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볶음밥을 찾아서

우리 시대의 볶음밥을 찾아서

최근 미쉐린 가이드에서 한국식 중식이 아주 오랜만에 인정받았다. 한국식 중식의 쾌거이다. 물론 당사자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중화 요리만큼은 반드시 정통 따위의 수식어가 없어도 좋은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중화 요리가 가진 강점 아닌가? 칸톤 요리는 넓게는 중화 요리라고 할 수 있지만 지정학적인 점을 고려하면 중국 요리라고 부르기 어려운 지점이 많듯이(영국의 관습법이 문언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언젠가는 그렇게 부르게 될 것만 같다) 중화 요리는 핵심을 관통한다면 그것이 하물며 아주 외국적인 모습과 융화되더라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한국식 중식에서 가장 한국적인 두 가지 요리, 짜장면과 짬뽕이 아닌 볶음밥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볶음밥은 이견의 여지 없이 가장 세계적인 중화 요리의 양태이며 중화 요리의 기본이 되는 돼지기름과 웍 솜씨가 동시에 드러나는 요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사정은 어떤가. 짜장면과 짬뽕이 각각 소스의 형태와 단백질에 있어 한국의 경제 성장에 힘입은 변화를 겪고 있는 데 반해, 볶음밥만큼은 이구동성으로 옛방식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녹두장군에 의해 시작되었던 "5대 짬뽕"의 광풍이 지나고 몇몇 가게들은 프랜차이즈로 자리잡아 짬뽕의 새 시대를 열었지만, 자신의 개성을 뽐내는 볶음밥은 커녕 한 끼 식사로 제몫을 해내는 볶음밥을 찾기도 어려워지고 있다는 오늘날, 전국 각지의 볶음밥을 먹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볶음밥은 어때야 하는가? 마티니와 치즈버거, 피자 마르게리타가 그렇듯이 간단한 재료 몇 가지가 얼개를 이룬다. 바탕이 되는 것은 밥이고 맛을 전달할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은 동물성 식용유(거의 반드시 라드), 그리고 달걀과 파로 맛을 내고 간한다. 전 세계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마주할 수 있는 레시피다. 여기에 팔자에 따라 잘게 썬 차슈와 새우 등을 더한 것이 레퍼런스가 되는 요리, 양저우식 볶음밥이 된다. 맛은 어때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한 요리이므로 밥에 간이 충분히 스며들어야 한다. 밀가루 요리와 달리 이미 한 번 조리한 탄수화물을 사용하므로 소화를 위한 가열은 주 목적이 아니다. 기름을 매개로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내 쌀알이 재료와 고르게 혼합되도록 만든다. 열적 측면에 있어 정확히 설명하면 웍의 표면에 닿을 때의 가열, 그리고 웍 토스로 인해 찰나의 순간 공중에 뜨며 냉각되고 다시 기름에 닿는 과정 등으로 세부적인 과정이 이어지지만(표면과의 접촉이 아닌 대류를 이용한 공기 조리라는 점에서 특유의 맛을 웍의 가스(镬气, wok hei)라 부른다), 요리사가 아닌 독자에게는 큰 틀에 있어 파스타를 소스에 볶는 것과 크게 차이를 두지 않고 이해해도 좋다. 이른바 알알이 기름으로 코팅되었다는 질감은 생각건대 그 다음이다.

조금 더 기술적인 측면으로 나아가자면, 파는 향신을 위한 보조 도구이므로 결국 이 요리의 키 플레이어는 달걀, 그리고 그 달걀의 고소함을 이끌어내는 짠맛의 호흡이 된다. 파는 마늘 등으로 대체가, 새우나 돼지고기는 상황에 따라 선택이 가능하지만 달걀에는 예외가 없다. 다이룽(戴龙) 같은 '대사부'-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있어야 믿어준다-가 달걀의 신선도를 고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돼지기름에 있어서도 비계를 볶은 것을 넘어 화퇴의 지방을 볶아내 쓰면 약간의 짠맛과 감칠맛이 베어 더할 나위 없지만 팔자를 넘어선 영역이다.

그래서 어떤 볶음밥을 먹었는가. 가볍게 돌아보며 따져보자.

이화여대 앞의 '천진분식' 볶음밥

이대 앞의 천진분식에서 내는 투박한 볶음밥은 내가 이 글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완성도를 지녔다. 그을려지듯 익은 밥에서 웍 솜씨가 아주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볶음밥이 나아가야 할 정도를 충실히 따른다. 짭조름한 간과 기름이 고르게 스며든 쌀알을 씹는 데 한 숟가락에 만족감이 가득하다. 채수 바탕으로 두께를 낸 곁들임 스프는 볶음밥을 더욱 빛낸다. 한국식 중식 기준으로는 제멋대로같은 요리를 하는 가게이지만 오히려 뻔한 양식을 따르지 않을 때에도 중화 요리의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빛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주었다. 조용히 빛나는 일상의 보석같은 식당이 아닌가.

인천 차이나타운 '진흥각'의 볶음밥

중국 요리로 명성이 높은 인천에서는 별안간 위기감을 감지했다. 이른바 노포 중국집이라고 해서 웍을 잡는 요리사의 경력이 반드시 긴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주방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성이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건다. 하지만 진흥각에서 마주한 것은 반대였다. 기술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볶음밥은 어찌 보면 덜 볶은 것 같은 모양을 띄었다. 맛이 강해진 짬뽕과 짜장면의 곁에서 주장이 약해진 인상. 사진의 볶음밥 외에도 삼선볶음밥을 시도했지만 화려한 해산물이 빛나되 달걀과 기름, 짠맛의 기본의 요소가 빛나지 않아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그 길로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역 앞 '홍성방'의 볶음밥.

홍성방은 볶음밥으로 정평이 난 곳은 아니지만 오히려 유명한 가게가 많은 부산이기 때문에 묻히는 감도 있다고 할만큼, 볶음밥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홍성방에서는 쌀알의 질감과 달걀과 기름이 더하는 바디는 튼실했다면 나머지를 완성하는 섬세함이 모자란 느낌을 받았다. 고르게 썰지 못한 파는 종종 불필요한 단맛의 뉘앙스를 더하고 모양을 잡는 데 너무 오래 걸린 나머지 볶음밥의 바깥은 다소 굳은 데 반해 안으로는 기름이 더해져 균형이 무너진 모양새다. 여유가 없이 급하게 담아냈다고 해도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부산대 앞 '미각반점'의 볶음밥.

미각반점의 경우 기술이 완성에 이름에도 방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는데, 좋은 점만 놓고 보면 한국식 볶음밥이 지향하는 옛방식 볶음밥의 정수와도 같은 균형. 튀겨낸 달걀으로 촉촉히 적셔 바스러지는 흰자를 부수고 볶음밥으로 입안을 채우는 감각의 충만함은 파괴적이다. 선명한 짠맛으로 숨을 불어넣는 계란국도 놓치지 못할 요소. 그러나 얼기설기 썰어낸 당근이 씹히는 감각만큼은 의문을 불어넣었다. 과연 당근은 이 요리와 상생이 가능한가. 가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야 하는가. 볶음밥의 단맛은 굳이 필요하더라도 힌트 수준을 넘어설 필요가 없다. 그런데 미각반점의 볶음밥은 당근이 단맛을 넘어 텍스처까지 주장한다. 쌀알 사이를 빗겨나가 한 번 더 씹기를 요구하는 당근의 단단함. 수나라부터 이어져왔다는 양저우식 볶음밥이 일관되게 추구한 그 흐름에 반기를 드는 듯한 순간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볶음밥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한 그릇이었다.


청요릿집 시대를 가산하면 반백년이 훌쩍 지난 한국식 중식의 역사에 불구하고 볶음밥만큼은 아직 정확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중복이 될 수밖에 없는 달걀 프라이는 노포의 호스피탈리티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을 것인가? 중국의 눈으로 보면 잘 볶아 섞어내지 못하는 기술을 가리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 볼 수도 있다. 노른자를 적실 때 기분이 좋지만 애초에 샛노란 볶음밥이 가진 고소함의 파괴력을 넘어서기는 어려우니. 짜장을 덮니 마니 하는 지점은 아직 논의할 여력도 없다. 과거에는 건강한 민주주의가 반헌법적 시도를 제도를 통해 배제하듯이 잘 볶은 볶음밥의 시대가 오면 짜장의 필요성은 자연히 소멸하리라 생각했지만, 요즈음에는 다르게 생각한다. 아예 짜장을 덮을 각오를 하고 볶는 볶음밥의 시대가 오고 있지 않나. 진흥각의 볶음밥은 이미 그 태세를 갖췄다. 그렇다면 짜장에 대해서도 언제까지나 짜장면의 그것을 답습하는 수준은 넘어서야 할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그럴 사람은 없겠지만, 볶은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한 짜장은 팔레트는 물론 소스의 점성과 온도까지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재밌는 볶음밥을 찾는 독자라면? 단언코 위의 가게들 중 이대 앞의 천진분식을 권한다.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음식을 만든다. 혼자 가면 만두를 먹지 못할 테니 반드시 동행을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