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던 - 바닐라 실종사건

무던 - 바닐라 실종사건

연건, 혹은 누군가에게는 혜화, 지나가면서 보기로는 명륜. 어느 이름이건 상관없다, 이런 종류의 거리-대학가-는 나에게는 각별한 공포의 대상이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나 뿐만 아니라, 이 블로그에서의 글쓴이, 먹는 사람으로서의 나에게도 그렇다. 조잡한 자수로 수놓은 학교법인들의 상징물들을 걸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질식할 것 같지만, 그보다도 나를 질식케 하는 것은 대학가의 음식이다. 서울을 비롯, 여느 대학가나 음식 지옥이다. 네이버 시절 신림2동과 9동(현재는 서림동과 대학동)을 예찬해 마지않은 것은 정말로 그곳들의 음식이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그런 대학가에 아이스크림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가 생기면 따라 나오는 한심한 본능, 호기심에 여러번 골탕을 먹었고 또 가보지 않은 곳에 굳이 가서는 가보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왔다. 그 이후 블로그에 글을 쓸 목적으로 자세를 잡고 방문하는 디저트 가게 중 아이스크림이 품목인 곳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더 이상 생기지 않았는데, 이 서울에서는 "바닐라맛"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덕이다. 이탈리아 요리를 한다는 곳에 가면 면에 기름이 어떻게 젖었는지 키친 타월로 닦아라도 볼 듯한 심각한 미식가들이 많은 도시에 벤 앤 제리스를 벗어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이렇게도 없다니! 알리오 올리오나 고등어 초밥, 양파 스프같은 옛 요리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 도시 서울에서 옛중의 옛맛 바닐라의 대우가 어찌 시큰둥하다. 얼마 전 어딘가에서 바닐라맛 젤라또 대신 "엑설런트"를 냈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 거대한 생활권에서는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바닐라도, 아이스크림도, 이 도시에는 진정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다가 이 무던의 메뉴판에 바닐라가 있다는 걸 보고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 대학로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멸치 내음이 강렬하게 풍기는 골목을 지나 입구의 메뉴판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바닐라는 없었다. 없어졌다. 내 꿈도 산산이 부수어졌다.

그래도 기왕에 왔으니 가능한 한 번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세 스쿱(KRW 8000)을 받아들었다. 메뉴가 무언가 많고 점원도 많고 손님도 많은 가운데 고전적인 맛은 아무것도 없다. 초콜릿, 바닐라, 피스타치오, 스트라치아텔라, 그 어느 것도 없이 딸기만이 계절을 업고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기본적인 맛이라 할 수 있는 잔두야와 매장에서 가장 대표적인 메뉴로 소개받은 금귤 요거트, 그리고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킬만한 수정과 셋을 골랐다.

처음 잔두야를 먹는 순간 나는 이 글을 잔두야에서 끝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잔두야라고 부를 수 없는, 지금 냉동고에서 찾을 수 있는 맛이었다. 애초에 사용하는 커버춰 자체가 거기서 거기인게 이 도시의 현실이라는 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헤이즐넛의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데이비드 레보비츠의 경우처럼 맛을 우린 헤이즐넛을 다시 굽고 다져서 아이스크림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헤이즐넛 페이스트를 쓰는지 직접 빻는지는 몰라도 그냥 헤이즐넛의 비중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그냥 풍미가 애매한 초콜릿이 아닌가. 그 의도를 아예 알 수 없는 가운데,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점만을 알 수 있었다.(일종의 철학적인 물음이 담겼다면 내가 다시 생각해보겠다) 이러한 흐름은 금귤 요거트에서도 이어진다. 금귤 요거트는 그래도 존재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절 재료이기 때문에 지금 쓴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통상 만만한게 이런 시트러스는 즙을 써서 소르베를 만드는데, 유지방을 더해서 얻은 실익에는 의문이 남는다. 확실히 지방이 많이 더해졌지만 그만큼 맛이 채워지지 않았다. 금귤의 쓴맛을 피하기 위해 금귤 자체의 함량이 절제되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렇다면 왜 금귤이어야 할까? 단지 봄이니까? 그래서는 안된다. 저세상같은 맛의 아이스크림들도 메뉴판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논리는 설득력이 없는데, 그렇다면 또 의도 바깥의 영역이라고 넘겨짚게 된다.

유일한 소르베인 수정과는 맛에 앞서 항상 따지고 보는 질감의 선결적 문제에서 결착을 맺는다. 흔한 과일 소르베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이유는 과일의 펙틴과 섬유질 따위가 알게모르게 아이스크림의 구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생강이나 계피는 이런 역할을 할 수 없으므로(이를 위해서 생강을 다져넣는다? 그런 상상력은 아직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듯 하다) 질감은 무너지기 십상이다. 뻔한 수준으로 돌아가자면 유당 대신 아이스크림의 PAC(AFP)를 잡기 위해 유당이 아닌 단맛이 많은 기타 당류가 더 많이 들어가므로 단맛이 전체를 정복하기 십상이다. 수정과를 마실 때 우리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면 유쾌할 일만은 아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현대 조리과학의 시대에서는 극복 가능하다. 의도에 따라서 아주 떡에 가깝게 들러붙은 소르베 따위도 만들 수 있는게 요새 주방이다. 그러나 이 수정과는 그 사이에서 어떤 해답도 내지 않은 채 아무래도 생강과 계피의 풍미를 지닌 아이스크림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나를 설득하려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설득에 친한 사람이 아니다.

맛의 다양성 없기로는 아주 으뜸가는 거대도시인 서울에서 유독 아이스크림만큼은 다양성에 목을 맨다. 어딜 가나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맛이 있는 가운데 정작 있어야 할 맛에 대해서는 모두가 묵비로 하는듯 하다. 왜 아이스크림은 필사적으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가? 대형 요식업체들이 이목을 끌기 위해서 메뉴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서 치즈버거나 뻔한 마르게리타 피자 하나를 먹을 곳이 없는 건 아니다. 왜 아이스크림만 이렇게 저세상으로 가는가?

  • 「피에트라」가 마다가스카르 바닐라를 쓴 아이스크림을 내는걸 알지만 블로그 체험단 후기와 그것을 모집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루지 않을 예정임을 겸사겸사 밝힌다. 학원(?)에서 배운 뒤 체험단 쓰는 패턴에 두 번은 당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