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멘 다이야 - 완탕의 무게

라멘 다이야 - 완탕의 무게

여러모로 자주 먹는 라멘에는 토핑을 추가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단 한 번'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두 개의 달걀이 올라가 우스꽝스런 이 한 그릇이 그랬다. 개인적인 이유로 적어도 건대 어딘가가 일상의 공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각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었다. 완탕의 감각을.

요리하는 스스로가 맥락의 존재에 대해 가장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요리의 이름은 그냥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소 당황스러운 시각 효과까지 더한 입간판이 "완탕 라멘"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한다. 만드는 이도 먹는 이도 알고 있다. 서울에서 완탕과 라멘은 섞이지 않고 다른 세상에서 어색하게 동거하고 있다는 것을. 훈툰멘을 비롯한 중국 동남 지방의 요리들이 직간접적인 라멘의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서에서 동으로, 또 동에서 다시 서로 거치는 과정에서 요리의 역사적 맥락이 단절된다. 서울에서 스스로를 홍콩, 심지어는 광둥 요리의 일부를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곳들이 더러 있지만... 어쨌거나, 라멘에 완탕은 본래 낯선 조합이 아님에도 이곳 외에는 딱히 둘을 한 그릇에 담아내고자 하는 경우가 없다.(예외들은 있다-여기서는 그러나 그것이 유의미한가?) 그런 상황에서 이 요리는 "완탕이 들어간 라멘"이라는 정체성을 축으로 이해되고, 또 만들어질 수 밖에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한 그릇의 맛을 미분하는 행위는 대부분의 경우 무익하다. 좋고 나쁘고를 논하는 것이 어떠한 변화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완탕의 위치를, 단지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 특이한 무언가라는 자리로부터 전이시키기 위하여, 글을 쓴다.

완탕이 들어간 국수 요리에는 어떠한 합리성이 있는가. 중국에서는 가는 국수를 곁들이거나 국수를 더하지 않고 칭탕에 가까운 국물에 완탕만 말아서 먹기도 한다. 차슈까지 갖추고 있는 입장에서 만두가 사족으로 머무를 수도 있다. 그러나 차슈가 양념에 재워지지 않은, 이런 형식으로 제공될 경우에는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차슈가 담아야 할 단맛과 짠맛의 자리가 완탕으로 옮겨가고, 그 사이에서 차슈와는 다른 특징들이 부각된다. 다진 고기일 뿐 아니라 보통 새우와 같은 것을 함께 뭉치므로 다른 맛의 풍경을 연출할 수 있고, 접시를 들고 국물을 마시는 라멘에서 장식에 가까웠던 중국식의 숟가락이 완탕을 받쳐줄 사이드킥으로 격상된다. 그러나 거쳐가야 할 지점은 있다. 바로 밀가루의 중복이다. 완탕의 핵심인 피를 어떻게 빚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중화 요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국물에 삶는 방식으로 연출될 완탕의 피는 가능한 얇아야 하며, 글루텐이 잘 느껴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것이 좋다. 흔히들 면은 단단하게, 만두는 부드럽게软面饺子硬面汤라는 말을 한다. 보통 속이 곱게 다져져 크게 많이 씹을 필요가 없으므로 장단에 맞추어야 피를 포함한 맛의 균형이 입안에서 흐뜨러지기 않기 때문인데, 이는 라비올리같은 요리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다. 파인 다이닝의 레벨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단 한 명이 요리하는 공간에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좋은 길일 가능성이 높다. 얇은 피는 적어도 배신하지는 않는다. 완탕은 그랬는가. 충분히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일인 군단을 자처하는 영업의 상황에서 반죽을 한 번 더 밀어내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스스로 설정한 상황이므로, 어쨌거나 완탕의 소는 다소간의 피의 두께로 인하여 경험으로부터 유리된다.

오히려 경험의 축을 온전히 잡고 있는 것은 국물이었다. 한 그릇 안에서 완탕-국물과 면-토핑-국물의 경험을 어우를 수 있는 국물은 충분한 감칠맛으로 맛보는 즐거움을 붙잡고 있었다. 기타 수비드로 동양적인 조미료의 향을 입혀내지 않은 차슈와, 간장과 단맛을 담아낸 달걀과 같은 것들을 비롯한 전체적 인상은 더할 나위 없는 간결하게 좋은 라멘 한 그릇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땅 위의 면 요리가 어떠한가. 한 그릇에 구 천원, 만 원을 주고 받는 그릇 위에 기분나쁘게 올라간 차게 식은 달걀은 철분과 황화수소가 결합하여 불행한 색을 띄고 있지 않은가. 한 그릇의 요소들이 모두 적절한 온도 위에서, 적절한 맛을 가지고 있다. 뭘 바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 스스로 "완탕"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가 감히 짐을 짊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다. 완탕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완탕 라멘이 있다. 그래서 완탕에 대해 계속하고자 한다. 완탕의 두 번째 측면이다. 피의 두께가 첫인상이라면 그 다음은 완탕의 밸런스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맛의 구상을 논해야 한다. 광둥이나 광시 요리의 완탕은 그 자체로 완전체를 지향한다. 부드럽게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밀가루의 비중이 적절한 수준이 되어 완탕을 씹는 데 있어 맛의 탈것종종 영미권에서 vehicle이라는 표현을 쓴다. 타코의 토르티야나 케이크의 파트 사블레를 떠올려보라의 역할을 해야 하므로 길쭉하게 날개나 치맛자락같은 부분이 생기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큰 불만이 없었다. 자체로 먹을 수 있고, 먹어도 좋은 정도였다. 여전히 피의 두께가 국물이 가진 맛이나 지방의 두께에 비해 살짝 두텁다는 생각은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논리적이다. 다만 그 결과로서, 목표하는 맛이 무엇이었는가. 다진 고기와 새우 정도인가. 그 지점은 매우 우려스러웠다. 전형적이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완탕이다. 완탕의 소는 결국 이 완탕이 어떤 완탕인가를 결정하는 주제이다. 보편적인 일상의 요리 문법에서 흔히 발견되는 형식이 아닌가. 밥 위의 생선회, 토르티야 위의 다진 고기, 빵 사이의 패티, 그리고 피 속의 소다. 지나치게 무던했다. 적절한 단맛을 가지고 있지만 놀라운 것은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가히 요리사에게도 물음표만이 남는 재료라는 생각이 드는 무취의 새우. 세부적인 종까지야 모르겠다만 간편함을 위해 자숙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가공품처럼 갑각류의 향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진 고기를 먹기 위해서였는데, 스스로 잘 만든 차슈가 있다. 다졌다는 점, 야채가 조금은 섞여 들어간다는 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고민해보아야 한다.

글을 쭉 톺아보니 마치 불행한 완탕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과분한 한 끼 식사였다. 가까운 곳에서 떼우는 끼니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입장 전부터 주문과 결제의 순간까지 반복되는 완탕이라는 단어의 반복을 보고 나니 완탕에 대해 조금은 진지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서울에서 비견되는 요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완탕이 없는 라멘으로 하여금-완탕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요리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닌가. 그러한 측면에서 과연 이 완탕은 성공적으로 다른 라멘들을 "접시의 일 부분이 비어있는" 것으로 밀어낼 수 있는가. 피의 개선을 논하지 않더라도 완탕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게 완탕의 재미 아닌가. 미국을 무대로 하는 마틴 얀같은 세프는 완탕에 미나리나 청경채같은 야채로 중화요리의 정체성을 불어넣고 홍콩에서는 어묵 비슷하게 소를 채워넣는 것도 흔한 모습이다. 여기가 중국은 아니므로 피쉬 소스나 고수같이 좋은 걸 구하기 불가능한 재료를 쓰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이는 일종의 불가항력에 가까운데, 다이야의 주방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충분히 좋다. 왜 그런가, 스스로를 중국의 요리라고 칭하는 고급 중식당들의 윈툰들의 꼴을 보면 알 수 있다. 허영심을 채워줄 트러플이나 송이같은 것만 넣을 줄 알지 지긋지긋한 새우 러시에 소스 하나도 만족스럽게 곁들이는 경우가 잘 없다. 라멘집이 그들에게 완탕 만드는 법까지 가르칠 수는 없고, 이러한 상황에서 라멘집에서 배울 곳도 없다.

첨언하자면, 음료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의도라면 의도인 대로 의문스럽고 아니라면 더욱 의문스럽다. 음료가 웰치스 스파클링밖에 없다. 이건 무슨 구성인가. 있으므로 주문해서 곁들였지만 정말로 알 수 없었던 한 잔이었다. 무안한 수준으로 들어있는 과즙을 제외하면 합성향료와 무식한 단맛을 가지고 있어 단맛에 감칠맛의 켜가 올라가는 본인의 요리에 걸맞는 선택은 결단코 아니었다. 차라리 같은 탄산음료였다면 사이다정도만 되었어도 달랐을 것이다. 대체 왜 웰치스인가.

게시글에 대한 최신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