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 라멘 - 불협화음
내쉬빌 핫치킨, 후토마키 등의 얼토당토않는 유행이 라멘 분야에 있어서는 이에케 스타일 라멘이다. 「빅 코믹 슈페리어」 연재분에서 언급했듯이 카피가 편한 형식이면서도 완성도가 있다는 이유로 여럿 권해지고 있으나, 통상 라멘 분야의 플레이어들이 라멘을 소비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굳이 '이에케'라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모방의 유행은 썩 반갑지만은 않다.
끓이는 과정에서 뼈에서 유래한 성분이 많다기보다는 분말 등의 사용의 영향으로 점도가 높게 느껴지는 스프는 한국식 스프 요리에서는 토속촌 삼계탕 정도를 제외하면 금단의 영역으로 취급받는 정도를 넘어서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높은 밀도만큼 스프의 풍미가 완전히 찼다는 인상은 아닌데, 국물 요리가 과거에야 양 불리기의 문법으로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오늘날 맛의 액화, 고체 재료의 액화라는 형상변환에 주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다. 통상 스프는 온도와 시간에 따라서 완성도가 정해지는데, 닭 스프같은 경우 재료의 한계가 있다지만 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으므로 재고가 필요하다.
스프는 '한 발짝 더' 정도가 필요하다면 주로 문제되는 지점은 그 스프를 둘러싼 나머지였다. 각각 조리의 특장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조립 과정에서 무너졌다. 라멘은 큰 틀에서 스프/면/고명이 각각 조리된 뒤 조립되는 방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온도를 최소한으로 동기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면과 스프는 비슷한 고온의 가락이므로 걱정할 일이 적지만 고명은 기대에 어긋날 수 있다. 스프의 경우 다행히 불덩이로 나오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취식 도중 상온 보관의 김, 냉장 보관의 시금치의 온도가 서로 다르게 개입하면서 식사로의 몰입을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추가 주문한 시금치쪽이 처음부터 국물에 들어간 시금치에 비해 오히려 식사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는데, 접시에서 곧바로 닿지 않고 직접 옮겨 담그는 과정이 더해지기에 그러한 격차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다소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렇게 따로 내는 방식은 형식의 재미와는 어우러지지 않으므로, 궁극적으로는 최소한의 온도의 일체화를 거쳐야만 한다. 본인이 페란 아드리아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직접 시금치를 국물로 데우는 과정을 감내하겠다면 적당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하겠다. 여느 동네나 있을 돼지고기 국물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의 위치. 그러나 이것이 순대국과 뼈해장국을 넘어선 기호식품에 들어서는 요리라고 본다면 고민이 커진다. 첫째로는 식사를 둘러싼 환경의 불협화음이 경험을 장악하는 문제이다. 시각적으로는 온갖 아니메의 굿즈들을 관람하게 되는 가운데 청각적으로는 또 다른 경험, 다양한 아이돌 음악을 듣게 되어 흡사 거리의 휴대전화 대리점들을 떠올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데, 라멘이 진중하고 무거워야 한다는 뜻 이아니라, 가락이 불협화음이다. 편안한 한 끼 식사라는 라멘의 취지에 걸맞지 않는 불유쾌함을 초래한다. 업장 측의 음악에 대한 기호, 객의 그것 역시 자유로운 것이지만 식사에 걸맞은 dB의 정도는 존재하고 감안되어야만 한다. 시각 부분에 대해서는 이곳만의 유행이 아니므로 패스. 둘째로는 '이에케'라는 형식 내에서 '왜 이곳인가'라는 지점을 찾기 어려움이다. 하나만 꼽자면 시금치다. 한국에서는 겨울의 별미인 시금치를 쓴다면 포항초라는 옵션도 있는데, 그 부드러움과 단맛 모두 놀랍게도 없었다. 일본에서는 중국산 냉동 시금치로 떼우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우리 시장은 국산품이 적절하게 보급되어 있으므로 우리 시금치를 쓰는 이유를 보여줄 기회가 충분히 있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포항초를 써야만 한다는 취지는 전혀 아니다. 하나의 예시이다. 차슈와 스프에 이르면 더 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밟히는 지점이 적다. 차슈에서는 단지 원가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는 정도. 한 그릇의 완성은 이곳의 주방이 아닌 바다 건너편의 형식의 OG쪽에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물론 2021년까지는 이에케니 지로니 단지 형식의 카피만으로도 많은 찬사를 받을 수 있던 것이 서울의 현주소였다. 2022년도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맛도 기본은 되어 있으므로 나 역시 다시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리들을 뭉뚱그려 서울의 라멘 "씬", 감상과 재미를 가진 공동체라고 보기에는 역부족이다. 토리파이탄, 마제소바가 그랬듯이 또 서울에 엉망진창으로 복제재생산된 뒤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순례' 말고 진정 맛으로 특정한 장소에 방문할 이익을 보여주는 곳을 보기 어렵다. 한 그릇의 음식에서는 요리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매장을 뒤덮은 음악과 피규어들이 요리사를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 이곳은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시청각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