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mann Frères, Grand Yunnan G.F.O.P.
100g에 8유로짜리 틴이 4만원을 넘본다는 사실이 피를 끓게 만들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했던가, 달콤한 향 때문에 금새 찻잔 바닥의 내음이 흩어질까 잔에 코를 대고 킁킁대기 일쑤다. 하지만 등급 분류가 말해주듯이 향의 전반적인 집중도는 좋게 표현하면 점잖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뎠다.
녹차가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으로 유지된 높은 관세율(513.6%), 그리고 녹차라고 부르기 어려운 곡차인 현미녹차의 높은 점유율, 기능성 음료 위주의 연구개발에 겹겹이 덮여 장기간 희망 없는 분야인데 반해 홍차는 분노를 자아내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세금, 그리고 애초에 없다시피한 얇은 애호가층 덕에 잘 가꿀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물론 커피의 표준형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인 세상에서 홍차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 첫째로 떠올려볼 만한 경우는 보이차와 같이 맛 바깥의 권위를 빌려오는 방법이 있다. 우리 농민들 이름은 몰라도 공산당 치하의 차창 이름은 외우게 만들듯이 프랑스대신 인도 지도를 펴게 만들 수 있을까.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다. 둘째로는 에스프레소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진액이 되었듯이 홍차 역시 얼음 가득 채운 시원한 음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침출법,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먹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향 위주로 찻잎을 고르고 가공하는 것이다. 에스프레소 머신과 같은 추출 방식이 아예 없다는 현실이 한 번 가로막고 기름이나 단백질이 없는 잎사귀라는 본질이 두 번 가로막지만 고민은 해보아야 한다. 정산소종과 같이 특징이 강한 맛이 빠르게 추출되는 차를 쓰거나 적극적으로 가향차를 채택하는 방식이 가능하겠으나 차선에 머무른다. 셋째로는 음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시각적 효과를 불어넣어 사람 심리를 악용하는 방식이다. 첫째 방법과 병용하는 것인데 와인과 사케에서부터 배울 수 있다. 커다란 용기, 더 커다란 로고로 중무장한다. 마침 홍차에게는 애프터눈 티라는, 사치스럽기로는 더할 나위 없는 짝이 있다. 실제로 서울의 유수한 유명 찻집들은 전부 애프터눈 티를 운영하고 있으며 평소에는 워크인으로 갈 수 있는 널널한 가게더라도 애프터눈 티 세트만큼은 언제나 마감 행진을 이어나가고 있다. 때와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애프터눈 티를 즐긴다는 것은 일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므로 인연이 닿은 적은 없지만.
왜 이렇게 생각이 길었나. 이 차의 깊이가 결코 얕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그렇게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프레르 본사는 같은 차창 제품으로 두 배에서 네 배까지 비싼 가격을 받는 고급품까지 유통하고 있는데 그쪽이라면 더욱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겠지. 머릿 속 어딘가에 흔적처럼만 남아있는 좋은 차와 좋은 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 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