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노티드 - 식도락가의 죽음

카페 노티드 - 식도락가의 죽음

В животе у Червякова что-то оторвалось. Ничего не видя, ничего не слыша, он попятился к двери, вышел на улицу и поплелся... Придя машинально домой, не снимая вицмундира, он лег на диван и... помер.
체르바코프의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지고 말았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채로 그는 문으로 뒷걸음질쳐서는 거리로 간신히 걸어나왔다. 기계적으로 집에 와서는, 제복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워서... 죽었다.

그래, 언젠가는 취재를 해서 글로 완성하고야 말아야지. 어느날 항상 줄이 있는 노티드의 모 지점에는 줄이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두려웠다. 누구도 내게 물어보지 않는, 그러나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책임감과 개인적 불행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오는 공포였다. 이걸 내가 결국 내 돈 주고 또 먹게 되는구나.

그야말로 웃음으로 가득차있는 노티드의 공간을 보고있자면 숨이 턱 막힌다. 포장도, 진열대도, 메뉴판도, 심지어 케이크마저 웃고 있는 가운데 나도 애써 웃음기를 지어보았지만 두 사람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다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입장객들을 관리하는 점원과 바쁘게 포장하는 매대의 직원이 그들이었다. 이름표를 볼 때마다 나는 「파이트 클럽」 도입부를 떠올린다.

원색 가득한 인테리어 속에서 가장 먼저 선택에서 제외되는건 케이크. 저렴한 아이싱의 케이크의 느낌이라서? 그보다도 케이크 보관하는 냉장고의 상태가 케이크의 대접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국내의 케이크 진열대의 대부분은 습도 관리가 만족스럽지 않지만. 유독 눈에 밟혔다.

냉장고 밖, 상온에 진열된 빵들을 보면 더더욱 숨이 막힌다. 노티느의 정서는 그야말로 시각적 과잉이다. 맛의 가능성이 모두 시각적 요소에 뒤덮여 숨막혀 죽는다. 예컨대 캐러멜 맛이라면 캐러멜이 잔뜩 뿌려져 있고, 버터를 먹을 요량이라면 날것의 버터가 커다랗게 올라가 있다. 크로아상은 오레오나 시리얼 따위에 코팅되어 금빛의 표면은 볼 수도 없으며, 도넛은 이미 크림의 두께가 빵에 필적하는 가운데 맛을 상징하는 시각적 기호를 그 위에 또 쌓는다.

이러한 음식을 먹는 것은 취재의 의지 이전에 스스로에 대한 굴욕적 대우degrading treatment이므로 결국 지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클래식" 바닐라 도넛이다. 도넛 반죽은 의외로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다. 도넛은 곤죽에 가까운 상태가 아닌 최소한 빵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도넛에는 맛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 듯, 단지 설탕과 지방만을 입에 코팅한다. 결국 맛은 크림으로 공이 넘어가는데, 정말이지 클래식과 바닐라 둘에 대해서 모두 눈물이 난다. 크림은 끈적한데 맛은 옅으니 정말이지 맛에 방향성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경우가 아닌가. 우겨넣은 크림 위에 다시 짜올린 크림은 나 정말 바닐라 맞다고 내게 애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너는 바닐라가 아니야.

노티드의 모든 빵들은 빵이라기보다는 피사체이며, 굳이 형식을 나누자면 이 음식을 먹는 행위는 가스트로노미보다는 포르노그래피이다. 빵은 도넛일 필요도, 크로아상일 필요도, 기타 무엇의 형태일 필요도 없다. 그저 이건 최소한의 익숙함으로 다가가기 위한 밀가루 틀일 뿐이다. 원색의 웃음으로 포장된 내부에는 사람의 웃음이 보이지 않으며, 빵의 내부에는 맛이 보이지 않는다. 폭발적인 시각적 유혹이 오아시스로 사람을 이끌지만 손을 모아 한껏 뜨면 잡히는 것은 모래이다. 맛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시럽과 오레오, 로투스 비스킷과 같은 저렴한 공산품들이 형형색색의 탈을 쓰고 이제는 본래 밀가루가, 우유가, 크림이, 바닐라가 가지고 있는 맛을 탄핵한다. 그리고 이 도넛이 매장에서 가장 저렴한 축으로, 가격은 KRW 3000이다. 도넛을 주문하면 던져주는 플라스틱 칼과 포크는 부디 버려지지 않길 바라며 고이 모셔둔 채로 간신히 일어섰다. 나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채로 노티드의 매장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