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틴 - 아이스크림의 신메뉴

더 마틴 - 아이스크림의 신메뉴

계획의 이상으로 가정집의 냉동고에 아이스크림이 비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여느 곳에서는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이는 중대한 문제로, 다행히도 주말이었으므로 아마도 두세 달 만에 「더 마틴」의 아이스크림으로 냉동고를 채울 요량으로 걸음을 나섰다.

내가 이곳을 선택하는 이유는 내가 하겐 다즈를, 혹은 벤 앤 제리스를 냉동고에 항상 채우는 이유와 같다. 훌륭하게 만들어진 뻔한 맛들이 언제나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손님만큼이나 늘어나는 생산량을 보면 아주 모범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좋은 요리란 소수의 사람들끼리 꽁꽁 숨겨놓고 최고의 진미니 셰프니 떠드는게 아니라, 그 경험을 열화하지 않고 복제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을 때만 "좋다"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 서울에도 피에르 가니에르가, 야닉 알레노가 파리에서 뛰어넘어와 레스토랑을 컨설팅하지 않는가. 그들이 엘리제궁 뒷켠에 숨어있었다면 그들은 대단한 조리사일지언정 예술가, 혹은 혁신적인 기업가로서 오래 기억에 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버릇처럼 항상 챙기던 맛들을 챙기던 와중에 불과 일이 주 전과는 메뉴가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신메뉴가 포제띠를 썩 채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닌가. 신메뉴의 구상보다도 생산량의 증량을 목표로 양적 성장을 바라보던 곳에서 세 종류 이상의 신메뉴를 만나게 되니 기쁘다기보다도 의혹이 일었다.

나는 아이스크림 시장의 신메뉴 출시가 달갑지 않다. 모두들 신메뉴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스크림이 일상적이지 않은 무언가이기 때문인데, 반대로 생각해서, 일상적인 요리에 신메뉴를 찾는가 하면 여러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러분은 새로운 김치에 목마른가? 새로운 형태의 짜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면 중국 요리계에 영원히 실망하는가? 제육볶음의 새로운 맛을 기대하는가? 전혀, 전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게는 아이스크림도 응당 그러한 위치에 있다. 물론 아이스크림의 폭은, 제육볶음보다 넓으므로, 새로운 맛, 혹은 창작, 예술이라 불릴만한 영역마저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 즉, 새로운 것이 새롭게 취급받기 위해서, 새롭지 않은 것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아이스크림은 가격부터 접근성까지 일상의 음식이 아닌가. 훌륭한 간식, 더 훌륭한 후식으로 자리부터 잡아야 한다. 바닐라와 초콜릿과 같은 익숙한 맛들이 충분히 훌륭해야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기초적인 맛들은 전혀 훌륭하지 않으며, 수입 기성품들의 안정적인 훌륭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단지 초콜릿만이, 한국에 자회사 베이크플러스를 가진 사벤시아社-발로나의 주인이다-에 기대어 그럴싸한, 하지만 다 비슷하여 초콜릿에 대한 담론을 전혀 따라오지 않는 풍미를 제공할 뿐, 훌륭한 균형과 충분한 풍미를 지닌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가 절실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 눈을 감고 계속 새로운 맛들을 추구해 봤자, 아이스크림은 일상의 행복으로 진입하기 어려우며, 단지 미래에 곧 잊히고 말 농담 내지 장난기 가득한 낭비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피에르 에르메 선생님과 같은 열정과 창의력을 보여주어서, 아주 새로운 아이스크림이 영원한 일상의 행복으로 자리잡게 만들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보다, 이제는 경험적a posteriori으로 인정된 맛을 넘어서 선험적a priori인 맛의 훌륭함에 가까운-마트의 냉동고를 채우는 기성품들이 레퍼런스를 선택한 시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고전적인 풍미들의 훌륭함을 재현하고 또 개선함으로서 일상에 아이스크림의 위치를 각인하는 것이 우선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 샌드위치의 인기를 등에 업고 냉동고-포제띠? 냉동고.-를 굳건히 지키는 「더 마틴」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다. 500~700ml의 용기를 가득 채우는 가격(KRW 25000 언저리)은 KRW 12000/473ml의 파인트들에 비해 풍미의 훌륭함과 냉동고에 우겨넣기 전에 즐길 수 있는 질감의 훌륭함을 감안하면 간격이 깊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바닐라에 올라가는 올리브 오일이 얼어버려 젤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므로, 의도를 좇기 위해서 가정에 유사한 올리브유를 상비하고 있어야 하는 일만이 조금은 귀찮을 뿐이다.(나는 여전히 오로바일렌의 피쿠알만을 구비하고 있지만-매장에서는 다르게 쓴다.)

그런데 그곳에서 여러 종류의 신메뉴를 보았으므로, 취재 욕구와 사리사욕이 동시에 겹쳐 포장용기를 챙기는 사이 컵을 하나 맛보기로 했다. 정파나 다원의 홍차를 썼다고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한 홍차는 엄밀히 말해 일종의 (샌드위치가 아닌)아이스크림 객을 위한 메뉴의 연장선에서 차 젤라또의 연장선이므로 진정한 신메뉴라고는 부를 수 없고, 문제가 되는 진정한 신메뉴는 체리 그리고 커피와 초콜릿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컵에 담지 않았으므로 논할 수 없고, 앞선 두 아이스크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먼저, 고정된 메뉴가 있는 곳에서 신메뉴의 역할은 어떠하며, 어떠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소셜 미디어를 주축으로 한 인스턴트 소비의 시대에 패션에서 먼저 보인 "농담"의 유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신메뉴는 이른바 '어그로'를 끌 수 있다. 베스킨 라빈스가 매달 신메뉴를 내는 이유를 떠올려보라, 그래야 오니까. 물론 스트레스 가득한 민트 초코 농담처럼, 신메뉴가 아닌 새로운 농담을 유행시키는 것 또한 강력하다. 그러나 전국민이 경험을 공감할 정도의 보편성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고-혹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팬클럽이라도 만들 작정이라면 모르겠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쉬운 해답이다. 아마 거기에 후자의 요소, 즉 농담의 요소를 더하면 요즘 세상의 요리가 되겠다. 말도 안되는 것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아니면 색이 화려해서 사진이 예쁘게 담기는, 아니면 값비싸거나 짧은 시간에만 먹을 수 있어서 소유욕을 자극하는 재료를 쓰는, 즉, 일상에서의 역할이나 맛과는 별로 상관 없는 신메뉴들이, 팔리고 만들어진다. 물론 그 안에서 그나마 맛이 좋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첫째 목적이 맛이 아니므로 나는 그것들을 멀리한다. 그렇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본인을 예술가로, 객을 관람객으로 상정하지 않고 일상의 요리를 팔고 또 먹는 장소에서 신메뉴가 나온다면 그것은 반드시 고정을 염두에 둔 요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정판은 단순히 자신 없음 내지 무익함이다. 신메뉴는 곧 메뉴판에 자리를 잡아서 우리의 일상속에 굳건히 자리잡아 행복을 가꾸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일상의 위치는 다양하다. 처음부터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일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업스케일의 파인 다이닝과 같은 것들은 매일매일 오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물론 누군가들은 매일 매일 가면 본인이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될거라는 기대를 하고 실천하지만-. 그러나 먹는 즐거움을 좋아하는 우리들은 특별한 기념일에, 혹은 마음을 굳게 먹은 여느 날에 그런 곳에서 식사를 한다. 이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날 속의 또다른 반복. 기념일들은 매년 찾아오고 일년에도 여러 번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식사를 여러 번 하고 여러 해 한다. 이것도 하나의 반복이고 일상이다. 특별한 날의 일상. 단지 나는 아이스크림이 특별하지 않은 날을 넘어서 무더운 날이라면 일 주일에 세 번은 먹고, 목적지 내지 관광지가 되어버린 아이스크림 가게들이더라도 그 기행의 목적은 이 일상의 행복의 각별함을 찾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신메뉴도 그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시각에서, 두 가지 젤라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은 "홍차와 모스카토"다. 청포도 내지 샴페인을 떠올리게 한다는 홍차에 진짜 술을 더했다는 설정에는 큰 감흥이 없으면서도-흔히 아이스크림 시장에서는 단지 술을 넣었다는 것이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곳의 홍차 연작의 큰 팬이므로 짐짓 훌륭한 풍미를 기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했다. 정파나 다원의 홍차는 이곳에서 직접 다룬 적도 있고, 해외 사이트에서 직접 구매하기도 했던, 비교적 잘 알려졌고 또 잘 안다고 할만한 홍차였기 때문에.
우선 차 젤라또라는 고유한 양식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 보자. 거의 차 실험실에 가까운 시절을 거치면서, 이곳에서는 우유와 훌륭하게 어울리는 차의 향을 통해서 젤라또에 풍미(flavor)를 입히고자 했다. 냉동고에서 꺼내지는 이 요리의 방식의 특성상 탑노트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떤 차를 선택하건 가장 강한 노트들 위주로, 입안에서 느낄 수 있는 노트들이 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찻잎의 섬세함보다 향신료의 굵직한 노트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과거 프라나 차이 오리지널 블렌드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의도의 연장선에서, 홍차는 우유를 기반으로 한 젤라또 믹스에 향을 입히는 역할이다. 마치 밀크 티처럼, 홍차에는 풍미에 질감을 더할 수 있는 유지방의 무게감(bodied)을, 젤라또에는 빈칸으로 남은 풍미와 향의 자리를 서로 채워주는 동시에 따스한 차가 아닌 차갑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먹고픈 욕망을 담았다.
다만 나에게 이 반 컵은 그러한, 어떤 홍차를 젤라또로 맛보는 기쁨의 측면에서 다른 뻔한 가향차들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단지 침출 방법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으나, 정파나의 홍차가 가져다주는 화사한 향기가 충분히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 어떤 낮은 등급의 홍차도 아닌 정파나 다원의 홍차라서 나는 슬펐다. 찻집에서는 한 잔에 썩 부담스러운 가격에 판매되는 스페셜티에 가까운 홍차인만큼 원가도 "스페셜"했을텐데, 그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과연 섬세한 홍차를 온전히 변형해서 나타내기 위해서 아직 무언가 모자란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밀크 티보다도 지방이 제공하는 무게감이 한층 더 두터운 아이스크림에 있어서는 선이 굵은 풍미들이 더욱 쉬운 길이지만, 굳이 어려운 길로 가고자 한다면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 이제 본론중의 본론인 체리의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먼저 과일을 이용했는데 소르베가 아니라 젤라또라는 점에서 높이 산다. 아이스크림은 기본적으로 지방이 제공하는 풍성한 몸체에 맛을 깔아내야 즐겁다. 물론 입안을 청소하는, 높은 신맛을 지닌 것에는 지방은 불필요할 수 있지만, 단 과일마저 소르베로밖에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진에 대한 욕심이거나, 기술의 모자람일 공산이 크다. 단맛과 지방은 단짝이다. 사계절 내내 구할 수 있는 과일인 만큼 자리 고정에 대한 욕심도 한껏 생기고, 독특한 향기는 그 자체로 우유를 기반으로 한 믹스와 자연스레 어울린다.
그러나 나는 이 체리 젤라또를 두고 고심했다. 이 메뉴가 바닐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청귤이나 초콜릿의-슬프게도 여기에는 초콜릿이 없는 날이 썩 있다-, 로테이션으로 돌아갈만한 메뉴로서 완성도를 지닐 수 있을까.
체리의 향은 매혹적이지만 가공의 과정에서 잘 자라고 신선한 생과의 짙은 향을 그대로 그려내기는 쉽지 않다. 체리 아이스크림의 대표작인 체리 가르시아마저도 아이스크림 자체의 풍미에 더해 체리를 직접 박아넣는 형태로 타협을 본다. 생각건대 디저트 주방에서는 원래고 가공된 체리-잼부터 마라스키노, 키르슈에 이르기까지-들을 사용하는데 익숙했으니 해답이 그 사이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직접 해본 것은 아니므로 단정하지는 않겠다. 하여간 체리 젤라또는 질감이 매우 훌륭한 가운데 체리의 향은 체리를 직접 다져넣는 쪽에 이르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풍성한 지방과 적절한 단맛의 토대는 여전히 훌륭했으나, 과연 이미 나의 컨테이너를 가득 채운 뻔한 맛들과는 다른, 다르지만 설득력을 지닌 풍미로는 다가오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갑작스레 쏟아진 신메뉴들은 예전의 레시피들이 그러하듯이 교정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기본적인 주제의식에 더해 질감과 농도가 언제나 즐거우므로 덮어놓고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한동안은 다시 들러붙어있던 맛들에 신세를 질텐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새로운 맛들이 행복의 세계로의 진입을 꿈꾼다면? 슬프게도 언제나 그 길은 좁은 문으로만 통한다. 차에서 풍성한 노트들이 지방을 잊게 만드려면, 또 체리가 가진 고유의 단맛에 더해 그 향기로 사람을 매혹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고생을 해야 하고 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와중에 보통 좋은 맛이 된다. 이는 정말 슬픈 일이지만 이치가 그렇더라.
과연 이 새로운 맛들은 주저앉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여느 날의 신기했던 경험으로 사라질 것인가. 애초에 목적이 후자였다면 할 말이 없고 또 정파나 다원의 홍차를 본 이상 영속의 기대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홍차가 반드시 그 다원일 필요는 없듯이, 또 생체리만을 쓴 젤라또만이 체리맛은 아니듯이 새롭고 나은 미래를 꿈꿔본다. 궁극적으로 차의 풍미를 지닌, 혹은 체리의 풍미를 지닌 믹스가 자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분명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아니겠는가. 입안에서야 비로소 녹아 풍성한 지방이 풍미를 전달하는 경험, 숟가락으로 푹 찍어 퍼내면서 느껴지는 물 아닌, 즉 맛있는 요소들의 짙은 점도가 비단처럼 이어지듯 느껴지는 즐거운 질감만이-보통 쫀득하다고 하는데 밀도가 높되 끈적이듯 저항하지는 않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그러한 기대를 가능케 한다.

게시글에 대한 최신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