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화짬뽕 - 맛의 보편적 성질

직화짬뽕 - 맛의 보편적 성질

서울 동북지역에 가면 두세 군데 정도 "불맛나는 직화짬뽕전문점"같은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를 목격할 수 있다. 사진은 이제는 전부 철거된 장위 모 구역의 맞은편에 존재하는 곳. 서울의 동북지역은 누구나 알고있는 서울의 소외지역이다. 그런 곳에서 맛있는 한 끼 식사는 과연 사치일까.

불과 작년 즈음까지만 해도 을씨년스러운 폐건물을 마주하며 식사가 가능했던 이곳은 이제는 건너편이 완전히 철거되어 도심에는 더 이상 흔하지 않은 황량한 벌판을 풍경 삼아 식사할 수 있는 곳이다. 여느 서울의 식당들과 크게 궤를 달리 하지 않는 외관은 철저한 지역민 상대 영업만을 염두에 둔 느낌을 낸다. 실제로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방의 주민이거나, 적어도 근방에 생활의 터전-즉 직장이나 학교(한예종)를 둔 사람들이다.

그러한 시큰둥한 식당을 왜 나는 근방의 주민도 아니면서 꾸역꾸역 찾아왔는가. 가끔은 마주하고 싶은 음식을 내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인가. 이름처럼 주문을 하고 나면 그제서 웍에 재료를 볶는, 그리고 웍을 돌리는 사이 가스불에 야채가 그을음이 생긴 짬뽕을 내는 곳이다. 한국식 중식을 기반으로 여느 중식당처럼 중식당에 왔지만 중국 요리가 당기지 않는 이들은 위한 구색 느낌의 메뉴가 갖추어져 있다. 다만 중식당의 구색 메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짜장, 짬뽕, 볶음밥, 그리고 탕수육. 고전의 반열에 오른 한국식 중식 네 가지가 이곳의 네 바퀴이다.

짬뽕의 종류는 썩 다양하지만 기본적인 조리의 틀은 일관적이다. "모체 소스"의 역할을 하는 육수가 있고, 거기에 주문시 정해진 재료를 불에 볶고 합쳐내어 국물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 면을 말아낸다. 특별한 느낌을 내지 않는다. 볶음밥도 여느 중식당의 방식과 같다. 초벌로 제작해둔 느낌의 볶음밥을 주문에 따라 추가로 기름을 넣고 웍에 볶아 코팅해서 낸다. 탕수육만이 일종의 구별의 이익이 있다. 레몬을 이용한 소스를 그냥 끼얹어서 내는데 소스의 신맛이 썩 괜찮은 가운데 시트러스의 향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

특별할 것 없는 식당을 왜 가끔씩은 마치 루틴처럼 찾게 되는가 하면 그 힘은 기본에 있다. 보편적으로 좋다고 인식되는 요소들이 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식당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중식의 생명인 양파의 적절한 질감을 살리기 위해 숙련자가 항상 웍을 잡는다. 국물에는 별다른 기교가 없지만 지방과 염분이 형성하는 맛의 두께(body)가 모자라지 않다. 최고와는 거리가 다소 있으나 양파의 단맛과 양립 가능한 정도. 면은 적절하게 삶아져 지나치게 퍼지지 않고, 또 설익지도 않다. 이로 국수를 끊는 사이 국물과 야채를 씹는 쾌감이 적절하게 안분된다. 볶음밥 또한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을 거친다. 빨리의 논리에 먹는 행복이 지배당하지 않고 적절한 상태가 나올 때까지 올바르게 볶는다. 볶음밥은 아직 표본이 모자라지만 실패한 것을 마주친 적이 없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게 담겨 나오는 데에도 논리가 있다. 억지로 뭉치면 밥알에 남은 열기에 밥알들이 서로 수증기를 내뿜으며 축축하게 젖어버리는데, 흐뜨려놓은 모양새에는 그런 걱정이 적다.

이러한 다소 평범한 요리가 황당한 양으로 제공된다. 한국에서 "지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지만, 나는 그 이전에 바로 이게 한국의 지로라고 본다. 폭탄같은 양이 쏟아진다. 진득하게 뼈를 삶아낸 국물이 아닌 영리하게 치킨 스톡을 이용한 느낌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지로와 썩 통한다. 엄청난 야채 폭탄, 후한 고기 인심, 감당하기 어려운 면의 양. 그리고 이런 것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단계의 맛의 완성도.

근방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가게인만큼 이곳의 요리는 보편적인 성질을 지녀 동북지역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에 두루두루 어울린다. 독신자의 마음을 녹일 푸짐한 한 끼 식사부터 주당들의 최후를 불태울 피날레까지 지역민들의 삶의 장소로 쓰이는 등, 이제는 줄서있는 공인중개사들 외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없는 길목에서 홀로 밤늦게까지 대기가 걸린다.
20201114-DSC03940

그나마 작가성을 느낄 수 있는 메뉴는 바로 이 탕수육이다. 튀김 안의 고기가 메마르기 전 적절하게 건진 탕수육은 충분한 레스팅을 거쳐 상에 오른다. 전술한 소스의 레몬향부터 땅콩 가루같은 해석들은 주방의 오리지널리티다. 보편적인 식사에 어울리는 바로 그 말-"가성비"가 떠오르는 저렴한 가격에 풍성한 물량을 지녔다. 나는 이 탕수육을 두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곳의 탕수육이 이렇게 보편적이지 않은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현재 한국에서 탕수육의 좋은 모습에 대한 의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부먹"과 "찍먹"은 이제 너무 지겨운데다 딱히 상업성이 있는 주제도 아니므로 민트초코 따위와 달리 밈의 역할에서 밀려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후 우리의 탕수육은 여전히 우주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논쟁을 차라리 긍정적으로 보는데, 애초에 먹는 것에 조금이라도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이려고 하는 시도가 잘 없기 때문이다. 컨셉이더라도 "바삭함을 유지하기 위해 찍는다"니 "소스를 고루 즐기기 위해 붓는다"니 나름의 논리가 있고, 반증도 이루어진다. 과학의 시작이다. 나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어느정도 보편성을 띈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애초에 중국을 원류로 하는 음식이고 중국인들은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머릿수가 많기로는 우리보다 아득하게 많은데 광둥식 스윗-사워 포크咕嚕肉에는 보편적으로 통하는 정서가 있다.

질감에 대해서는 으레 보편적인 해답이 있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 다음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리소토를 만들 때 쌀은 알 덴테를 목표로 하지만 심의 흰 부분을 남기는-그야말로 면과 같은 이해로 알 덴테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전분이 전부 무너지지 않아 쌀알의 내부가 전체적으로 일정한 씹는 감각을 주는 상태로 이해하는 요리사도 있다. 이러한 이견은 결국 파도같은 형상을 이루는all'onda 리소토라는 답에 향하는 과정이다. 물론 자포니카종 쌀이라는 재료에 대해 그러한 답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스시만 보아도 심지를 녹이되 겉의 표면이 무너지지 않고 매끈해야 하는 거꾸로 알 덴테逆アルデンテ를 모시고 사는 이들이 있는 반면 전체적으로 풀기가 있는 밥을 내는 경우도 있다. 탕수육의 튀김옷과 소스가 형성하는 튀김옷에 대한 대화 또한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취향이니 가던 길 갑시다"는 요리를 사랑하는 태도가 될 수 없다.

게시글에 대한 최신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