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회관 - Bibimbapkritik
"(이렇게) 비벼 드셔야지, 수분이 빨리 날아가서 더 맛있어요."
한복 차림의 접객원의 친절에 나는 너무나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전주회관의 비빔밥은 식탁에 등장한 뒤에도 조리 중이다. 비빔이라는, 식탁 위의 퍼포먼스를 기다리고 있으나 통상의 비빔밥이 가진 한계, 재료에 열변화를 주지 못하고 오직 운동에너지로만 완성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우 뜨겁게 달군 접시-우리는 얼마 전의 몰까헤떼를 떠올려도 좋다-를 제공하여 화학적 변화, 열에 의한 조리를 계속한다. 표면적으로는 통상적인 비빔밥의, 밥에 고루고루 양념인 고추장과 묻히고 날달걀을 터뜨려 밥알의 온도로 조리하는 과정을 거치는 듯 보이지만 달군 접시의 비빔밥은 실은 열악한 볶음밥과 유사한 변화를 겪는다. 강력한 화력을 자랑으로 삼는 중국식 주방에서도 주방장의 '웍' 다루는 솜씨를 따지고 드는데 하물며 식탁에 화구가 있는 실정은 아니므로 거대한 밥 한 그릇에서 표면적 정도의 범위에서만 열에 의한 조리가 일어나니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객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빠야만 한다.
그렇게 얻어낸 결과물은 일종의 고추장 볶음밥과 같은 상태가 된다. 고열에 수분을 잃은 것은 밥뿐이 아니므로, 이곳의 고명은 자연스레 열을 견디기 어려운 이파리 종류보다 무나 도라지 등 뿌리채소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과연 고추장의 조미를 핵심으로 하고 나물을 함께 먹기 위한 방식으로 이 형태는 최선일까 하는 의혹의 구름이 자욱할 때 우리는 하나의 설득력 있는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자연스레 말라붙는 누룽지이다. 접시가 뜨거워 붙잡고 긁어낼 노릇은 아니나 고추장에 버무려진 채로 굳어버린 누룽지는 나물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질감의 대비나 열변화로 인해 얻는 새로운 맛의 가능성을 미약하게나마 비친다. crunch라고 하기에는 조리 환경이 열악하며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잘 익은 비빔밥의 가능성을 본다. 일례로 발렌시아의 파에야 역시도 그 맛의 정수를 담은 부분은 열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부분이 아닌가? 그들은 이를 socarrat이라 하는데 바스크어로 불(su)에 의해 그을리는(gar) 정도, 바로 겉이 그을리는 정도(socarra)를 뜻하는 말이다. 횡으로 극단적으로 넓고 높이가 낮은 파에야 팬은 그을리는 면적을 극대화하는데 그 의도가 매우 투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파에야는 쌀을 불리는 과정부터 조미가 시작되는 요리이므로 이미 불려져 적절하게 완성된 밥을 재료로 하는 비빔밥과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비빔밥은 채소를 경험의 중심축으로 삼으므로 지방이 개입할 여지가 적고, 객의 눈앞에서 요리를 완성하는 행위는 한국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므로(삼겹살은 어디에서 굽는가) 이베리아의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 전주회관의 비빔밥을 열등한 파에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회관의 비빔밥은 내게 복잡한 마음을 안긴다. 이곳이 제공하는 뜨거운 밥그릇은 단순한 눈요깃거리는 아니었다. 주방부터 접객원까지 열조리의 중요성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으며, 객은 자연스레 그로부터 좀 더 나은 비빔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뜨거운 접시는 불친절하며, 자연스레 요리 역시 적절하지 않은 단계까지 가열되어 한 숟가락에 담기는 양은 자연스레 작아진다. 그야말로 불필요한 불편이다. 이에 더해 결국 가열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즐거움은 미약하게 발견될 뿐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다. 비빔밥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정확히 말해 비빔밥은 왜 이렇게 멈추고 말았나? 한식 세계화의 선봉장으로 얼렁뚱땅 떠밀려 한식을 대표하는 요리로 자리잡은 후, 먹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음식으로서 비빔밥은 이런 좌표에 멈추고 말았다. 한식의 수호자들은 모두 고추장을 쓰지 않는 비빔밥, 가마메시라고밖에는 보이지 않는 고기나 생선을 올린 솥밥으로 도망친 뒤였다. 어째서 비빔밥은 파에야가 되지 못했는가? 바로 우리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