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즈 - 작은 케이크 가게

르누아즈 - 작은 케이크 가게

르누아즈에 가게 된 것은 본래 이 가게의 생토노레 때문이었다. 퀘벡이라는 이름처럼 북미를 원산으로 하는 메이플과 피칸을 이용해서 맛을 낸 것인데 생토노레 자체가 서울에서는 드문 종인데 나름대로 재미까지 곁들이니 굳이 찾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날,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특정을 방지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일몰로부터 제법 여유가 있었다) 이 생토노레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피스타치오(아마도 BABBI사의)로 만든 타르트와 이른바 프레즈-여러분은 프레지에라는 이름에 대해 한 번이라도 의심을 해보셨는가? 무슈 르노트르는 이런 이름을 붙인 적이 없다-가 자리했는데 과연 여러모로 생각을 깊이 하게 만드는 하루였다.

가장 작은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두 케이크의 경험이다. 피스타셰(피스타치오)는 바닥이 다소 무르고 말끔하게 마감한 표면이 먹을 때에는 지방이 엉겨 층을 이루는 듯한 감각을 주어 미묘한 감이 있었지만 단맛과 그을린 피스타치오의 향이 썩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딸기 케이크는 날것의 딸기가 아니라 달도록 잘 절인 데 더해 바닐라향이 중간 즈음부터 다가오는 경험이 썩 감각적이었다. 열과 바닐라로 유지방의 향을 다스리는 데에는 여지가 있었지만 국내의 유제품 여건을 감안하면 과실로 지적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케이크는 적당히 먹을만 했으니 해피엔딩인가.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분명히 르누아즈의 케이크는 모자라지 않은 기능성에 더불어 어쩌면 작은 가능성까지도 품고 있다. 그럼에도 상황을 낙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기술보다는 나머지이다.

문제는 바로 작은 가게라는 설정 자체에 있다. 매장의 뒷편은 가려져 있지만 넓을 수 없는 구조이고, 자연히 만드는 사람도 설비도 적다. 가끔 이렇게 괜찮은 아이템이 생기면 매진을 면치 못하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제품의 가짓수나 절대 개수, 탁자 갯수까지 줄여가더라도 가격을 올릴 수 없는 현실에서 판매자가 으레 선택하는 전략은 이러한 위험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작은 가게의 작은 케이크 가격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환율에 따른 편차를 감안해도 제과학원을 졸업한 것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도쿄나 파리의 파티시에보다 적게 받는 가게가 없는 수준이다. 이곳 역시 KRW 8000~9000의 가격대로 이러한 문제를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품의 기술적 수준은 결코 높지 않다. 생산의 환경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다. 하나씩 완성하는 것이 아닌 단계별 공정을 진행하여 배치 단위로 완성하는 것이 프티 갸토의 생산 방식이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고 장비가 넉넉하지 않을 수록 공정 추가에 대한 부담은 커진다. 제작자의 감각이나 경험에 대한 문제는 그 다음에나 논해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논의의 실익도 없기 때문이다. 피로함이 느껴지는 서비스는 덤이다. 초단기공간임대업으로 운영되는 많은 카페를 제외하더라도 카페의 경험은 비단 케이크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간, 음료, 서비스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이런 가게의 설정은 이것을 위태로운 단계로 몰아넣는다. 수입산 블렌딩 차가 가격대의 격을 맞추지만 거름망이나 시계도 없이 달여먹어야 하는 차의 설정은 열악하며, 목소리에 배어있는 피로의 기색은 이미 역력하다. FoH의 일이 전부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단순한 해결책으로는 역시 케이크 가게라도 최소한의 규모를 갖춰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나름의 창작품을 팔아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생산자라면 이러한 규모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재고와 영업시간의 확보는 신뢰를 넘어선 이 업의 본질, 호스피탈리티의 문제이다. 피에르 에르메 등 유명 파티셰의 매장에 가면서 재고가 없을까 발걸음을 서두르는가? 물론 소량으로 정교하게 만들자면 끝도 없이 까다로워질 수 있겠지만 제과에서 빛나는 건 그러한 손기술이 아니다. 카렘의 시대부터 요리는 회화보다는 건축에 가까웠으며 지금도 그렇다. 작품의 핵심은 설계도와 그에 비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자본금이 부족한데도 너무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런 예외를 현실에서는 발견한 적이 없다.

언젠가 한 번 해본 것으로 지나갈 창업이라면 괜찮은 걸까? 위에 언급한 모든 문제는 합쳐져 작은 케이크를 일상이 아닌 컬트의 영역으로 위치시키고 있다. 일상은 커녕 간식 개념의 빵에게도 밀린다. 최소한 빵집은 '빵지순례객'을 받을 하드웨어가 갖춰져 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 아닌가. 제품의 질에 대한 논의는 그 다음이다. 궁극적으로 이 시장은 소비자를 향하고 있지 않고 만드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작은 극장처럼, 객석의 관객 중 상당수는 사실 업계 사람들이다. 뜨거운 우정인가?


  • 원래 이 글의 제목은 '슐레지엔의 직조공'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대폭 삭감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은 슐레지엔 직조공들과 파리에서 안 살아본 사람이 없는 서울의 파티셰들의 처지가 같다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