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로지 - 세 번째 몽 블랑

트릴로지 - 세 번째 몽 블랑

본 블로그가 설정한 독자의 값-지리적으로는 서울, 소득 및 자산분포는 중위값, 한국어가 유창한 성인-을 생각할 때, 그러한 논의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짐짓 경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기에 욕심이 스스로를 벗어날 때가 있다. 「트릴로지」의 두 가을 디저트가 바로 그런 종류였다.

가을동안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것들을 포함, 여러 디저트를 서울에서 나름 열심히 찾아 먹었다. 포장해서도 먹고 선물로도 받아먹었다. 이런 것들은 블로그에서 이야기할 만큼 경험이 정제되지 않았으니 개별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통상 가을이라는 배경을 두고 두드러지는 흐름은 과일이 아닌 구황작물이나 뿌리 채소 등 설탕 바깥의 단맛을 가진 것들이었다. 추석 철에 밤이 올라오는건 관습적이고, 프랜차이즈 빵집에서도 당근 케이크가 나온다. 해외의 관습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밤 먹는 계절이다. 본 블로그에서도 이미 몽블랑을 몇 차례 다뤘다. 올 가을 많은 몽블랑이 지나갔으나 블로그에서는 1)전형적인 몽블랑, 2)몽블랑을 일부 변형한 경우를 다뤘다. 과연 세 번째가 존재할까? 비슷한 주제를 두고 비교평가나 하는 경우를 넘어서 세 번째 몽블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던 중 「트릴로지」의 몽블랑이 결판을 냈다.

사견으로, 디저트의 세계는 짠 맛의 세계에 비해 서열이 엄격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곳과 같이 식사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설탕과 크림을 통해 형태를 무한에 가깝게 자유로이 변형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질감과 풍미, 맛의 배치 또한 그렇다. 물론 새로운 기술과 기법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벽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짠 맛의 세계에서는 아직은 수많은 인력과 첨단 장비, 그리고 요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셰프가 두루 갖추어져 있을때만이 가능한 것이 디저트에서는 기본에 가깝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좋은 요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좋은 디저트"는 존재할 수 있다. 첫째로 그 방향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의도가 명확해야 한다. 맛보는 경험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의 의미가 드러나야 하는데, 여기에서 두 번째로 그 의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 즉 맛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떤 맛들은 홀로 서있을 때보다 다른 맛과 대비되거나, 또는 다른 맛의 도움을 얻을 때 더욱 강하게 느껴지며, 탄수화물이나 지방 등의 매개체를 더하거나 가지고 있는 수분을 줄이는 등 가공했을 때 경험이 개선되는 경우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것을 명확히 알고 실행한다면 디저트에서는 놀라운 일을 벌일 수 있다. 사과의 흔적도 남지 않았는데 사과의 풍미가 그려진다거나, 초콜릿과 세월을 지낸 포트 와인이 빚어내는 풍미의 궁합을 통해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실행은 의도가 없거나, 실행이 어수룩한 디저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두 가지만 잘 수행된다면 적어도 한 군데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디저트와는 다른 좋은 디저트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주방의 재량에 달렸다. 이를테면 요새 부쩍 맛있어지기 시작한 귤 하나를 주제로 삼더라도 과육의 신맛과 단맛의 절묘한 균형을 주제로 삼건, 수염이라 불리는 흰 내피가 가지는 쓴맛을 주제로 삼건 그건 자유다. 물론 이런 탱자 무리들은 껍질이 내는 고유의 향이 가장 첫째로 떠오를 테니, 그것을 무시한다면 좋은 실행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주제를 두고도 더 좋은 결과물은 있을 수 있다. 오늘은 그 주제가 밤이었다. 밤이 가진 많은 것들중에, 밤의 향이었다. 나무 밑동을 형상화했다는 외양은 나무의 질감까지 모사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외양과 내면의 맛의 내러티브가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손목에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갈라지는 단면을 두고 나는 오늘 두 시간의 여정을 보상받았다.

서울이 아니라 밤의 산지인 공주를 바로 곁에 둔 대전에서도 밤 자체를 다르게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두 명 정도일까? 작은 주방에 기대할 건 아니지만 사실 큰 주방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고 이것은 한국의 현실이다. 속껍질을 남긴 가공품(통상 서구에서는 이런 설정은 NG에 가깝고, 일본의 渋皮煮정도가 참고할만한 레퍼런스로 기능한다)과 종류를 고를 수 없는 것에 가까운 수입 가공품, 드는 손에 비해 얻는 것이 별로 없을 통상 가격대의 밤 정도에서 주방은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

풍성한 지방 위에 밤과 설탕을 때려붓는 대신 밤의 질감을 다변화하고 얇은 초콜릿을 덧댔다. 초콜릿은 모양을 만드는 용도였겠으나 하단의 매개체로부터 크림으로 이어지는 디저트의 질감의 흐름을 연결해주는 요소로서 훌륭하게 작동했다. 날이 가는 방향에서 살짝 어긋나게 부러지는 초콜릿 조각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한 두번정도 씹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지방이 전달하는 밤 향이 피어오른다. 이어서 구운 반죽을 무대로 해서 다시 과실의 신맛이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흔히 나무를 통해 예측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요소는 크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저 원통 모양의 잘 만든 케이크로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몽 블랑이라는 맛을 주제로 보았을 때에는 더 바랄 게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밤의 풍미가 주인공이 되지만 초콜릿과, 비스퀴 반죽과, 블랙커런트와 각각 어우러지며 돋보인다. 그 자체의 깊이 또한 가히 탐닉할만 하다. 그 가운데 질감은 가장 돋보이는 요소이다. 몽 블랑의 영혼은 부드러움이라는 점을 절절히 느꼈다. 그리고 트릴로지의 몽 블랑은 만족스럽게 부드럽다. 부드럽지만 맛이 묽지 않고, 부드럽지만 맛보기 전에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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