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야 코노하 - Thronprätendent

멘야 코노하 - Thronprätendent

아마도 7월이다. 긴 휴가기간동안 사진을 찍어둔 것이라고는 집에서 먹은 아이스크림 정도였던가.
음식에 앞서 세 가지를 이야기해보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글은 사람을 투영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글에 잡아먹히면 큰일난다. 글이 재미없어질 것.
첫째로, 내 글을 목표는 크게 하나이다. 하나의 거대한 생활권으로 불리기에는 지나치게 큰 서울이지만 어쨌거나 이 도시가 조금 더 맛있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쓴다. 맛있음의 행복은 우연이어서도 안되며 사라져서 덧없어도 안된다. 시간이 지나면 서울은 더 좋은 모습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도록 환경이 구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은 전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둘째로, 그러기 위해서 글이 알기 쉬우며 내용은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형용사로 꾸며낸 뒤 내용물은 공허한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안된다. 반대로 업장에서 제공하는 정보의 나열이나 직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아기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정찬에 대해 말할 때에도, 길거리 간식에 대해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음식은 제마다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밝혀야 한다. 특히 감추고자 하는 것은 더욱.
셋째로, 전적으로 소득의 평균값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는 이들의 기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독자가 위치하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위치와 시각의 방향을 항상 생각하며 글을 써야 한다. 외식 컨설턴트나 레스토랑 VIP의 시각은 곤란하다. 이미 그런 것들은 지나치게 많다.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다. 특히 사업가의 시각에서 보는 글들이 제일 많은데 나는 그런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

신변잡기 끝. 7월 여느 무더운 여름날의 식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대한민국의 라멘은 현재 밀도에 있어 충분히 많아지고 있다. 라멘이라는 장르가 적어도 저연령층에 한해서는 하나의 보편적 입지를 획득했으며 덕분에 중소도시나 소외지역, 심지어는 전형적인 농어촌의 상업지구 내에서도 라멘이라는 요리를 만나볼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덕분에 라멘을 해먹기도 썩 간편한 환경이라, 「아리아께」 스프와 냉장 중화면만 있으면 썩 괜찮게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고명 또한 중요하기는 하지만 숙주나 옥수수를 살짝 데쳐 얹고 달걀은 요령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라면"이 우리 일상에 파고든지 거진 반백년, 이제는 "라멘"의 자리가 라멘과는 다른 곳에 생긴 셈이다.
그러나 먹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들에게 라멘은 라면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식도락하는 이들에게 라면은 애증의 대상이어야 한다. 애(愛)라고 함은 공산품이 설정해주는 맛의 하한선이 있기에 아무리 힘든 때에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요, 증(憎)이라 함은 지금까지 라면이 죽여온 맛들에 대한 갈등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가서 귀한 게를 잔뜩 넣어 끓인 라면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불행하다. 게는 자신이 가진 맛의 반도 보여주지 못하고 억울한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기존의 라면은 신라면 이후로 매운맛에 모든 맛을 가리는 수준에 이르렀으므로 라면의 보통의 조리시간, 늦어도 10분을 넘기 어려운 시간동안 국물에 베어드는 맛이라도 그야말로 천당에 닿는 듯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만큼 라면은 그 자체로는 맛이 별로 없다. 물론 저렴하게 매입하면 개당 오 백원을 넘지 않는, 생존의 음식으로는 더할 나위 없으나 한 끼에 오 백원보다는 더 투자할 수 있는 경제대국의 서민에게는 이보다 나은 맛을 즐길 자격이 있다.
지금 서울의 라멘은 전부 라면의 반대편 어딘가에 서있다. 이름좀 날린다는 라멘집들 메뉴를 보면 큰 궤에서 다른 게 없다. 죄 돈코츠 시절을 지나니 죄 마제, 아부라 시대가 있었으며 죄 파이탄 시대, 한 켠에는 항상 한정판 딱지를 달고 있는 찍어먹는 라멘(츠케멘) 정도가 있다. 가장 오래되고 뻔한 라면의 형태, 치킨 스톡 기반의 브로스에 중화면을 말아내 완성하는 라멘은 왜 인기를 얻지 않을까.
라멘집 갯수로도 전국 으뜸가는 서울이므로 찾자면 당연히 잔뜩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다음 단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중화소바던 시오던 쇼유던 뭐라고 부르건간에 그 이름에 걸맞는 맛을 갖출 때가 되었다.
멘야 코노하의 시오라멘은 바로 그 다음 단계의 필요성을 알고 정확히 노리고 있어 보였다. 설명부터 남들과 휘황찬란하다. 키오스크 옆에 붙은 설명에서는 오리, 닭, 멸치, 무려 세 가지가 육수에 쓰인다 한다. 쪄서 말린 멸치와 오리라는, 쓰는 것 자체로 차별화가 가능한 재료들이 전면에 나선다. 다만 자체로 차별화 되는 것은 국내 사정이지 뻔히 있는 레퍼런스에 가깝다. 당장 멸치는 한국에서도 국물 재료로 가장 흔히 쓰이는 물건이다. 멸치에 다시마는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기가 더 어려운 조합이다. 눈길을 사로잡는건 역시 그렇다면 오리가 아닐까.
오리를 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라멘 국물의 기본이 가금류를 한껏 끓인 육수, 즉 중국 요리의 칭탕(清汤)이라는 점을 안다는 의미이다. 중국 요리의 가장 기본이고 그 자체가 요리가 되기도 하는 칭탕은 라멘의 면을 담은 가장 최초의 국물이기도 하다. 핵심은 온도다. 필요 이상의 온도에서는 뼈가 녹아버리기 시작하지만 지나치게 낮으면 맛이 나오지 않는다. 무게감과 맛을 동시에 불어넣어줄 지방을 국물에 녹여내되 탁해져서는 안된다. 통뼈나 두터운 고기보다는 목부터 척추를 따라 절단해낸 부위와 그에 붙은 살덩이, 그리고 필요한 경우 껍질까지 끓여내는게 일반이다. 가라ガラ다. 닭이면 토리가라, 오리면 카모가라. 그래도 부유물이 있으면 걸러내기도 하는 식으로 집요하게 맑고, 그런데 맛은 깊어야 한다. 노란 빛으로 접시 바닥까지 보이는 듯 하지만 지방이 상당하므로 그에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맛의 레이어를 덧입혀주는게 필수다.
그래서 김까지 한껏 주문헸다. 김의 향, 레몬의 신맛, 차슈의 단백질과 완자의 단맛, 달걀의 옅은 짠맛, 파와 후추 등의 매콤한 자극 정도면 맑은 국물이 가진 지방과 감칠맛 위에서 춤출 수 있다. 전체를 아우르는 탄수화물의 역할은 반죽에서 물의 비중이 보통보다 높은 면이 맡는다.
둘째로는 닭이 아닌 다른 가금류를 쓴다는 것, 현재 라멘집들이 사용하는 닭의 한계를 안다는 의미이다. 커봤자 1.5키로를 좀처럼 넘지 않는 시판 닭은 국물용으로 한계가 명확하다. 닭의 사정이 조금 나은 일본에서도 천천히 오래 키운 지도리특정 지역의 토종닭, 보통 재래종의 교배종이며 사육 환경이 핵심이다와 같은 것들이 라멘의 유행을 선도하는 이유가 있다. 국물요리에 쓰일 가금류는 맛이 좀 진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모자라서 아에 껍질 쪽 기름을 따로 내서 얹는 식으로, 마치 주정을 넣어 와인을 강화하듯 맛의 농도를 높이기도 한다. 아무튼 하림이니 마니커니 달고 팔리는 통상의 닭은 지방이 적고 맛이 엷다. 거의 구이집에서 한 마리가 썩 고가에 팔려나가는 토종닭은 라멘집에서 선택지가 아니다. 그러한 사고의 흐름에 따라 비슷한 환경에서 양산되더라도 더욱 두툼한 지방과 진한 풍미를 갖춘 오리라는 선택은 매우 이해할 수 있으며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한 선택이다.

그러나 라멘을 맛본 순간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이름만 오리지 어딜 봐도 오리 라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멸치 향이 지배하는 이 국물은 중화의 후손으로서 라멘으로서는 그 피가 옅었다. 오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닭이야 어찌되었든 좋은 수준이었다. 결국 또 다시 돌아와서, 지방이 부족한 국물이다. 지방이 옅으니 소금간도, 강할 필요가 없다. 세 가지가 아니고 몇 가지여도 소용 없는 염도. 자연히 김을 넉 장이나 필요로 하지 않았다. 두 장은 남에게 나누어 족했다. 멸치는 매력적인 재료이지만 스스로는 국물을 완성할 수 없다. 아예 멸치 자체가 녹아들듯이 진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이런 경우에도 그 쓴맛을 다스려야 함은 물론. 그래서 다시마와 야채의 배합이 가장 기본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육수에 된장이니 김치니 강한 맛을 더해서 먹는다.
고기류에 밴 단맛과 레몬의 신맛이 적당히 먹을만한 식사를 만드므로 식사로써 부적합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백화점에 가까운 토핑은 국물이 할 수 없는 맛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가깝다면 한 끼 식사로 종종 찾을 지도 모른다. 다만 이 도시에서 스스로 이런 포지션을 자처하기로 했다면 이렇게 속이려는 자세는 굉장히 곤란하다. 만약 포기라면 적어도 그 의사는 묵시적이어서는 안된다.
서울에서 새로운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음식 대부분이 뻔한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정한 요리사의 레시피일 때도 있고 이렇게 다른 문화의 전통일 때도 있다. 어느 쪽이건 좋은 것이라면 왜 좋은지 설득할 수 있어야 시작이 된다. 이 라멘은 시작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슬픔은 두 배가 된다.
새로운 시도가 속임수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좌절한다. 오리의 가능성은 이 도시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금류의 진한 지방맛은 사라져 버렸다. 또 뼈만이 뿌옇게 녹아있는 파이탄이니 돈코츠니 하는 것들이 이 도시의 남은 빈칸을 메꿀 것이다. 질식할 것 같다. 그런 바이브인 것이다. 레몬을 담그는 식. 젓가락으로 저 레몬을 쥐어짜야 한다. 식초쪽보다 나을게 없다. 그럼 뭐가 좋은가. 비주얼이 좋다. 음식의 본질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서울에서 라멘이라는 장르가 앞으로 한식은 물론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식생활의 미래까지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시도는 매우 반기고 또 중요하다고 본다. 국물 요리가 대부분이지만 정작 그 국물의 맛이 극도로 외면받는 현대 한국 식문화에서 라멘은 일종의 안티테제로, 국물맛에 대한 답이 되줄 수 있다. 왜 일본부터 세계로 라멘쟁이들이 그렇게도 생겼을까. 잘 쳐줘봐야 국밥이랑 비슷한 서민적인 요리가, 조리부터 재료까지 일본의 고급 요리의 전통에 정면으로 반하는 외국 요리 따위가 왜 인기가 있었을까. 맛에 대해 열정을 다할 수 있는 요리였기 때문이다. 배부르고 행복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나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렴 좋았다. 중국 요리가 전수한 풍부한 지방, 한껏 그을린 고기와 중립성으로는 으뜸가는 밀가루 면. 이 셋의 조합은 영혼까지 보듬어준다. 멈추지 않고 탐닉할 만큼 맛이 진한 국물은 저렴하게 큰 대접을 가득 채우고도 맛에서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라멘은 여전히 천 엔 한 장으로 먹을 수 있으면서도 무한히 진화하고 있다. 국물의 점도에 미쳐서 아예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진해져 버린, 츠케멘 같은 파생 장르가 나타난 이유가 있다. 지금도 더 진하게,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 국물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열정은 이름만으로 훔칠 수 있는게 아니다. 이는 이곳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제 "파이탄"도 질릴 정도로 많이 생기고 있으므로 각자 서울에서 쓰이지 않던 식재료 따위로 차별화 하고자 하는 공간들은 생기고 있다. 본 것만 해도 새우, 게, 오리, 소가 있었다.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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