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루마 - 토마토 카레 라멘
히루마의 토마토 카레 라면이었다. "카츠멘"이라는 이름은 어떠한 기호로서도 기능하지 않고 있는데, 그럼에도 검색해보는 것만으로 먹어보고 말해보아야 한다는 열정을 만들게 한다.
히루마의 카츠멘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현실을 밝혀주는 효과가 있었다. 라멘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다진 고기가 씹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카레에 토마토의 신맛이 가세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그런 토마토들까지는 아니지만 가격 등 사회적 좌표를 생각하면 개별적 요소의 합이라는 주제만으로 이야기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 요리는 그 다른 무엇보다도 토마토와 카레, 차슈와 면이 뒤섞이는 조합의 존재를 조명하고 있다.
그러한 요리법은 아주 새로운 것이어서 우리가 존재 자체로 경의를 표해야 하는가. 그것은 결단코 아니다. 단순하게 검색을 통해서도 여러분은 라멘 타로ラーメンたろう의 치즈 토마토 카레같은 음식을 목격할 수 있다. 뭐 그럼 그곳의 카피인가? 아니 그런게 중요하지는 않은 듯 하다. 이미 닛신社의 기성품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조합이고, 카레와 토마토는 이 방식이 아니고서도 라멘에 본격적으로 녹아들고 있다. 카레 탄탄멘이나 토마토 라멘은 일본에서는 존재 자체로 놀라운 시절은 지났다. 반대로 카레 쪽에서의 러브콜도 강하게 있다. 마츠야같은 곳에서 토마토 카레 컵라면을 판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자. 카레와 토마토 페이스트, 모두 탄수화물에 전형적으로 훌륭하게 어울리는 소스들이고 우리는 이미 그러한 조합에 익숙하다. 카레는 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카레-우동과 같은 조합은 고전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라멘의 문법을 따르는 요소들, 중화면과 죽순이나 목이버섯 등이 개입하고 단백질에 방점을 찍어줄 차슈와 달걀로 완성된다.
이러한 혼란상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그림이 좋았다. 일상에 진입해도 좋을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 카레는 통상의 라멘 스프와 비교했을 때 오랜 화학변화로 얻어낼 수 있는 감칠맛이 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당한 점도를 통해 기본적인 맛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카레는 개별 향신료의 매력을 빚어내지 않고 있지만 기본적인 몇 종류의 향신료와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카레의 전형적인 맛의 값을 적절하게 떠올리게 한다. 토마토도 적절하게 토마토를 떠올리게 한다. 갈색빛으로 물든 달걀은 부재하는 단맛을 채운다. 정직하고 평범하게 좋은 것들의 합이 맞아떨어질 때 이 요리는 조금은 특별한 요리가 된다. 카레를 이런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 곳은 근방이나 서울을 통틀어도 크게 많지 않기에, 손쉽게 특별한 요리가 된다.
스프를 카레와 토마토로 바꿨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토마토와 카레는 지방과, 면과 어떻게든 즐겨도 좋은 것들이다. 즐길 수 있다면 좋다.
이렇게 끝나는 글을 기대할 독자는 별로 없을 것 같고, 나조차도 여기서 매듭짓고 싶지 않다. 그러나 존재하기 떄문에 알파를 얻을 이유가 있는 곳, 그것이 현재의 정확한 좌표다. 그렇다면 이 요리를 그러한 맥락에서 이탈시켜, 이를테면 호사가들이 좋아하듯이, "현지 라멘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습니까?"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까. 이게 독자도 흥분하는 지점일 테다.
먼저 그 미지의 현지라는 기준을 정확하게 이야기해보자. 이치란은 현지인가? 이치란에 가면 하수고, 타베로그니 점수 따져가면서 줄을 오래 설 줄 알면 고수일까? 지긋지긋하다. 그렇지만 존재하는 담론은 있다. 이러한 라멘은 일본 라멘계에 불어오는 여러 시도들 사이에 걸쳐있다. 크게 보면 라멘이라는 형식 속에 다른 요리들의 맛의 핵심이 되는 요소들을 접목하고자 시도하는 진화계進化系ラーメン 따위가 있다. 어떤 것을 진화계로 결정짓는 요인은 무엇보다도 맛의 값이 다르다는 점이다. 라멘의 각 요소들을 비틀거나 바꾸어낸 느낌을 들게 하는 게 진화계의 특징이다. 일종의 유행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지만 무엇이 진화계다, 하는 기준은 없다. 얼마나 새로워야 진화계인가 하는 합의는 불가능하다. 제작자의 의도가 전달되는 순간 직감으로 느끼는 감상에 억지로 부여한 이름에 가깝다. 그러한 요리 방식은 라멘에만 있는게 아니니 진화계는 그다지 구별의 실익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더욱 의미 있는 구분으로는 무로란 카레라멘이나 스파이스계スパイス系가 있다. 일본 식문화의 한 축으로 스며든 카레가 라멘과 교잡하는 일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카레가 인기를 얻은 홋카이도에서 카레에 면을 말아내는 요리가 생겼고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관광 요리로 자리잡았다. 매니악한 이들이 주목하는 쪾은 스파이스계다. 사무라이라는 스프카레 가게를 기점으로 전국단위로 알려졌는데, 삿포로 등지에서 유행하는 스프카레나 카레 내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이 라멘에 접목된 형태다. 이름처럼 카레의 매운 맛, 카레의 핵심인 향신료의 풍미를 살려 큰 인기를 끌었다. 스파이스계가 기존 카레 라멘과 구별되는 지점도 카레의 향신료의 개성을 살리는 방향을 잡은 지점이다. 도쿄의 만리키卍力와 같은 곳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라멘이라는 무대 위에 향신료를 주인공으로, 향신료에 대한 존중이 맛에 그려지므로 향신료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그 무대가 되는 라멘은 스프에 면을 말아서+차슈를 축으로 한 토핑과 즐긴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구성인 만큼 스프 카레에 밥, 하야시라이스같은 요리가 뻔히 존재하는 만큼 일본의 식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본래 외래 음식이었떤 라멘의 본질에 주목한 이들 덕에 그러한 가능성은 지금도 끊임없이 확장 중이다. 카레와 라멘을 모두 좋아하는 이들은 이미 수백여 카레 라멘의 줄세우기마저 하고 있다. 노로시가 왕좌를 꿰차고 있고 이타도리같은 카레 전문 체인점에서 카레 라멘 체인을 내기도 했다* 현재 COVID-19로 인한 경영 악화로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있다.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유명점인 멘야 잇토에서 낸 세컨 브랜드인 토로같은 곳에서도 완성도 높은 카레 라멘과 츠케멘을 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토 카레니까 좋다"같은 주장은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외려 토마토 카레 라멘이라는 주제가 새롭지 않을 때 그림의 바깥, 즉 이곳만의 주관들이 보인다. 습관성이다. 닭국물을 쓰는 라멘과 완전히 같은 토핑은 흡수력이 좋은 카레와 딱히 불협화음을 내지는 않지만 어우러지지도 않는다. 면에 스프가 배어든 정도도 특별히 손을 본 느낌이 없다. 이곳만의 요리가 되어줄 키, 즉 풍미의 특별함의 지점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아직은 같은 요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맛의 설계를 통해서보다는 이러한 빈칸들을 통해 주방이 보였다. 알기 힘든 버터는 그러한 맥락의 상징과도 같았다. 홋카이도를 뿌리로 하니까 똑같이 버터 라멘인가. 정녕 이 크기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녹아서 사라질 뿐이다. 이는 무신경함이다. 유제품의 고장이라는 맥락이, 그 자체로 추구해도 좋을 좋은 버터가 있기에 그런 요리를 한다. 서울은? 좋은 버터는 죄 수입품이고 가격도 경쟁력이 없다. 매일 음식이 되고픈 이러한 음식에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다. 애당초 여기가 홋카이도가 아니라 푸아투나 노르망디 어디께여도 나는 이런 요리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버터가 있다면 녹여내서 온 입안을 감싸는 형태로 풍미를 즐기면 그만이며 이만한 양으로는 녹고 나면 무슨 버터를 썼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 떠오르는 지점은 그냥 홋카이도에서 그렇게 하더라, 하는 흐릿한 레퍼런싱이 아닌가. 애당초 국물에 적절한 두께(body)를 만들고 싶었다면 지방은 지금 여기 이렇게 떠다녀서는 안된다. 유화와 유사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블렌더를 돌리는 라멘도 이제는 페란 아드리아 덕이라고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흔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야말로 무신경함이라고밖에는 해석할 도리가 없다. 정녕 이 버터는 이렇게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면을 덮은 뚜껑 위에서 합당한 맥락 위에 있는 것은 볶은 고기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주 못 먹을 불행한 식사였는가. 전혀, 오히려 나는 그들의 존재에 감사한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마토 카레 라멘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재는 빛나고, 콜라까지 만 원 언저리로 하는 식사에 끔찍함을 맛볼 수 있는 메인스트리트 근방에서 빛난다고까지 할 수 있는 완성도다. 언제까지 그 빛이 이어질지는 모르겠다만. 이 요리는 서울에 존재할 필요가 있고, 누군가 이것을 조명했다. 또 다른 맛없음이 아닌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게 현실이다. 다만 결단코 이 요리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거부감과 익숙함의 벽을 넘어섰다는 점을 높이 사지만 앞으로 또 서울이 이러한 요리들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단순히 새롭기 때문에 한다, 새로워서 좋다. 새로움이 끝나면 같이 끝. 좋은 음식에 대한 의견은 없이 새로움의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그런 바이브가 아니기를 바란다. 물론 이런 방식의 영업에 알파가 존재하는 이상 유혹은 있다. 표절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한켠으로는 해외의 것은 노골적으로 베낄수록 찬사를 받는 서울이다. 소식이 어두우니 알려지지 않은 것을 베끼면 새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베낄 대상을 찾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만든 것은 박수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곧바로 위대한 맛이 나지는 않는다.
항상 라멘이 처한 인프라 등의 상황은 고민거리로 남는다. 아마추어들도 제면소 이름을 꿰고 다니는 나라와 육수 하나를 맡길 공장이 없는 서울의 현실 속에서 같은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상황 때문에 적당한 음식이 위대한 음식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바꿔야지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현실이 어떠한가. 수많은 1인/2인 업장(이곳을 포함)에서 닭을 한창 끓이고 있는 장면을 보지만 국내 양계 산업의 현실 속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만이 나온다. 그런데 고생은 고생대로 잡아먹으므로 라멘을 먹을 때에는 병환으로 인한 임시휴무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런데 닭의 두꺼운 껍질이나 뼈,관절 등에서 나오는 지방과 젤라틴의 층이 국물에서 충분히 두껍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인데 재료의 한계일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는가. 어쨌거나 소비자는 매 끼니 상당한 비용을 치르고 있는데 이래서야 공멸이다. 똑같이 브로일러 닭을 끓여 공장에서 대량으로 가공하거나 개인이 힘들게 소량으로 가공하는 차이만 난다면 희망은 없다. 요리에는 영혼이 있어야 한다. 라멘이라는 요리가 가진 맛의 좋은 측면을 부각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게 되야 요리사도 살고 소비자도 산다. 우리가 스스로를 세뇌할까? 이참에 지방과 젤라틴이 없는 국물이 맛있다고 해버릴까? 그것은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러한 상황에서 히루마의 카츠멘은 게임 체인저가 될 수도 있다. 좋은 큐민을 중간 정도의 불에 은근히 볶았을 때 피어오르는 화사함이나 따사로운 햇볕을 잔뜩 머금은 산 마르자노 토마토의 신선한 풀향과 신맛은 아니지만 총합으로서 국물 음식에서 국물이 가져야 할 맛의 농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기와 같은 재료를 분해하는 일은 굉장히 고되지만 다양한 향신료는 그 고민을 손쉽게 해치워준다. 분말 형태나 건조 형태로 가공된 것을 이용하니 걱정도 덜고 요리의 그림이 좋다. 일상의 요리는 차라리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카레가 아닌 라멘과 같이 존재하는 맥락-즉 평범한 한 끼의 맥락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음식이란 최소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이 도시에서는 하나의 의견의 자격을 갖췄기에 나는 히루마가 굉장히 긍정적인 시도를 한다고 말한다. 1인 라멘 업장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있고 맛에 대한 시도가 있다. 이를테면 고흐의 구두 그림과 같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일본에 이러한 방식의 요리가 존재하는 것과 그것을 서울에서 하는 것 사이에서 이 요리는 라멘에 대한 한국 문화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구두 그림이 고흐의 것은 아니다. 무조건 박수갈채를 보내기에는-엄연히 존재하는 맥락이 있으므로 흔적을 남겨야 한다.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기에. 이 요리에는 어두운 면도 숨김 없이 묻어난다.
- 그래도 다 쓴 잎사귀는 건져내는 성의를 보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