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치야 - 이 요리를 보라

판치야 - 이 요리를 보라

약수역 근방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없었으나 어느날 판치야에서 먹은 저녁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7월 언저리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불행하게도 예절이 부족했고 나는 제지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왔다.

대립항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판치야에서 밥을 먹은 기억이 있음에도 쓸 이야기가 없었다. 네이버 블로그 시절이면 의무감에라도 작성했겠으나 논의의 이익이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립항이 생기고 논할 이익이 생긴다. 판치야의 음식을 우연이 아닌 복제 가능한 현상으로 만들 필요가 존재한다.

판치야의 이름이 강아지 이름에서 따왔다는 부분을 잘라내면 마침 일본의 흔한 작명, 家자를 달아서 끝내는 이름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 판치야의 요리에는 일본인들이 동물의 고기를 만나 비지어낸 소동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는 현재 판치야가 마주하는 소비자의 기호에 대한 반영이기도 하다. 크림이나 루(현대에는 루의 역할만을 하는 제품을 쓴다)를 기반으로 빚어낸 소스 중심의 고기 요리는 한국에서 환영받고 있지 못하는데 비해서, 비교적 소스 제작에 대한 부담감이 적고 그러한 역량을 고기를 먹는 경험의 양을 늘리는 데 투하한 로스트 비프와 돈까스가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자리한다. 판치야의 돈까스 메뉴는 사진을 촬영할 당시에는 없어졌지만 꽤 인기가 있었으므로, 맥락에서 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서양과 일본의 협상의 결과물이 다시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맥락의 탈락이 일어난다. 왜 서양이랑 일본 사이에서는 협상, 또는 진화라고까지 부르면서 대한해협을 건너는 순간 탈락이라는 모욕을 주는가. 음식을 맛보는 데에는 최소한의 기준선이 있고 그 기준선을 맞추는 데에는 조리의 기본공식, 과학의 원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탈락이라고 부르며, "현지"라는 단어 앞에 알쏭달쏭한 겉핥기식의 경험의 잣대가 문화 융합의 가능성을 쫓아내므로 진화라고 부르기 어려운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소고기를 천천히 익히는 로스트 비프의 핵심은 역시 열에 의한 조리이다. 중심부를 살모넬라균의 살균이 가능한 온도 이상으로 맞췄을 것이다. 건강하게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오신 등에 변성을 일으켜 맛을 이끌어낼 수 있기에 우리는 소고기를 익힌다(Roast). 지방의 피로를 덜고 칼로리의 자극을 더욱 진하게 느끼기 위해 고기에게 온갖 우군이 가세하여 요리의 기본적 원리가 완성된다. 혀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을 더해주는 소금과 같은 것부터 특히 후각에 관여하는 감각기관을 일깨우는 향신료 등이 각자의 논리가 있으며 전체를 한 가지 맛으로 어우르기 위해 액체의 분자형태가 소스라는 이름을 달고 요리 전체를 아우른다.
이런 평범하고도 특별한 요리가 잉글랜드 섬부터 대양을 거쳐 일본에 도달하면서 동아시아의 식습관에 맞춰 샌드위치 대신 밥 위에 얹는 진화가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익숙치 않은 유제품 소스가 탈락한다. 빵 대신 밥이라는 논리는 단편적이나마 들어맞지만 소스의 빈자리에 대해서 와사비는 대립쌍으로 자리를 매울 수 없다. 판치야는 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을 두 가지로 가지고 있다. 변형된 이탈리아 요리를 기반으로 해서 어쨌거나 조금은 친숙해진 올리브유, 또는 피를 타고 흐르는 듯한 간장에 기대는 식이다. 이러한 과정만 두고 보면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결과물은 훌륭하다. 그러나 판치야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낳은 필연이 아니다. 그 결과물은 서울의 식문화가 주방에 나눈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 주방에서 서울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왜 그러한가? 당장 판치야의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 곳의 요리와 어떠한 고리를 찾을 수 없다. 판치야의 조리 상태는 훌륭하다. 파스타는 면의 맛을 소스가 해치지 않는 선의 균형에 있다. 밀가루가 아닌 면 씹는 맛이 있으며 그렇다고 소스가 묽지 않다. 소금기가 도는 겉을 부족하지 않게 그을려 부서지는 사이 소기름이 파고드는 재미가 있도록 스테이크를 굽지만 내면을 즐기는 데에 무리가 없다. 그렇게 한 접시에 만 얼마일까, 마진율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보편적 완성도를 갖추었으니 일상의 식사로 반복해도 지루함이 없다. 종종 메뉴 구성을 바꾸는 것이 종래의 컨셉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곳만 그런 것이 바로 그 근거가 된다. 판치야의 요리는 기본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풀이법에 기대고 있다. 물리의 원리는 그 어떤 사회적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심해저나 로키 산맥같은 환경이라면 기압 정도가 추가 변수로 작용하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만인류의 언어로 통하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 그러한 보편타당의 논리의 부재가 있고, 그에 따라 반대편에 선 요리는 특별함의 자리에 오른다. 그럴 자격이 있다.

데미 글라스와 흰 치즈, 크림을 배합하고 버섯을 감칠맛의 키로 삼은 파스타 또한 역시 보편의 힘을 보여준다. 풍성한 지방 위에 이노신산나트륨, 구아닐산나트륨 그리고 나트륨이 만날 때 사람은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 균형을 맞추는 실력도 있고 이해도 높다.

그러나 판치야는 당신이 주소를 옮기거나 직장을 옮기지 않는 이상 목격자 이상으로는 마주하지 않아야 할 장면이다. 판치야는 생존을 위해 한국 요식업의 현실의 문법을 차용했다. 음식이 한국적이라는 게 아니라, 운영 방식이 생존에 맞게 진화했다. 시각적 만족도를 충족할(물론 맛도 좋다) 로스트비프 덮밥이 고정으로 자리하고 돈까스, 비프 커틀릿이 들락날락 하며 스테이크가 자리에서 버틴다. 이런 고기 요리만이 살아남고 서구 식문화의 전통 중 환영받지 못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모두 버렸다. 생선이나 냄새나는 치즈같은 것은 폐업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나올 길이 없어 보인다. 이미 효자로 자리잡은 메뉴들도 서울에서는 크게 만족스럽지만 종종 등장했다 또 사라지는 소스의 맛을 보면 아쉬움을 이야기하게 된다. 판치야의 주방에는 다양한 맛이 가능성으로 부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많은 맛을 알고 있으며 또 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이 주방으로 하여금 오늘도 훌륭하게 고기를 굽고 튀기도록 지시하고 있다. 물론 이는 나의 헛된 추측일 뿐이나, 서울을 살아가는 식당에게 어떤 메뉴를 조리할 지에 대해서 재량의 여지가 크지 않다고 느껴지는 감각을 감추기 어렵다. 이런 실력을 갖추었다면 다뤄보고 싶은 게 많지 않을까, 감히 헛다리를 짚어본다.

너무 슬퍼하지는 않아도 좋은 지점은 서울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맥주 목록이다. 소문이 도는 맥주 중 상당수는 이 곳을 한 번은 거쳐간다. 고기 식사와 맥주 한 잔, 뻔한 조합이라도 실력이 담긴 부분은 맥주도 예외가 아니다. 맥주의 선택에 있어 생각하지 못하는 새에 어떤 주장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적어도 한 끼 식사로 완성형이며, 음료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경험에 대한 주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시가 탐닉해서 쥐어짜야 할 대상은 아니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치열하지만 차분하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가깝다면 삶에 녹여내기에 무리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목격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먹고 살아가는 이라면 한 번은 목도ecce할 필요가 있다. 모든 요리가 닮아도 좋을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간다우며 따라서 인간답게 대접하고픈 식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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