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감자국 - 감자탕의 과거와 미래

태조 감자국 - 감자탕의 과거와 미래

무더운 여름 날이었다. 뚱뚱한 고양이가 지키고 선 자리의 감자탕이 먹고 싶었다.
뼈해장국, 순대국, 돼지국밥, 내장탕.. 많은 한 그릇의 뚝배기 국물 요리가 있지만 걔중 커다란 냄비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냄비가 커진다는 것은 단순한 양의 증가의 측면도 있지만, 다양성의 가능성 측면도 있다. 탄수화물만 해도 공기에 담긴 밥이 아닌 떡이 여러 종류, 튀긴 면과 당면 같은 것들의 개입이 가능해지며, 깻잎과 우거지 등 풍성한 야채 또한 맛을 더할 수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해진 구성의 전체를 어우르는 것은 향의 컨셉트, 된장의 감칠맛과 고추가루, 고추장의 자극이 불협화음을 제어하는 양념의 힘에 기댄다.
그러한 양념 레시피는 이제 거의 정형화의 단계에 이르러 어디서나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가 감자탕, 뼈해장국이다. 체인점 형식의 식당부터 대형 마트에 있는 밀키트, 또는 식자재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반조리 식품까지 놀랍도록 비슷한 맛인 가운데 오직 차이는 단가별 돼지 뼈에 붙은 살의 양과 품질에 있다.

오랜 세월 나의 핏줄을 타고 자리해준 고마운 음식이지만 방금까지 읊은 것처럼 완벽한 요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뼈를 발라 먹기가 귀찮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뼈가 바르기 귀찮다는 이유로 해장국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같이 식사를 꺼린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많다) 맛있는 한 끼 식사에 감사함을 느낀다면 그 정도를 못하겠나. 감자탕은 또 그에 충분히 화답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뼈를 굳이 전시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시대라지만 닭요리도 그렇고 그 정도는 한국인의 정서의 측면으로 이해해줄 수 있다. 다만 나는 이 뼈해장국의 국물에 불만이 있다.

태조감자국은 강북 근방의 몇 군데의 오래된 감자탕 가게중 한 곳으로 꽤나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전통 타령 뿐 아니라 맛도 조금은 다르니까. 댓 번은 왔다갔다 했는데, 거의 시장통의 본점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 요리에 얼만큼 진심이었을까, 얼만큼 만족했을까. 감자탕을 취재할 각오를 하고 앉은 자리의 맛은 고민의 자리가 크게 비어 있었다.

태조 감자국의 국물은 첫째로 맑은 편이다. 말갇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뼈를 끓이는 요리에서 으레 나오는 젤라틴이나 콜라겐질과 같이 이른바 무게(Body) 또는 밀도의 감각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를 충분히 오래 삶는 대신 고기를 잘 익힐 정도의 단계에서 타협하고 국물의 중심축은 관절부분이 빠진, 다리뼈 등을 이용해 냈음이리라. 그 또한 그야말로 뼈를 액화하는 수준에 이르는 대신 중간에 멈춘 것이 분명하다. 결과물은 그래서 슬프게도 맑다. 뼈를 끓인 이유가 뭘까. 국물에는 충분한 지방질도, 기타 감칠맛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념이 강하게 날을 세우지 못하니 간도 연하게 한 편이다. 들깨나 마늘 같은 것은 크게 필요하지 않을 정도인데 굳이 존재한다.

그나마 감자탕이기 때문에, 향신채가 되는 대파나 깻잎을 삶은 향이 기분을 돋구고 단단하게 버텨서고 있는 고기는 통째로 슬그머니 떨어지니 먹기에 불편함이 적다. 그러나 전자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며 후자는 이익형량이 잘못되었다. 장갑을 끼고 뼈를 빨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뼛국물 요리라고 하면 국물을 충분히 우려내야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고기만 째로 정형하지 못하는 슬픈 부위라는 이야기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먹는 과정에서 뼈를 녹이는 수준으로 국물을 냈을 때 그 속에 감춰진 맛의 가능성을 탐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뼈의 겉을 태워서 소스에 담고 우리도 당장 뽀얀 국물요리가 없지 않다.
감자탕이란 요리는 맛있어야 한다. 한 끼를 배부르게 먹은 기분이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살갗이 남지도 않은 뼈를 붙들기 전에 국물을 냉큼 들이마시고 싶어야 한다. 한 입에 들어가는 양은 한계가 있고 한 끼 식사를 먹는데 한계가 있다. 뼈를 열에 한참 더 오래 노출하는 일은 가정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이지만 식당의 주방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입정동의 감자탕집이 입구 앞에 꺼지지 않는 화로를 놓는 것처럼.
태조감자국은 감자탕의 과거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지만 미래도 아니고 현재에도 머물지 못하고 있어 우려스러운 지경이다. 과연 이게 감자탕 하면 떠오르는 가게의 요리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감자탕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기는 하겠지. 더 나은 요리가 되어 내 삶에 자리할 수 있을까? 부정적이다.
돼지의 목부터 꼬리까지, 잡뼈(ガラ)를 써서 국물을 내는 요리가 이 땅을 서서히 장악하고 있다. 그래, 그 이름이 돈코츠다. 똑같은 부위를 쓰는데 접근법이 다르다. 얄궃은 삶은 고기를 빼면 완전한 국물요리가 아닌가. 그 국물이 왜 인기를 얻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볶음밥의 위치 또한 고민이다. 국물 요리의 피날레로 볶음밥은 굉장히 맛있는데, 생각해보면 앞선 국물 요리의 단점들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첫째, 떡이나 당면 등 국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에 비해 밥은 굉장히 열려있다. 낮은 온도에서건 높은 온도에서건 삼투현상의 속도가 다르다. 둘째, 옅은 국물이라도 조금만 남겨서 졸일 경우 수분은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다. 수분을 날리니 맛의 밀도가 뒤따르는 것은 이치이다. 셋째, 터부시되던 김치의 신맛이 첨가되고 살짝 눌어붙을 것 같은 표면에서는 바삭함이 따른다. 으레 볶음밥을 만들 때 추가로 양념을 끼얹다 보니 싱거움은 적어지고 참기름까지 가세한 지방질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향과 무게를 더한다.

볶음밥은 대체로 그래서 맛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의문점이 있는 것이다. 이 볶음밥이 하나의 요리로 될 수 는 없는가. 조리 과정에서 잔반의 재활용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으므로 달걀 후라이를 얹어 추한 몰골을 가리는 것 이외에 발전한 적이 없다. 국물과 함께하기에는 냄비를 비워야 하기에 정작 주인공인 국물 요리를 먹을 때는 볶음밥의 자리가 없이 재미없는 공기밥이 앞접시에 부유할 뿐이다. 볶음밥이 감자탕과 같은 시간의 축에 위치할 경우 경험은 개선될 수 있을 거라 짐작한다. 뚝배기로 나오는 국물 요리를 생각하면 "토렴"하는 곳들이 인기 얻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뼈해장국은 뼈의 부피 때문에 자리가 나지를 않으므로 으레 따로국밥 식이고, 커다란 냄비의 감자탕도 다르지 않다.

익숙한 형태여야 삶에 발맞출 수 있으므로 당장에 급변하기에는 무리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라면 그런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등뼈에 붙은 고기를 건져 뜯어내는 과정을 객에게 도급하며 국물의 깊이, 맛의 주인공인 국물과 무대인 밥의 어중간한 화음의 문제를 감수하느니 고기가 아닌 국물과 탄수화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다. 작품의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등뼈의 살을 미리 정형하고자 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논의가 아니고 전담 인력을 두어 삶은 것을 일일히 뜯어낸다는 것도 이런 가게에서는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생각해볼만한 지점이다. 이 요리가 정녕 뼈에 붙은 고기를 위한 요리라면 지나치게 풍요로운 사회에서 "귀찮아서 안먹는다"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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