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틴 - 아이스크림과 스승 문제

더 마틴 - 아이스크림과 스승 문제

현대 서울 젤라또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Giacomo Schiavon이다. 볼로냐에 있는 작은 젤라또 가게의 오너로, 세계적으로도 썩 유명하다.

그는 왜 중요한가? 그는 서울의 아이스크림의 신이기 때문이다. 왜 신인가. 링크 하나 걸어드린다. 부디 삭제되지는 않길 바라며, 본문과 댓글 다 보시길 바란다. 조금 웃음이 나와도 참고 보시라. 댓글에 나오는 쟈꼬모가 바로 이 사람이다. 일 젤라또의 "Riso Giacomo"라는 레시피의 주인인 자꼬모, 그는 가게의 얼굴임과 동시에 Cattabriga에 채용된 셰프이다. 그는 세계 곳곳의 고객들을 내방하고 레시피를 선물해준다. 제과업계 등에서도 짧은 기간 초청해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거나, 레스토랑에서 한 끼의 갈라 디너를 열듯이, 자꼬모 또한 Cattabriga 장비의 수입사인 KOTES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어쩌라고 싶은데, 바로 그가 이 서울의 모든 젤라또의 아버지라고 하면 어떨까. 만 개 넘는 가게가 난립하는 거대한 반도에서 단 한 가게가 모든 곳의 이상향으로, 또 넘을 수 없는 대스승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하면 어떨가. 현실이 그렇다. 당장 저 일 젤라또부터가 그로부터 사사받았다고 자랑스레 걸려있는데, 2021년에도 서울에서는 이런 종류의 귀신이 떠돌고 있다.

노마 근무 몇 달, 그래머시 터번이니 108이니에서 아마도 일 년부터 길면 삼 년, 요리 학교가 있는 도시의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스타지. 이런 무의미한 경력은 셰프로서의 역량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최소 조리는 할 줄 알겠구나 싶은 기호가 된다. 스승의 요리? 차라리 모방하지 않았으면 한다. 철학이라는게 모방의 대상이 아닌데 왜 모방하는지 우스울 뿐이다. 그러나 아이스크림 가게들을 둘러싼 귀신들은 그런 기능마저도 없다. 자신의 생각이 없는 건 물론 조리의 수준마저 보장이 안된다. 그들의 젤라또 가게는 업스케일 레스토랑처럼 조리사 군단을 거느리는 곳이 아니며, 아마 극단적으로는 며칠 만난 걸로 스승이랍시고 말하기도 하니까. 극단적으로는 하루 이틀 만난 인연도 굳이굳이 언급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깟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오늘 하루 먹을 맛있는 식사가 중요한게 아닌가. 맞다. 그런데 이런 우스꽝스러운 산업의 현실이 내 식사마저 가로막는다면?

사진의 젤라또 또한 그 자코모의 레시피로부터 파생된 물건이다. 그가 2018년 서울을 방문하면서 열댓 개의 레시피를 시연하고 차트를 뿌렸다고 하는데, 그러한 영향이 이곳까지 스미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젤라또는 자코모의 것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치즈도 몇 번 바뀌고, 들어가는 술도 바뀌었지만 이런 것들이 다르기 떄문에 표절이 아니라는게 아니라, 레시피의 본질적인 부분이 주방의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목표하는 당도가, 목표하는 점도가 이곳의 것이 되었다. 주정강화와인이 당기는 끝맛의 강한 캐러멜의 뉘앙스, 그리고 달걀 노른자를 쏟아부어 만든 풍성한 무게감은 이곳의 티라미수만이 가진 고유한 개성이자 주관이다. 흰 치즈의 풍미보다도 첨가물의 개성이 돋보이는 티라미수라는 그의 해석례는 바로 취향의 영역에 있으며, 취향을 논할 수 있는 요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레시피를 비롯, 몇몇 표본 레시피들이 흩뿌려진 이후 서울의 아이스크림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객 앞에 등장한다. 차라리 자코모의 레시피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하고, 후진 레시피인데 구면인 걸 깨닫는 순간은 정말 그 날은 재수가 없다.

그러한 측면을 떠올려보면 차라리 자코모니 누구니 실존인물을 들먹이는 경우가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서울에 진정 필요한 건 더 많은 스승들이 아니고 바로 그 당사자의 얼굴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다. 자코모는 서울에서 자신의 터전인 볼로냐를 표현한 맛을 시연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과연 볼로냐에서 서울의 맛이라고 표현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굳이 주제가 서울일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떤 가게, 어떤 사람의 아이스크림으로 확정할 수 있는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이 가게가 왜 요리하는지를 표현한 맛이라는게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서울에서 제대로 된 젤라또의 역사는 이제 10년 남짓인데 사람들은 클래식 타령을 하고, 신기한 재료들은 들이밀지만 레시피에는 영혼이 없다. 언제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저렴한 장비를 사용하고, 더 저렴한, 그래서 소비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재료를 쓰는 것도 나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이 영혼 없음이 가장 비난 받아야 할 지점이며, 모든 문제의 근원점이라 본다. 예컨대 여러분이 렘브란트의 제자라고 하자. 그럼 여러분의 목표는 렘브란트 조명을 완벽하게 모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삼성전자에 근무했던 사원의 장래희망은 갤럭시 스마트폰의 복제인가? 음식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열악한 환경을 반영한 모작, 타인이 완성한 레시피의 조악한 재현. 그 다음은 될대로 되라 식의, 만들어야 하기 떄문에 만드는 요리의 행렬. 바닐라 아이스크림에는 튀일과 크럼블을 곁들이지 않으면서 늘어만 가는 토핑은 질감을 초월한 맛으로 만들지 못한 기술적 난점의 고백이며 툭하면 나오는 제철 과일 소르베는 아이스크림이라는 형식의 무의미함을 폭로하는 모순적 요리다. 왜 과일은 소르베로밖에 못나오고, 다른 맛과는 조화가 되지 않는가? 우리가 제과를 집에서 하는 문화권에 있지 않아서 망정이지 많은 레시피가 가정식 수준의 아이디어에 머무른다. 이런데는 더 이상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아이스크림의 차트 작성은 시작에 불과하다. 제조의 모든 과정에 사람이 스며들어야 하고 결과에 사람이 보여야 한다. 예컨대 티라미수라면 전부를 치즈로 만들고 파산할 게 아니라면 우유와 치즈를 섞게 될텐데, 그렇다면 서로 다른 출처의 유지방들을 섞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자발리오네의 강한 노른자 풍미 또한 버려져서는 안되며, 커피와 마르살라가 풍미의 키를 쥐고 있는 만큼 안 넣을 수는 없는데 설탕에 비해 빙점에 극단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알코올의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잘 얼어붙는, 빙점과 고형분 따위의 계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셈이다. 티라미수는 노른자와 술이라는 두 재료에 더해 맛의 켜를 여러 겹 쌓는 디저트인만큼 이러한 과정을 드러내기 가장 좋은 예시가 될 뿐, 다른 맛들도 제 나름의 사정이 있다. 견과류를 쓴다면 식물성 지방과 유지방의 비중은 물론 제조 과정에서 고르게 섞이지 않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바닐라는 바닐린의 함량을 높이는 것은 기본이요 바닐라가 가지는 따스한 캐릭터가 찬 요리와 충돌하는 지점을, 또 구아이아콜로부터 나오는 smoke/oak 노트의 살 길을 찾기 위한 방책을 고민해야 하고 그것이 결과로 드러나야 한다.

더 마틴의 티라미수는 초판에 비해 많은 변화를 거쳐 똑 떨어지게 좋다 나쁘다를 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주관만큼은 뚜렷하고, 그것이 통제 하에 있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에 먹어보아야 하는 음식이 되고 또 다시 먹고픈 맛이 된다. 우리는 탁자 위에서 그와 맛으로 논쟁하고 경험을 견주어 보아야 한다. 나쁘다고 말해도 좋고 욕설을 섞어도 좋다. 다만 우리도 이유로 맞서야 한다. 이유와 이유가 맞서는 사이에 요리가 존재해야 한다. 이 요리는 티라미수라는, 널리 알려진 레시피를 상대로 제시된 유일한 답변이며 들어볼만한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