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패피와 나머지들

어느날의 패피와 나머지들

패피랜드를 읽기 전과 후 패피를 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지만, 연도가 바뀌고 배치가 바뀌어도 패피는 여전히 패피였다. 새 오크통에서 최소 15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에서 나오는 진득한 단맛은 녹을 대로 녹은 리그닌의 힘이며, 밀을 포함한 탄수화물 구성에서 드러나는 차이-연약한 뉘앙스, 살짝의 민트나 시트러스 껍질의 힌트가 제공하는 청량함- 역시 여전하다.

비슷하게 숙성 연수가 긴 코냑이나 재활용 통을 이용하는 스카치에 비해 가죽이나 담배 등의 향이 강하지 않은 점이 굳이 미국식 위스키를 이렇게까지 해서 마셔야 하는 의문을 주다가도, 패피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한 모금 충분히 머금어 취하다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가격을 잊을 수 있다면 왜 마다하겠는가.

패피의 체이서로는 패피와 견줄만한 스몰 배치 버번 중 정말 미국에서나 만날 법한 제품들로 골랐는데 실은 이쪽의 인상 역시 패피 못지 않았다. Jos. A. Magnus.-Jos.A.Bank.가 아닌-의 머레이 힐, 독립병입자인 제프 매팅리의 제품 중 매장에 있던 하나를 골랐는데 머레이 힐 클럽은 나름 패피에 견줄 정도로 고숙성(9~18년)임에도 정말 체이서로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생산량에 타협이 없는 패피와는 같을 수 없으므로 자연스레 팔레트나 마우스필에서 가벼움이 조금이라도 더 느껴지고 말았다. 매팅리의 독립병입제품은 인터넷을 찾아도 리뷰도 나오지 않는 배치라서 걱정도 되었고 한 잔의 가격도 상당한 편이었는데($20정도였다) 과연 호적수라 부를만 했다. 패피가 복잡함의 뉘앙스로 승부한다면 이쪽은 다짜고자 강한 인상으로 밀어붙여 외려 차이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20짜리 버번에게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인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정말 저녁에 신나게 마시고 드러눕기에는 더 알맞은 맛일지도 모르겠다. 패피가 자꾸 조심스러워지는 맛이라면 매팅리의 것은 자꾸 들이키게 되는 맛이었다. 과연 MGP로 만든 위스키중에는 가장 괜찮은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패피 붐이 있은 이후 패피를 좋기 위한 BTAC, 켄터키 오울 등 고숙성을 추구하는 미국 위스키는 계속해서 출시되고 있다. 그나마도 치솟은 몸값에 비해 품질이 일정하지 않으니 우스운 일이지만.

그중에 뭐가 더 낫네 마네, 특히 패피보다 낫네 마네를 논하는 일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다. 좋은 그림을 두고 위아래를 논하는 사람은 경매쟁이들밖에 없듯이 패피는 진정 켄터키다운 위스키의 길을 제시하고 보존해온 역사적 증인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을 뿐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패피를 마시는 일 역시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그 맛에 안심하고 취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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