세계를 중심으로 한 담론을 수입하고 있으며, 예술의 영역, 바로 사람의 삶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요리에 도전하는 이들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반드시 아름다움만을 말해야 하는 시대가 지났으므로, 맛보는 재미도 논하는 재미도 무궁무진하다. 세 문단에 걸쳐 토해낸 불만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한 끼의 장소가 천년식향이었다. 나는 현재 서울의 채식 요리와 그를 둘러싼 비좁은 공동체가 또 생각이 났으나 나는 그런 맥락의 바깥에서 채식을 즐기고 싶었다. 어쨌거나 현대 요리의 가장 굵은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채식이며, 또 현대 요리의 기술적 발전을 가장 느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채식을 통해 스스로를 표출하는 공간은 많지 않은데 거기에 더해 '소식'이 무기한 휴식에 들어갔다. 현실적으로 파인 다이닝을 표방하는 곳들에서도 채식 메뉴는 구색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채식을 주제로 자신을 표현하는 요리사는 사실 이곳에밖에 없는 것 같았다.(혹시 또 있는가? 부디 가르침을 바란다) 이 점심은 필연이었다.

방문 전에

캐치테이블을 통해 예약해야 한다. 예약금이 있으며 별도의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당일날 캐치테이블 시스템을 통해 알림을 받을 수 있으며 별도의 확인 전화는 하지 않는다.

요리

tofu or egg?

천년식향의 요리는 크게 세 가지, 피자와 디저트 그리고 이런 채식 식재료를 주제로 요리로 나눌 수 있는데, 본래라면 네 가지 뿐인 채식 요리를 전부 맛볼 수 있는 코스를 선택해야겠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두 가지로 타협했다. 각각 달걀과 해산물(새우), 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런 컨셉트부터 다소 지루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왜 채식 요리는 동물성 맛의 모방을 자꾸 추구하려 하는가? 두부로 만든 달걀은 달걀 흰자의 불쾌한 향마저 썩 그럴싸하게 모사했는데, 황 화합물이 반드시 달걀에만 존재할 이유도 없으니-당장 우리가 달걀 냄새로 묘사하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 요리의 열쇠는 스크램블 형태로 만든 두부와 각종 허브, 그리고 말린 빵조각의 조립이었는데, 두부가 왜 달걀을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떤 콩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콩의 고소한 맛을 불쾌하지 않은 점도로 녹여내었는데, 어수선하게 올라간 허브들의 향을 가리지 않아 땅을 밟고 서는 감각을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었다. 다만 NG인 지점은 그릇이었다. 탁자는 나무, 접시는 돌. 자연을 주제로 삼은 공간의 맥락으로 활용하고 싶었겠으나 지나치게 불편했다. 숟가락이 향하는 방향에는 벽이 없으니 접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생각보다 세심하게 설계되었던 지점은 크루통의 절묘한 질감이었다. 바싹 마르기만 한게 아니고 맛이 뭉쳐있었다. 짠맛과 절묘하게 어울려 내는 콩의 풍미는 위력적이니 비지가 아닌 형태의 두부의 존재의의는 채식의 안팎 어디에서도 빛날 수 있었다.

shrimp & avocado

이 요리부터 네 번째, 주문하지 않은 "섹스 & 스테이크"까지가 이 공간의 물음표다. 분명히 사입하여 제공할 채식 새우(비건 새우)와 비건 패티, 결국 모두 콩으로 만든 모사품인데, 이런 재료들은 맛의 영역에 있어 대체의 역할도 해낼 수 없을 뿐더러 채식을 자신의 무대로 삼은 요리사가 좇을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지 않다. 비건 새우는 곤약이나 전분 따위의 융합체이다. 영리한 제품은 식품과학의 지혜를 빌려 검류 따위를 조합해 새우살의 질감까지 모사하지만, 결국 색소를 입힌 콩맛이다. 해조류 등의 도움을 얻어 희미하게 갑각류인 척을 해보지만 맛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물건이다. 단맛이 강렬한 토마토와 신맛을 한껏 얹은 아보카도 무스, 겹치는 콩과 잣, 마지막으로 콩새우가 흩어진 가운데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또 각종 허브, 그리고 둘러낸 기름이 이 요리는 샐러드입니다. 하는 지점을 짚고 있다. 구성 자체가 개별적인 요소들을 두세 가지씩 나누어 맛볼 수 밖에 없는데, 옅은 맛의 재료들은 허브의 향에 짓눌려 곧 희미해지는 가운데 토마토의 단맛과 잣의 향만이 살아남는다. 잣의 또렷한 향기는 그 자체로 고혹적이었고, 토마토는 특유의 감칠맛은 빈칸에 가까웠지만 요리의 단맛의 역할만큼은 해냈다. 그렇지만 요리의 이름, 아보카도와 새우는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못했다. 대두단백과 병렬된 콩 또한 맛이 옅었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땅에서 자라는 식물은 생태계의 맥락 속에서 존재하지, 맛의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다. 그것을 탐닉하기 위해 종자를 개량하고 다양한 온도에서, 다양한 시간에서 변화시키는 것이 인류의 의지이다. 그러나 맛 바깥의 논리에서 바라는 목적이 많으므로 화물선에 실려 선물로 거래되는 옥수수부터 도구로 가공되는 대두단백 같은 것들이 시장 규모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야채 요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 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잣만이 빛날 뿐, 그러한 현실을 무던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우전 雨前茶

논 알콜 페어링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서양의 담론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는데, 세 잔을 다 마실 엄두도, 낮에 술을 곁들이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차선으로 차를 택했다. 보이차가 있는 점은 흥미로웠으나 주문하지 않은 음료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얼음까지 띄워 차게 내니 사실 우전의 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입안을 정리하는 용도에 충실했다. 그럼 따뜻하게 요청하지 그랬느냐고? 서버가 권해서 택해보았을 뿐이다.

버섯 크리머리 mushroom's creamery

공간의 주인공인 피자는 '셰프 스페셜'이 있기는 하나 비트를 사용한다는 점 빼고는 도무지 짐작할 수 있는 설명이 아니었으므로, 이해할 수 있는 메뉴로 이걸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채식 요리의 방향성과 적당히 어울릴 것이라 짐작했다. 감칠맛과 향 모두를 잡을 수 있는 버섯은 무대의 주연으로 서기 충분하며, 가짜 살덩이 쪽 보다는 것보다는 대안 유제품 쪽이 맛에 있어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세 가지의 버섯은 아마 트러플을 포함한 말이었던 것 같다. 위를 그을려 낸듯한 모양새인데, 여러모로 피자의 전통과는 멀어 보인다.

전통이 아닌 오로지 맛, 추구하고자 하는 맛과 실재하는 맛, 두 가지만이 중요할 것이다. 가루로 낸 트러플은 곧 파와 버섯의 강한 향기에 눌린다. 인공 트러플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단가를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의도 아닌 필연의 느낌이었다. "엄격한 비건은 트러플을 먹지 않는다"는 설명은 그야말로 부적절했다. 그럼 저는 누구일까요, 헐렁한 채식인? 하여간 주목받지 못하는 객인 트러플을 벗겨내면 진가가 드러난다. 밀가루와 소금, 물로만 빚어내는 사워도우는 점잖게 맛의 밑바탕을 깔아내는데, 설치된 시설의 한계로 만족스럽게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지 못한 점은 일견 치명적이었다. 포카치아건 피자 도우건 결국 고온에서 빚어지는 마이야르와 질감은 핵심적이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포카치아 따위가 단단함을 배제하고는 하지만 피자의 끝자락은 단순한 손잡이가 아니다(손잡이의 역할을 하지도 못한다). 섭씨 500도에 도달하는 고온에서 순식간에 완성되는 마법이 피자맛, 즉 도우맛의 중심이다. 사워도우라는 설명은 어색한데, 피자 도우는 기본적으로 발효를 거친다. 비가같은 것을 썼다면 사워도우를 만드는 현대적인 의의, 보관성이 아니라 미생물들이 만드는 독특하고 복잡한 풍미를 잡아내야 한다. 그런 빵에 우유따위가 끼어들지도 않으니 채식인에게도 충분히 허용되어 있으니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이것은 피자를 유일한 식사 메뉴로 제안하는 공간의 피자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시설 타령을 했지만, 꼭 장작을 떼고 기교를 부려야만 얻을 수 있는게 온도가 아니다. 저렴한 축에 속하는 유리창 달린 피자 오븐도 300도 후반에서 스펙상으로는 500도를 지원하는 제품이 있다. 화덕모양 오븐도 장작이 아니라 가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낮은 온도와 부족한 조리시간은 밀도가 낮은 맛을 연출한다. 모든 토핑이 용서되지만 빵만큼은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핑의 구성, 즉 맛의 설계 자체는 기대 이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어떤 가능성마저 있다. 익은 파까지 가세하는 단맛 위주에 전형적인 피자의 경험을 지배하는, 흰 치즈의 맛을 모사하는 대신 거의 들어내고 그자리에 구운 버섯과 파, 익숙하고도 사랑스러운 우리 야채의 향기와 대안 유제품, 그리고 소금의 조화가 절묘하다. 피자로서는 기능할 수 없지만 빵을 끊어서 말아먹는다면 케밥이나 타코같은 요리가 생각난다. 그냥 펴발랐다면 훨씬 나았을 버섯 크림은 이러한 경험의 중심부에서 감칠맛과 짠맛, 그리고 단맛의 균형을 조율하니 충분히 맛있어서 음료에 저절로 손이 간다. 애석하게도 나는 찬물에 의지해야 했으므로 이 경험에 대해서는 반쪽의 이야기만 전할 수 있는데, 서버가 내 우전을 깨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국간장 발로나 초콜릿 케익 Balona chocolate cake

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다양한 식물의 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디저트 분야는 채식의 방향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가장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가능한 디저트 두 가지를 모두 맛보았다.('맥 플러리'는 매진). 이 디저트는 코스에 포함된 것이므로 이름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Balona'인걸 알았다면 나의 선택이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Balona라고 쓴 것이 아니다.

일전에도 이런 유사한 음식을 서울에서 맛본 적이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는 케이크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부서진 파운드 케이크 반죽 기반의 케이크와 가루, 그리고 허브로 구성된 음식을 맛보았으며, 둘째로는 여기는 서울이니까 장을 이용한 디저트를 만들겠다는 음식을 맛보았다. 두 가지 모두 불유쾌한 기억으로 남는데, 역시 겉과 속의 대비라는 제빵의 왕도와 무관하게 구워져, 점도 있는 케이크와 가루의 궁합은 입안의 수분을 지워낸다는 점에서 전자의 슬픔이 있으며, 한국이니까 장류를 이용한다는 발상은 있으되 장의 피로감, 감칠맛에 더해 짠맛까지 가지는 장이 식사를 마무리한다는 개념과는 아득히 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후자의 슬픔이 있다. 이 디저트는 전자의 측면에서는 전자보다 나았고, 후자의 측면에서는 후자보다 나았다. 의도는 아니었으나 한참 늦게, 식사를 끝낼 때 쯤 다시 등장해준, 사고 덕에 아직 온도가 내려가지 않아 특유의 향을 즐기기 더 좋았던 우전차와 함께하니 가루를 얹은 케이크의 질감또한 감내할 수 있었으며, 과나하 내지 과나하만큼 익숙한 커버춰를 사용했을 익숙한 맛에 코코아, 코코넛, 허브로 향기들을 더하니 접시에 파고들 이유가 있었다. 숙성연수로 치면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것으로 어림짐작되는 국간장(재래식 간장)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고 초콜릿와 코코넛, 열대의 향기 아래 철저하게 짓눌려 미세하게만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름을 몰랐다면 지나칠 정도였으므로 후자의 불쾌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굳이 이런 요소들의 합일체를 요리로 내기로 했다는 점에서, 도전의 의미는 있으되 그 다음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코코넛의 섬유질은 디저트에서는 최선이 될 수 없다. 코코넛의 맛과 향의 정수는 꼭 코코넛 하나를 직접 자르지 않더라도 깡통으로도 접할 수 있다. 단맛도, 향도, 활용할 방법도 디저트에서 더 잘 어울리는 쪽이 명백히 존재한다. 칩으로 소개되지만 바삭하게 부서져 입안에서 승수 계산의 위력을 보여주기보다는 한 두 번 끊어진 뒤 잔류하는 과육은 음식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일쑤다. 허브들 또한 간장처럼 향이 스치우지만 야로우 잎이 이곳을 '노마'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향이 혀를 잊게 할만큼 강하지도 않은데 이런 연출의 의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호지 차 아이스크림과 된장 Hou-ji tea ice cream

몇 곳의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들에서도 만날 수 있는 호지 차 아이스크림. 개인적으로 주기적으로 사먹을 정도로 비건 아이스크림이라는 장르에 관심이 있으므로 먹어볼 수 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허브가 좀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서버와 허브에 대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식사의 끝에서야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튀일을 대신할 라이스 페이퍼를 바싹 익혀냈고 아래에는 된장(으로 추정되는)을 캐러멜과 섞어 발라내었다. 그 아래 펴바르는 식으로 아이스크림을 깔아냈다. 끄넬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디저트로서 모양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점은 나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종래의 비건 아이스크림이 논비건, 즉 그냥 아이스크림을 레퍼런스로 삼고 그와 유사하게 발전해가는데 있다면 이곳의 아이스크림은 그런 맥락에서 완전히 이탈한, 제삼의 음식이었다. 콩단백의 흔적이 남아있으나 이물감이 있지는 않고 곧 녹아내리기는 하는데, 아이스크림이라는 형식 속의 실질, 먼저 낮은 온도를 느끼고 온도가 상승하며 크림이라는 분자 구조가 액체로 무너지고, 그 속에서 맛이 피어오른다는 내용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이 상태가 되기 전 본모습의 문제는 아니었다. 맛은 입안에 들어차는 순간 충분히 느껴진다. 기분 좋은 단맛, 비록 호지차의 향은 저 가루 속 어딘가에 있을 뿐 느껴지지 않지만, 형태가 낯서니 반복의 맛이라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다만 가루에 왜 이렇게 천착하는가. 입자 형태로까지 만들면 표면적이 엄청나게 확장하기에 맛이 엄청나게 강렬해지는가, 실행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요리를 하는 이유다. 가루로 된 음식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당장 주제부터 호지차인데, 가루로 만든 차를 생각해보라. 가루를 물에 타서 끝, 이런 슬픈 요리가 아니다. 그 가루가 물에 온전히 맛을 바치기 위해 인간의 의지가 개입한다. 눈앞에 흩뿌려져 있는 가루는 맛을 만족스럽게 전달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프로즌 커스터드와 유사한 형태인 이상 입안 전체를 어루만지며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고, 취식 방식에서도 바닥에 얕게 깔린 아이스크림을 저 숟가락으로 양껏 퍼담기는 불가능하므로 입안에 흩날린 가루는 잔류하고, 이물감을 느낄 때 호지차의 옅은 향만이 지나간다.

가루가 철저한 외부인으로서 이물질의 시간을 기다릴 때에 전체의 경험의 중심은 탄수화물의 위아래, 캐러멜과 야로우가 구성한다. 허브가 코를 찌르는 새 끈적한 캐러멜이 단맛을 적신다. 디저트의 역할에는 수행하지만 가격(KRW 8000)을 생각하면 충실하지 못하다. 캐러멜과 아이스크림은 연이어 입안의 수분을 앗아가지만 그만큼 맛이 진하지 못하니 음료와의 궁합에서는 글쎄다. 식후주를 맞추어 낸다면 식후주에게 잡아먹힐 공산이 크다. 다양한 물성이 한 접시 위에 부유하지만 어우러지지 않는다. 단단한 탄수화물을 부수어낼 때 아이스크림은 같이 녹아주지만 캐러멜은 그렇지 않다. 캐러멜이 뒤늦게 지난 뒤에도 분말이 남는데 개별적으로 각각 풍미가 진하지 않으니 먹을 열정이 줄어든다.


총평: 개별 재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잔뜩 묻어나는 가운데 요리라는, 주방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에 대한 무관심이 극도로 불균형적인 요리를 만들어낸다. 주방에는 사람이 세 명 밖에 없는데 한 명이 셰프 드 퀴진의 역할을 할테니 실질적인 조리 인력은 두 명인 셈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요리는 맛이 아닌 다른 방향, 주방에서 현출하기 좋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주방의 기구들을 이용한 화학적 변화의 비중은 텅 비어있거나('tofu or egg?', 'shrimp & avocado') 이해도의 부족이 드러난다(피자, 아이스크림). 요리의 밑바탕이 될, 한반도 땅에서 나는 것들은 도소매상을 거치지 않고 생산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서비스 매니저의 자랑 아닌 자랑의 지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들도 있다. 녹차와 토마토는 농촌의 현실을 감안할 때 기대 이상이었고, 잣이나 버섯처럼 본래도 충분히 빛날 수 있지만 들러리 취급을 받던 재료들이 가진 아름다운 지점을 적절히 찾아내어 드러내어 주는 지점 또한 있었다. 그러나 주방에서 일어나는 요리, 그리고 이 땅 바깥에서 생산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이 묻어나왔다. 초콜릿의 원재료인 카카오, 아이스크림에 들어가는 바닐린, 공장에서 생산되는 가짜 새우, 수입 아보카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고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맛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초콜릿은 초콜릿이지, 익숙한 맛이잖아. 그 맛이 타겟이다. 비건 새우는 원래 이런 맛이지. 그래서 그냥 이렇게 낸다. 식당이 천 년을 갈 맛을 내겠다고 했다. 그 천 년은 모든 사람의 천 년은 아닐 것이다. 오늘내일 먹거리를 걱정하고 고민해야 할 채식인, 무슨 이유로건 식이생활에 일정한 제약을 가진 이들의 영원한 행복을 고민하기에 천 년이라는 선언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그 맛이 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밤에도 채식인들의 더 나은 식생활을 위해 나아가는 곳들이 있다. 채식인으로부터 돈을 벌어야 하는 글로벌 식품기업, 치폴레(NYSE: $CMG)부터 비욘드 미트(NASDAQ: $BYND)까지 자본은 채식인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력자이다. 채식은 낭만 내지 미신이 아닌, 맛과 삶에 대한 도전이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늦출 수도 없고 늦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이곳의 요리는 전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두단백의 적극적인 이용, 분말화(powderization)부터 허브의 적극적인 개입, 탁자에 놓인 '비건 플레이버 바이블'같은 책까지, 요리가 어디로 가고있는지 통신이 오고가고 있다는 흔적들은 있지만 안부나 물을 뿐 좇지 않는다. 기존의 습관에 적당히 앉아서 가공 없는 조립, 융화가 아닌 병렬이 반복된다. 전채에 있어서는 그나마 그런 구성이 가능하지만 디저트까지 일관된다. 이러한 요리가 나오게 되는 이유는 본질적인 구성에도 있는데, 앞서 말했듯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언가를 지지고 볶고 할 형편이 전혀 아니다. 음식의 가격을 생각하면 '스타지'같은 것들을 제끼고 윤리적 경영을 한다고 해도 추가적인 인력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개업한지 오래지 않았으므로 벌써부터 경영난이라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구성의 죄를 입구부터 공간 곳곳에 존재하는 먹거리 바깥에 대한 과한 관심에 묻고 싶다. '섹스 & 스테이크 연구소'라는 입간판은 육식 문화와 남성성, 푸드 포르노같은 대담한 문제의식을 던져줄 것 같지만 그 고기를 두고 수백년, 수천년간 탐닉해온 인간의 의지와 열정을 탐욕으로 치부하고 곧 관심을 끊는다. 맛이 죄악인가. 그럼 아예 反-미식의 음식, 맛없음으로 도전하는 음식을 할 수도 있을텐데 그렇지는 않고 대신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맛을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인식한다는 느낌이 역력하다. 실제 나무라서 물이 스미면 갈라진다는 나무 탁자는 앉은 사람이 탁자의 다리 사이에 끼어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극도로 불편하지만 고귀한 나무님 앞에서 죄인은 형을 받을 뿐이며, 채식이라는 실천, 사회 변혁을 위한 행동 앞에서 맛은 저 뒷전으로 밀려난다. 오늘날 채식인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데 거 채식이 맛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채식 요리 좀 대강이면 어떻습니까. 채식 요리 하는 사람들이 열악하면 좀 어떻습니까? 지금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채식인은 맛있는 하루, 행복한 삶이 허락되지 않는 투사들로 대접받는다. 이것은 이곳만의 문제는 아닌데 사실 서울에서 굳이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유사한 채식 요리들은 훨씬 처참한 경우도 많다. 그래도 이곳은 이 땅에서 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있고 지식도 있으므로 더 나은 결과물을 내지만, 나는 감히 천년식향이 이런 요리의 리더가 되야 한다고 믿으므로 충분하다고는 절대로 할 수 없다. 당장 내가 이날 치른 비용으로 비채식인들이 갖는 먹는 행복의 양과 질을 생각하면 채식인의 오늘은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결국 환원하면 대두단백과 첨가물일 뿐인 물건이 채식 요리의 일관된 주제라는 것 또한 불유쾌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채식인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물건들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요소다. 하지만 이곳은 누가 보아도 그 다음을 제시하는 곳이다. 셰프도 기성품을 충분히 맛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로 맛없다. 윤리적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취약점이다. 세계 최대의 대두 생산국인 브라질산 대두는 노예, 굴욕적 대우와 삼림 파괴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어디에서도 온지 모르는 깜깜이 전분, 깜깜이 대두단백을 소비하기 꺼리는 둘째 이유다(첫째는 맛). 이런 기성품의 문제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그 다음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이고 그래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채식이 수단으로 대접받는다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디저트는 어떠한가. 장은 쓰이되 왜 발효식품이 서방에서 그렇게 난리인지 하는 맥락은 없다. 미생물에게 관심이 없고 그 맛의 표현보다는 존재에 의의를 찾을 뿐이다. 동양을 향한 이정표 정도의 역할. 적도 근방의 이방인들은 실제 적도 근방의 이방인들처럼 대접받는다. 카카오와 코코넛은 방치된다. 나는 채식을 사랑하고 채식인의 먹는 행복은 바로 오늘부터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채식 아닌 요리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채식을 위해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이곳의 요리는 그런 것들을 조금씩 빌려왔다. 그러나 적당히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채식인들이 먹는 음식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결과물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면 정말 그 무게를 느껴야 한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그 맥락의 아주 바깥, 적을 넘어선 지각할 수 없는 누군가까지도 설득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리는 그런 정치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자신의 편을 갈무리하는데 그치고 있는데 그마저도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레스토랑도, 맛도, 타자와의 관계 사이라는 존재의 위치를 부정할 수 없다. 삶이 그렇고 예술이 그렇다. 회피할 수 없다.

분위기: 현대의 대중음악의 유행을 한껏 수용한 재즈 위주의 선곡이다. 보컬이 주제인 재즈 위주, 한껐 흥겹고 가볍다. 간격이 여유 있는 공간은 역시 무언가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천장 마감과 기구 선택 덕에 한껏 편안함을 선사한다.

서비스: 단 한 명의 서비스 매니저가 일당백으로 해낸다는 점에서 논하기 어려우나 실로 위대하게 해낸다. 객이 요리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가 묻어난다. 다만 요리에 대해서만큼은 역시 무관심을 피해갈 수 없는데, 세 번째로 내 눈에 보이는 때 나는 그녀에게 허브의 이름을 물었다. 그때까지도 계속 요리를 앞에 두고 '저거랑 이거'같은 말을 듣는 것은 불쾌했기 때문이다. 장난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정말로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주방에서 나오는 요리에 대해서는 그녀도 그저 외부인이었던 것이다. 특징을 고려하면 하나의 공동체와 같은 구조라고 생각했는데 짐작이 틀렸다고 느꼈다. 햇빛 아래서 독서나 수다를 떨기에는 좋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실제로 창가는 레스토랑의 사무공간을 겸하는지 노트북을 두고 사무를 처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자연이 주인공이 된 나머지 식사하는 인간은 주목받지 못한다. 탁자의 다리의 위치를 위해 사람이 몸을 꼬게 되고 집기의 형태에 사람이 고생을 하는 식이다. 볼록하게 솟아오르고 만 원목의 탁자는 서비스 매니저가 잔을 깨도록 하고 말았다. 수납 공간이 없어 의자에 두었던 외투와 가방에 음료가 한껏 끼얹어졌으나 책임자가 있을 주방은 놀랍도록 무관심해서, 그녀에게 차마 책임을 물을 수 없어 젖은 것들에 대한 손해는 내가 감수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방 안의 전자기기들을 모두 꺼내어 몸 가까이 두었기에 침수의 참사는 막을 수 있었으나, 젖어버린 책은 곧 다시 살 것이고 가방과 옷은 세탁을 맡겨야 할 것이다. 하필 물이 아니라 차라서. 매니저가 거듭 사과했지만 계산하는 순간까지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따뜻한 마음씨로 무장한 한 명의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이상을 해내고 있다.

가격: KRW 25000정도의 피자가 단품의 주인공이며, KRW 39000부터 KRW 79000까지 코스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만 원이 오를 때마다 채소 요리가 하나씩 늘어난다. 디저트 단품은 KRW 8000.

음료: 오렌지 와인, 펫 낫, 로제로만 이루어진 짧은 리스트. 이런 리스트를 보통 '내추럴 와인'이라 부르는 듯 하다. 로제를 제외하면 의외로 상업적으로 개량이 많이 이루어진 품종들이 눈에 띈다. 리슬링과 피노 그리기오, 그르나슈와 심지어 샤르도네도 있다. 내추럴 와인답게 2020년에 2019년 빈티지를 여럿 볼 수 있는 것 또한 눈에 띈다. 어찌 보면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다양성의 구성.

알코올이 아닌 음료의 경우 몇 종류의 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썩 기대감을 가져도 좋다. 개인적으로 보이차를 썩 좋아하고 여러 차창을 경험하며 보이차의 깊이에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보이차가 있다는 점이 매우 반가웠으나 어떤 보이차인지는 업장도 모른다는 말에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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