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ins de vanille - 1인 제국
직업인으로서 요리사는 그것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순수예술보다는 대중예술인의 자질을 요구받는다. 덧없이 사라지는 삼차원적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은 천부적 감각과 우연성, 삶에 대한 통찰로 무장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이 빛나는 원동력은 원리원칙에 입각한 철저한 프로세스, 일관성 그리고 최소한의 자존심에서 나온다. 여기에 약간의 개성이 더해진다면 그곳은 찾아가고 싶은 식당이 된다.
요리사 중에서도 제과사에게는 이러한 특징이 더욱 부각된다. 형형색색의 조형물을 만드는 미술가처럼 보이는 직업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훌륭한 제과사들은 우수한 기술자에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러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어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를 같은 날에 세팅할 수 있으며, 질감과 향을 신선한 상태에서 보존하여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속하여 방문하는 고객들 누구도 빈 손으로 보내지 않는 넉넉한 수량, 그리고 여러 필요나 취향을 커버하는 다양한 종류. 이러한 확장성은 훌륭한 제과사에게 특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그랑 데 바뉴는 이러한 지점에 비추어 만남과 동시에 우수한 제과점이라는 인상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몰려드는 고객만큼 넉넉한 대기 장소, 적당한 간격과 차분한 톤의 실내는 아침부터 몰려드는 각지의 고객들을 충분히 감당해 내며, 길게 늘어선 쇼케이스에서는 4계절 내내 자리를 지키는 스테디셀러부터 계절감을 담뿍 담아낸 종류들까지 고민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곳의 요리 전체를 다루기에 두 번의 방문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 평가라기보다는 감상에 치우친 이야기를 다루어보자.
여러 화려한 케이크들보다 가장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것은 오른쪽의 작은 푸딩이다. 첫 맛은 유단백의 강한 느낌이 유제품의 팔자가 좋은 지역에 왔다는 느낌을 새삼스럽게 전달하면서 바닐라에서 맑게 만든 캐러멜으로 흘러드는 흐름이 경쾌하다. 우유와 설탕,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바닐라를 먹는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그림. 단순한 재료로 만드는 김렛이나 볶음밥같은 요리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다.
적색 과일을 적극 채용한 엠마는 제누아즈가 다소 뻣뻣한 느낌이었으나 마스카포네 크림의 활용도만큼은 빛났다. 물론 한국에서 제누아즈가 겪는 일들을 생각하면 제누아즈의 질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좋은 제누아즈는 찾아다닐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계란의 존재감은 있었지만 스스로가 품은 크림만으로는 균형에 아쉬움이 있었다.
사워 체리의 이름을 딴 듯한 몽모랑시는 두터운 피스타치오 속 그리오트의 강한 신맛으로 대비의 경험을 제공하는데, 피스타치오의 지방이 품은 고소함에서 신맛으로 꺾는 흐름이 즐거웠다. 상단의 크림에서 먼저 피스타치오의 향과 지방의 고소함을, 프랄리네에서 초콜릿으로 이어지는 단맛과 부수어 뭉개는 질감을, 마지막으로 절인 체리로 집중되는 이목. 특히 칭찬하고 싶은 점은 작은 케이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이다. 집중도 있는 맛이 선명한 인상을 남기면서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끝난다. 먹기보다는 맛볼 때 빛나는 구성.
파리 골목이나 이데미 스기노의 유령을 찾을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그런 것을 내심 기대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매장을 나올 때에는 츠다 파티셰의 세계관도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작은 가게를 지키고 있지만, 시스템의 완성도는 제국을 방불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