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0년 가을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0년 가을

가을에는 서양 요리를 써야지. 약 반 년여를 DINING 섹션에 아시아 요리 위주의 글만을 게재했다.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가 가장 실망스러웠다. 만족스러운 글이 많지 않다. 아시아 요리에 대해서 여전히 나는 아는 바가 너무나도 적다. 그렇다면 아시아 바깥은 뭘 그리 잘 아는가? 이 부분도 그다지 자신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부질없는 겸양은 이 공간에는 낭비이니..

「피에르 가니에르」는 서울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업하는 거의 유일한 업스케일 레스토랑이다. 이런 식의 작명을 한 레스토랑을 서울에서 보신 적이 있는가. 피에르 가니에르가 오랜 세월을 버텼지만 없다. 자신의 이름의 일부를 따거나, 약자를 딴 곳들이 있을 뿐이다. 「피에르 가니에르」는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레스토랑의 이름이 피에르 가니에르인가.

피에르 가니에르는 이름값에 비하면 소박한 와인 리스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와인 페어링을 선보이지 않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갈라 디너나 르 6 발작과 에스프리 피에르 가니에르로 메뉴가 구성되어있던 시절 등등 일부의 시간대에 페어링이 존재했던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가니에르의 공간에는 물로 버텨가며 식사를 하는 슬픈 장면들이 보였다. 그러던 여느날 새로 확인한 메뉴에는 페어링이 있었다. 쁘띠 에스프리에만 페어링을 제공한다라, 그렇다면 쁘띠 에스프리를 먹을 수 밖에.

방문 전

피에르 가니에르의 예약은 유선상, 온라인 어느 쪽을 통해서도 모두 가능하다. 별도의 예약금이 존재하지 않으며, 문자로 예약 확인을 받을 수 있다. 방문 전일 유선상 예약 확인 전화가 한 번 있다.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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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가니에르의 아뮤즈. 식전주를 곁들일까 싶었지만 짧은 코스에 알코올의 함량이 부담스러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나의 신체 한계를 식전주가 아닌 디저트에 쏟기 위해서 속된 말로 버텼다.
각각의 한 입 요리는 서로 다른 조리의 방식과 그에 따른 맛을 설계했는데,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요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복잡성에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말린 햄과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각각 동물성 단백질의 짠맛에 감칠맛을 그려내는데, 구제흐로 그려낸 치즈 쪽이 자연스레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발효로 얻는 식물의 발효의 나라인 동아시아에서 이 치즈는 매혹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쌉싸름한 맛을 절묘하게 녹여낸 구아바 쥬는 젤리를 더해 재미까지 잡아 그야말로 즐겁게 한다라는 의미에 부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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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물론 혀까지 사로잡는 쪽은 아뮤즈에서도 후반부였다.
큐민과 코리앤더 등이 내는 절묘한 향은 이제 피에르 가니에르의 레시피 내에서는 완전히 프랑스 요리의 맛으로 자리잡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길게 찢은 팡코로 튀겨내는 일본식의 튀김과는 다른 부드러운 튀김은 소스를 즐기는데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방식으로 중남미와 아시아를 연결한다. 잠깐이지만 가니에르의 요리가 지향하는 바가 스쳐 지나갔다.

역시 불만이 있다면 이스파한 소르베였다. 꾸준히도 나오고 있고 잘도 만들었다. 피에르 에르메에게 부끄럽지 않게 단맛 일색이지 않은 신맛이 있다. 그런데 왜 이게 여기서 쓰이고 있는가. 그라니타 위의 소르베라는 조리법의 자리만큼은 절묘하고, 역할까지도 적당히 수행한다. 아뮤즈의 여운을 잘라주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컨셉트에는 오류다. 가니에르의 요리 세계에 이것은 먹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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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채에 맞춰 나온 와인은 세미용 블렌드였다. 리스트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가운데 처음부터 데메테르 인증이 보이는, 투명한 와인이 등장한다라. 풍성한 꽃이나 풀 등의 향기가 있는 가운데 캐스크 숙성을 거치지 않은 것에 가까워 식전주에 가까운 뉘앙스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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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illa de pied de cochon, salade d’herbes iod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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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be royal et céleri en remoul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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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iole de Saint Jacques beurre marinière et caviar
와인은 그 자체로는 아슬아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세 종류의 아뮤즈를 만나서 테이블 위에서 완성된다.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바다이다. 차가운 요리는 없었지만 그야말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는 듯한 장엄한 풍경이 연출된다. 하나하나의 요리를 바라보자. 마그레브 요리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한 파스틸라는 가니에르의 손을 지나 해석된다. 파스틸라는 전체를 도우 안에 속을 채워 굽는 파이의 일종으로, 특별한 식사의 전채로서 마그레브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요리이다. 이것이 프랑스 요리에서 전채로 등장한다. 전적으로 그는 마그레브인들을 존경하여, 단순히 우겨넣지 않는다. 디스크 형태로 재가공된 반죽이 속을 감싸고 있지만 패스트리로 덮어 익혀내는 요리가 아니다. 파스틸라라는 요리의 요소들의 합으로서 형식을 취하되 조리법으로서는 새롭게 구성된다. 이 요리를 조리하는 요리사들은 파이를 굽지 않고 파이를 만들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랬나. 바로 굴이었다. 밀가루 반죽 위에서도 신선한 굴은 전체를 압도한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파스틸라인가. 팬에 한 번 다시 익힌 동물 젤라틴이 개연성을 부여한다. 말랑함(결코 쫀득함이 아니다)을 더하니 파스틸라로 익힌 듯한,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반전의 요리가 탄생한다. 완벽하게 반죽을 덮어 구운 요리의 질감이다. 그러나 그렇게 요리해서는 얻을 수 없는 굴의 향이 있다. 이러한 전체의 경험은 바로 피에르 가니에르 본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요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전형적인 가니에르이다.

마요네즈를 기반으로 한 소스에 버무려 냉채로 낸 게는 중심이 되는 요리에 비해 가니에르 스러움이 전혀 묻어나지 않지만, 커다란 라비올리는 절묘하게 잘 익혀내어 가리비 라비올리라는 도전을 말끔하게 성공해낸다. 각각의 요리는 명확히 바다의 맛을 가리키고 있으며, 결코 그 향을 잃지 않고자 조리하였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패류의 육수로 내는 소스를 응용한 버터의 폭격은 이러한 바다의 그림을 대서양 어디께로 확정짓는 듯 했다. 모든 향이 풍성하지만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팔레트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충돌은 와인이 씻어낸다. 전채를 통해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 바다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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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상으로 확인한 것과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조금 달랐지만, 샤블리의 퍼미에 크뤼를 낸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
앞선 와인과는 판이하게 다른 뉘앙스. 부드러운 팔레트에서 풍성한 시트러스, 미네랄이 돋보인다. 파인애플을 떠올리게 하는 과즙과도 같은 샤블리는 그야말로 대지를 품었다, 위대한 리슬링이 부럽지 않다. (감히 리슬링을 들이미냐는 프랑스인들의 주장은 사양한다)
젊은 빈티지와 젊은 나무. 우려스러운 지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사람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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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에 맞춰서 바게트를 이어 내는데, 바게트는 무수한 호텔의 클레임에 맞서 최소한의 바게트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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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caline de homard, girolles liées du corail
산호색 소스로 어우러낸 파스칼린은 이 날 식사를 하기로 마음먹게된 이유였다. 파스칼린. 이 파스칼린이라는 조리법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에스코피에의 <르 기드> 제4판 이외에 딱히 응용에 대한 기록도 없는 파스칼린은 가니에르의 요리 세계에서만큼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항상 그 모양은 디스크 형태로, 또 내는 형식은 항상 이렇게 층층이 쌓인 형태이다.

가니에르는 스스로가 밝히듯, 그는 요리의 전통을 예술로서의 요리, 즉 스스로가 개척한 새로운 요리 내에 위치시키고자 시도한다. 이 파스칼린은 그러한 맥락 속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뒤마가 기록하고 있는 전통 요리, 부활절의 양고기 요리, 이른바 희생양이다. 가톨릭의 전통에서 부활절은 곧 양고기 식사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양이라는 재료의 맥락이 아닌, 조리법의 맥락에서 파스칼린이라는 이름은 실마리가 있다. <그랑 라루스 요리백과>같은 서적을 참고하시라. 가니에르는 파스칼린으로부터 단백질을 다져넣어 일종의 반죽으로 만드는 과정만을 취했다. 통으로 된 고기는 이 조리법에서 과잉, 잉여로 본 것이 아닐까. 가니에르는 현대 조리도구의 힘을 빌어 아이디어만을 취할 뿐 완전히 새로운 요리로 만든다. 스터핑으로 쓰이는 대신 그대로 익혀내고, 칼로 다지는 수준을 넘어서 프로세싱된 랍스터는 크림, 우유에 녹아든다. 커다란 통다리와 같은 것이 시선을 사로잡는 대신 단아한 동그라미를 마주한다.
첫째 맥락이 프랑스 요리의 역사 속 파스칼린이라면 두 번째는 가니에르의 기지다. 여러분이 구글에 pascaline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시길 바란다. 수도 없는 바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가니에르의 재치가 돋보인다.
그래, 이름은 참 재밌었다. 그렇다면 맛보는 행위는 과연 당신에게는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인가. 잔열에 익혀낸 듯한 가재의 살을 마치 전시하듯 올려내어, 같은 재료의 중첩을 쌓은 요리는 한 입에 먹는 순간 왜 우리가 랍스터를 이런 방식으로 조리해야 하는지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그릇의 전체에 그 생명의 맛이 전부가 들어있다. 가장 먼저 와닿는 것은 소스로, 껍질을 지긋이 열에 변성시켜 얻은 산호색은 그 향을 느낀다. 그 다음으로는 디스크 모양의 무스와 랍스터가 간발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뭉개진다. 무스에서는 지방이 전달하는 풍미가, 살점에서는 손실되지 않은 단맛이 이어진다. 이를 통해 가니에르는 랍스터라는 식재료를 다변화한다. 랍스터의 각각의 맛이 서로 다른 물질상태로, 서로 다른 풍미를 그려낸다. 그러나 전체가 어우러져 다시 하나의, 한 마리의 랍스터가 된다.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가공했지만, 날것보다도 그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앞선 전채와 이어져, 마치 특정한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가니에르의 요리가 전달하는 것은, 랍스터의 초상화나 영정 사진이 아닌, 그의 진실함이다. 재료에 바치는 헌신이다. 하나의 생명을 요리하는데 결코 허투루 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그렇다.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이 파스칼린을 만든 방식이 짜내서 동그랗게 만들었다는 지점이다. 결이 있다보니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칼날이 개입하는 직선 외에도 추가적으로 덩이가 분해된다. 뚜르비용이라고 불러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가니에르의 다른 파스칼린들은 평탄하게 만들어지는데, 이런 모양은 의도가 아닌 구현의 에러에 가깝게 느껴졌다. 옥의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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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뜨 샬로네즈의 피노 누아는 짧은 코스에서 절정을 맡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마시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기대에 비해서는 아직 향의 복잡함이 덜 발달되었다- 식사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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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ôte de veau en cocotte parfum de terre, ragoût de racines d’automne, crème d’oseille meunière
마지막 요리가 다름아닌 피에르 가니에르의 상징과도 같은 "parfum de terre"였기 때문이다.
가니에르의 요리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그의 상징적인 요리를 모티브로 하여 스스로 재해석한 요리라는 것을 뜻한다. 무엇을 재해석했는가. 가니에르의 Parfum de terre는 에르메스의 떼르 데르메스를 요리로 승화한 그의 작품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물신(物神)적인 요리가 아니다. "와 비싸고 유명한 에르메스" 식의 접근이 아니다. 이것은 메종 에르메스와 가니에르의 대화를 연상케 하는 요리다. 그는 향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향을 맡은 경험을 개인화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다시 요리를 통해 보편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러한 일종의 '향을 요리한다'는 개념을 보여주는 셰프로는 다름 아닌 스페인의 로카 형제가 있는데, 이들의 요리는 이렇게 단순히 향수를 뿌리는 개념을 넘어선다. 떼르 데르메스를 모티브로 삼되 가니에르는 대지의 향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팬에 익힌 뒤 냄비를 향을 덧입히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눈앞에 요리가 담기는 순간 나무 계열의 향이 가을의 대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피에르 가니에르는 결코 장-끌로드 엘레나관심 없는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에르메스의 수석 조향사의 표절자가 아니다. 조향의 방식을 요리에 접목한 가니에르는 떼르 데르메스가 가진 시트러스를 소렐을 통해 변주한다. 향의 순서가 뒤바뀐다-떼르 데르메스는 탑 노트로 시트러스를 가져가고, 베이스로 나무의 향을 배치해 따사로운 대지를 묘사했다면, 가니에르는 이를 절묘하게 뒤집어 적막한 대지를 그려낸다. 그의 요리는 나의 마음을 적신다.
결코 불쾌하지 않은 비트가 따라붙지만 야채류는 가니에르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 점만큼은 애석하다. 당근까지 프랑스에서 건너올 수는 없는 노릇인 모양이다. 떫음이나 단맛이나 모두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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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ale de potimaron au raifort
단호박을 즐겁게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포 구조가 가지고 있는 연결고리를 가능한 전부 분해하는 것이다. 크림을 더한다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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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에르의 디저트는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다. 쁘띠 에스프리를 고른게 후회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니에르는 항상 프랑스 제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는데, 짠맛의 세계에서 그가 창조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언제나 그의 디저트에는 물려받은 것에 대한 사랑을 그려낸다. 블랙커런트를 그다지 손대지 않은 상태로, 퓌레라고 부르기도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깔아낸 위에는 꼬냑 향을 입힌 커스터드, 모카 초콜릿이다. 이 디저트를 먹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나에게는 디제스티프가 있으니. 가히 소테른을 위한 헌사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물과 먹는 이 디저트의 맛은 감히 상상할 자신이 없다.

소테른이 채워주는 단맛과 풍성한 건포도향과 블랙커런트, 모카 초콜릿 향은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신맛과 단맛이 고른 가운데 각개의 향을 한 입마다 다시, 또 다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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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나도 아슬아슬한 상태가 된다. 결코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글을 위해 촬영할 열정을 잃었다. 나는 바쁘다.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

리치와 샴페인, 앞서 아뮤즈에서 냈던 조합이지만 이스파한의 메시지를 빼니 그림은 자연스러워 졌지만, 신맛의 배치에 있어서 앞선 플레이트에 양보했으므로 딱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거품 형태와 소르베의 조화는 서울에서 종종 시도되지만 이것은 눈에 띄게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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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포도를 얹어 낸 아흘레뜨Arlette 쯤 되면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서울에는 존재하지 않는 디저트다. 가타부타 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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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소테른/토카이.
메뉴에 나와있는 소테른이 쇼트가 나서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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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에르의 디저트에서 가니에르 특유의 헌신이 모자랐다고 느낄 수 있다. 단순히 각 요소를 적당히 잘 하는 것은 가니에르의 모습이 아니니. 그러한 아쉬움은 미냐디스에서 깔끔히 해소된다. 녹차-생강-팔각의 3연타를 맞고나면 완전히 K.O.된다. 작은 마들렌은 낮은 온도에서 구웠다는 의견은-이제는 필요 없다!


총평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쁘띠 에스프리와 페어링 메뉴는 그야말로 피에르 가니에르의 Esprit을 구현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가니에르 방식의 요리가 유감없이 선보여지고, 대지의 향기 등 그를 상징하는 메뉴가 다시 등장한 것도 아주 즐거웠다.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는 전적으로 요리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요리는 탐욕의 제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데, 아무리 강한 불에 태우더라도 그 속에 사리만큼은 남아있다.

피에르 가니에르는 스스로 레스토랑을 여러 곳을 경영하기 시작한 이후 자신의 요리의 위치를 재설정했는데, 그의 요리는 언제나 간문화적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이제는 그래야 피에르 가니에르다. 이는 단순히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가니에르가 오픈한 뒤 홈페이지에 게시했던 요리는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파전'이었다. 가니에르는 프랑스 요리가 그 자체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님을 안다. 이탈리아에 빚을 지고 마그레브와 교류하며 러시아인들을 위해서 대접되기도 했던 게 프랑스 요리임을 아는 그는 세계 각지를 한 끼의 식사 안에 녹여낸다. 그러면서도 인간 피에르 가니에르가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의 요리는 엣저녁에 저 먼 발치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지나치게 서울적이라는 점만큼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이는 이곳이 롯데호텔에서 보이는 도심의 풍경 속에서 늘어지는 이야기이다. 피에르 가니에르 본인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화가 난다고까지 할 수 있다. 다시 <대지의 향기>를 보라. 코코뜨를 이용하면서 고기는 단순히 적절하게 익히는 데 그친다. 전채의 게살은 "남이 발라준~"류의 서울의 관행을 답습하고 있다. 가니에르도 직원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므로 어려운 시기 일정 부분은 손을 놓은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느 서울의 레스토랑과 같은 부분이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이는 모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로 내가 만든 모습일 것이다. 홈페이지부터 인터넷 곳곳에 피카소니 뭐니 하는 찬사로 칭칭 감겨있지만 아무도 예술가로 대접하지 않는 현실에서 가니에르는 자신의 요리의 심장부와도 같은 질감에 대한 목소리를 잠그고 말았다. 전채에서, 또 건조한 양배추에서 잠깐 번뜩일 뿐이다.

지극히 가니에르적이지만, 서울을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했다는 인상만큼은 작년에 이어 계속된다. 선택지도 많지 않고 선택을 하고 싶은 것도 많지 않다. 조리 인력은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객들은 여전히 고급 요리란 무엇이다라는 편견에 묶여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유튜브를 찍어서 조회수를 벌고 싶은 사업가들과 기념일을 행복하게 맞고 싶은 가족과 연인들을 위해 행복한 순간을 대접해야 한다. 이외에 서울에 남은 외국 귀빈들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니에르의 요리를 찾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없다. 다들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에는 관심이 없다. 차라리 그를 직접 만난 전 대통령들이 차라리 더 관심이 많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피에르 가니에르는 기왕에 도전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요소가 피에르 가니에르 본인의 최소 기준을 만족하고 있다. 애석한 점은 이러한 환경이 결코 최대의 피에르 가니에르는 만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COVID-19로 인해 매년 있던 가니에르 본인의 방한이 없었기 때문인지, 본인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아니 소망한다. 어려운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뭐가 어쨌거나 그럼에도 피에르 가니에르다.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대전기 이후 철학자들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한 최초의 요리사 대열의 일원이다. 이 도시에서 이런 요리를 하는 곳이 있으면 얼마나 있는가. <대지의 향기>를 보라. 장-끌로드 엘레나는 자신의 조향을 문학으로 승화하고자 하며, 피에르 가니에르는 그의 위대한 동반자로서 요리로 다시 이를 풀어낸다. 엘레나의 대지가 하늘을 바라보며 맡는 대지의 내음이라면, 가니에르의 대지는 한없이 고요한 숲의 그늘 아래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여정은 마치 프루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주의의 악취 속에서 프루스트는 20세기에도 인류가 문학하고 철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여러분과 나는 일자 무식의 요리 팬이지만 우리는 그의 마들렌을 알지 않는가! 물론 사실주의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은 여러모로 독한 냄새가 나는 도시이고, 가니에르의 빛은 결코 프루스트에 뒤지지 않는다.
여러모로 아슬아슬한 지점들이 있지만 가니에르의 요리가 보여주는 지점들은 적절하게 구현되어 있다. 즐길 수 있으니 이 도시의 맹공으로부터 침해의 최소성Erforderlichkeit을 만족했다고 하자. 생각이 있는 셰프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리를 한다. 가니에르의 팬보이로서 그의 아이디어를 비록 매우 타협한 버전이지만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적어도 요리가 소금을 뿌리면 짠맛이 나고 소고기를 내면 소 맛이 난다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는 가니에르만의 요리를 목격하라. "왜 우리는 요리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요리를 먹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공간이다. 오트 퀴진의 방식을 빌어 가니에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분위기: 만족스러운 테이블 간격. 비즈니스를 위한 공간은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홀은 식사에 몰입하기에 큰 장애는 없다. 가니에르의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조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돋보이는 공간만큼은 여전.

서비스: 피에르 가니에르의 직원 사랑이 묻어난다. 가니에르가 후학을 양성하는 곳은 주방 뿐이 아니다. "최소 피에르 가니에르"는 서울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뜻한다. 기준이 한국의 서비스가 기준이 아니라면. 소믈리에가 아니더라도 와인에 대한 상담이 가능하며 접시를 나르는 직원도 가니에르의 요리법에 대해서 적절한 답을 할 수 있다. 기념일을 만끽하고픈 가족들에게, 매니악한 식객에게 각각 걸맞는 친절함이 있다. 인간적으로 따사로운 것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프로패셔널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다만 서비스 인력의 절대적 숫자가 모자라 보인다.

가격: 가니에르를 표현한 요리는 17만원 부터. 34만원까지 있다.

  • 본인은 개인 자격의 식음 10% 할인 혜택을 이용하였다.

음료: '스페셜 오퍼'는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르도가 과연 주문 가능한가의 영역에 머무르므로 본심은 부르고뉴와 론에 있다. 공식 페어링의 경우 중요한 순간에는 무조건 부르고뉴를 택하는 지점이 인상적.
디제스티프에 정중한 예를 다하는 점이 나에게는 매우 사랑스러운 지점이었다. (다시 위를 올려 사진을 보시라.) 소테른에 걸맞는 디저트, 디저트에 걸맞는 소테른이 있다. 과거에 존재하였던 돔 페리뇽 빈티지의 글라스는 없어지고 페어링이 생기는 등 전반적인 운영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를 지켜보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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