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티스트 - 2021년 여름 페슈 멜바
최근 르네 레드제피가 우경 사진을 올렸다. 중화 요리에서 간간히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인 이 재료를 그가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오늘날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무엇을 요리할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요리사는 스스로 요리하고자 하는 것과 사람들이 맛보고자 하는 것의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그의 첫번째 주관이자, 조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되줄 것이다.
이 디저트를 만들기 전을 생각해보라. 무엇을 요리할까에 대한 답은 복숭아였다. 백도부터 황도까지, 일본종부터 유럽종으로 만든 퓌레나 잼 등의 가공품 등 가능성은 무한하다. 특히나, 서양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는 그 구별은 더욱 중요해진다; 세계 최대의 복숭아 수입국인 독일, 그리고 수출량에서는 세계 순위권을 다투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지중해에 너른 복숭아들의 풍습이 제각기 다르다. 그것들의 섬세한 매력 중 어떤 것을 고를 것인가.
디저티스트에서 고른 복숭아는 일본종의 백도였다. 거기까지는 오케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단 그 방법, 즉 어떻게의 자리에는 에스코피에 선생님을 불러냈다. 생과의 외형을 재현하고 크림을 곁들이고 복숭아의 부족한 신맛에는 베리류의 힘을 곁들이는-페슈 멜바다. 그렇다면 이 요리의 과제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 복숭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둘, 페슈 멜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셋, 요리사의 주관을 보여줄 것인가. 보여준다면 어떻게?
첫째로, 복숭아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 일단 페슈 멜바는 복숭아를 먹기 위한 요리로, 그 자체가 복숭아에 대한 일정한 해석을 담고 있다. 에스코피에 선생님께서 직접 지도하시길, 페슈 멜바는 "잘 익어 부드러운 복숭아"를 도구로 하는 디저트이다. 부드러운 질감만큼이나, 딱딱한 복숭아에게는 모자란 핵과의 풍성한 향기가 무기가 되어주어야 한다. 에스코피에 선생님은 "복숭아의 벽" 정도만이 기억으로 남아있는 파리 근교의 Montreuil종을 추천하시지만, 그것은 리츠나 사부아에서의 이야기이고, 핵심은 잘 익은 핵과가 스스로 풀어내는 농익은 그 향, 훌륭한 슈페트레제 등에서 감지되는 과실의 생기이다. 일본도래종의 매끈한 질감은 이 요리의 핵심적인 부분은 적절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둘째로, 페슈 멜바라는 요리에 대한 생각을 읽는다. 이 디저트는 복숭아가 주인공이지만 날 복숭아를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조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는 과일의 완성이다. 복숭아에게 풍성한 향이 있지만 그 단맛은 매혹적이기에는 모자라다. 단 정도가 모자라다는 뜻이 아니라, 팔레트로 이어지는 단맛-신맛의 연결이 어설프다. 그야 사람이 아니라 식물이니까. 그래서 복숭아는 시럽에 절여 한껏 단맛을 끌어올리고 라즈베리를 끼얹어 핵과향에 베리의 향, 그리고 신맛까지 얹어 한층 풍미가 진득하게 만든다. 둘째로 이 둘을 이어주는 조리, 즉 유지방과 온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함께 한껏 차게 식혀서 낸다. 바그너 오페라가 끝난 이후에 헌정되었다는 원작은 아예 얼음을 깎아 그릇으로 쓰는데 그나마 타협한 것이다.
디저티스트의 복숭아 플레이트는 아이스크림 대신 크렘 프레슈 뉘앙스의 크림으로 지방을 채우고 복숭아 풍미의 아슬아슬한 얼음 알갱이들을 둘러 이를 변주했다. 신맛은 마지막에 플레이트에 파이핑하는 쨈으로 갈음한다.
카다이프에서 그라니타로 이어지는 crucnh-y한 질감이 섬유질과 크림의 질감과 짝을 이루고자 하는 설정이지만 그라니타의 내구도가 지나치게 약한 관계로 그것은 설정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풍미까지 좌절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복숭아의 후숙이나 가당의 정도가 썩 훌륭한데다가 크림이 단맛을 덧대는 대신 지방으로만 입맛을 다시게 하는 방식이 굉장히 영민했는데, 핵과향에 매치할 요량이었던 매장의 와인이 완전 텅 빈 느낌이 들 정도로 복숭아 플레이트의 풍미는 강렬했다. 베렌아우스레제나 토카이 등 본격적으로 끈적한 음료를 맞출 수 있었다면 행복이 극단적인 단계까지 다다르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해답은 세 번째, 즉 주방의 생각에 있었다. 이는 단순한 페슈 멜바의 모사나 어줍잖은 개악이 아닌데, 앞서 말한 크림의 적절한 풍미와 더불어 카다이프-패스트리 반죽의 역할이 절묘하다. 단순히 받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탄수화물의 개입으로 커다란 복숭아를 탐닉하는 긴 시간동안 여운을 연결한다. 흥건하게 녹아버린 그라니타의 흔적을 반죽으로 닦아 먹을 즈음이면 복숭아향과 신맛이 멋드러지게 만나다가도, 크림에 적셔지고 설탕에 졸여진 복숭아를 크게 베어물 때면 본래 복숭아라는 과일을 먹는 재미에 취한다.
주문에 이르러서야 접시를 채우고 뿌리고 얹는 등 여러모로 고생이 더해지는 디저트지만 그 이유가 깨끗하게 드러난다. 과일 하나를 혼자 전부 먹는다는 성취감은 마치 삼계탕의 그것, 한국인들의 식문화에서의 소유욕을 바라보는 듯 하면서도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흩뿌려진 갖은 지혜에는 서구의 제과의 방식이 진하게 묻어난다. 물론 완벽하다고 성급하게 말하지는 않겠다. 신맛을 배치하는 위치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하고-플레이트에 뿌리기에는 그것을 닦을 적절한 반죽이 모자라다-, 질감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겔과 의도를 살리지 못하는 그라니타는 아마 주방 스스로도 만족스럽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이, 이해가, 그리고 비전이 좋다. 그런 디저트라면 하나를 통째로 먹고도 배덕감이 아닌 희망을 품고 자리를 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