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쯔미라멘 - 재료의 계절?

마쯔미라멘 - 재료의 계절?

모두에게 어려운 시절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느니 차라리 당분간은 절필하는게 옳을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무해한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면-그게 가장 지독한 경우가 아닌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는 내가 그다지 즐기는 방식이 아니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붐비는 연말이지만 어떠한 모임은 커녕 점심 식사마저 안전한 방식으로만 해결하고 저녁은 항상 집에서 조리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떠한 기회를 엿본다. 특정한 요리를 벗어나서, 희미한 인상으로만 남아있는 개별 요리 이면의 우리의 편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마쯔미 라멘의 계절 메뉴는 차슈 대신 관자가 올라간 라멘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마쯔미의 라멘에서 돼지고기 대신 관자만이 올라왔다. 겨울에 살이 오르는 가리비라서? 그 이외에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나치게 익히지 않은 가리비는 좋은 단맛과 적절한 풍미를 지녀 국물에 적당히 어울린다. 그러나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지는 않는다. "왜 가리비냐"고 물으면 딱히 답이 나오지 않지만 라멘의 기본 공식인 돼지고기 차슈는 뭐 언제부터 그렇게 합당한 답이라서 존재했는가. 일상에 무리 없는 맛이다. 출처가 다른 단맛이지만 맛을 한 겹 올린 느낌을 확연히 더하며, 국물이 입안에서 퍼지는 사이 결따라서 분해되는 기분이 좋다. 감칠맛이 적당한 마쯔미의 국물은 어묵같은 것도 썩 잘 어울릴 법 하다는 생각이 남는다.

오늘은 이 라멘 이야기는 적당히 하고, 이러한 실행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누가 라멘에 가리비를 넣게 만들었는가? 이제는 도심 곳곳에 성탄 전야를 기다리는 장식들이 걸리고 빵집에서는 슈톨렌이니 파네토네니를 판다. 비싼 외식 장소에서는 트러플이 넘실대고 '가을 전어'보다도 유행이 시끄러운 '겨울 방어'가 시선 곳곳을 메운다. 우리는 마치 때와 장소를 신경써가며 무엇을 먹을지를 결정하는 듯 하다.

물론, 무엇을 요리하는가는 요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떤 것들은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슈톨렌을 먹는 것은 단지 그네들의 관행이기에 적은 설득력을 지니지만 방어는 겨울이 되면 추위를 나려고 몸에 지방을 축적하는 버릇이 있으니 많은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많다. 겨울에는 도야마현 히미의 방어氷見寒ブリ같은 걸 찾는 옆나라 버릇이 떠오르지만 과연 우리 바다나 식문화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국산이라고는 하지만 삼면이 바다에 큰 섬까지 하나 있는 우리 생태계의 방어가 죄 비슷할 리가 없다. 가장 추운 동해의 깊은 바다부터 대한해협께의 방어까지 구분해서 파는 경우가 잘 없고 조리법도 한국식 회와 매운탕의 한가지다. 초밥까지 두 종류라고 할까. 애당초 일본 요리는 좋아하는 이가 많지만 일본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많지 않다. 도야마 방어 말고 이시카와 방어天然能登寒ぶり도 위세가 대단하다. 도요스에서 거래량이 가장 많은건 히야마의 양식 방어. 굳이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단지 어선의 정박지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 탐스러운 재료라면 조리법도 고민해야 한다. 샤브샤브, 무조림, 난반즈케, 배추랑 내도 좋고.. 죽음을 유예했다가 쳐버리는 방식이 과연 계절인지 모르겠다. 마쯔미의 가리비는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날 가리비를 적당히 던져놓는 방식은 아니고, 단지 계절감이라는 거짓말 뒤에서 가격을 뻥튀기하지도 않는다.
미국에서는 종종 가리비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지적하곤 한다. 다운타운의 양식당에서는 가리비를 생-자크로 부르며 버터에 지져낸 뒤 수십 달러를 받고, 사람들은 가리비 표면을 어떻게 익혔는지 탐구하는데 몰두하지만 만두피에 들어가면 가격은 몇 분의 일로 격하되며 누구 관자신지도 관심이 없어지곤 한다는 식의 이야깃거리다. 다행히 마쯔미의 가리비는 그런 가격의 불쾌함이 없었다. 해물이 여전히 천대받는 국내 라멘 업계에서 존재 자체가 반갑다. 그러나 가리비를 조리하는 방식이 와닿지 않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고민거리다. 가리비는 단지 이미지인가. 특정한 때에만 먹어야 하는 음식들이 매 주마다 푸디들을 바쁜 사회속에서 이미지들은 우리를 더욱 내몬다. 방어도 먹고 샤블리에 굴도 먹고 가리비에 오오마의 참치까지 먹어치워야 하니 숙제는 많은데,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 유행가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더 이야기할 힘이 나지 않는다. 단지 미래가 달갑지 않으리라는 걱정 뿐. 어차피 우리가 하는 대부분은 코스프레다. 파네토네를 씹는다고 이탈리아 사람이 되지 않고 참치 도매상 이름 외운다고 몸에서 츠키지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계절과 재료를 연결하려는 시도도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엉망일 뿐이어서, 돌아보면 이제는 굳이 왜 먹고있는지도 모르겠는 것들도 있다. 이 때가 아니면 안된다는 조급함만이 무기일까? 돌아오지 않는 것은 2020년 12월 6일도 마찬가지다. 이 시간은 다시는 없다. 내 몸의 세포마저도 분열과 소멸을 반복하며 동일한 상태를 유지한 적이 없지 않은가. 희귀한 식사가 아닌 아름다운 식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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