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레시먼트 - 한식, 한식 디저트, 디저트

리프레시먼트 - 한식, 한식 디저트, 디저트

각설. 음식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렇게 쓰려고 했다. 무수한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이곳을 방문하기로 작심한 것은 오너의 인스타그램 포스트를 본 이후였다. 그의 문제제기는 통렬했다. 잔인하리마치 진실이었다. 부분을 인용하는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전문을 인용한다.

그리고 작정한 냉동 디저트 두 개와 시그니처라고 하는 타르트, 거기에 페어링할 수 있도록 안내되어있는 와인까지 간식 한 끼에 일반적이지 않은 비용을 지출했다. 그리고 다시 무수한 고민에 빠졌다. 인스타그램에서 오너가 벌인 논쟁도 보았고 3개사(카카오, 네이버, 구글) 지도의 사람들의 반응도 빼놓지 않고 읽어보았다. 그리고 역시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쑥 아이스크림

그의 인스타그램 포스팅 이전에도 나는 이곳을 반드시 가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이 쑥 아이스크림이었다. 그냥 아이스크림이 새로 나오면 어지간해서는 먹어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때문에 간 곳을 모두 올리지는 않는데, 확인을 위해 먹기는 하지만 이야기할 거리가 없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막대 형태의 아이스크림이 오와 열을 맞추어 썩 넉넉하게 진열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곧바로 반쯤은 기대가 사라진다. 두터운 단열재 속의 포제띠가 아니니까. 이런 차원의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다만 이 막대기 꽂힌 아이스크림을 통상 만드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믹스를 만들고, 몰드에 부어 얼린 뒤, 그 얼음덩이를 껍질이 될 액체에 푹 담그어 다시 얼린다. 틀에서 모양이 완전히 굳히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그것을 감안한 질감을 설정했으리라 예상하기는 어렵다.

KRW 3900, 아이스크림 두 가지 맛을 고르는 컵을 생각하면 무심해도 좋을 가격이다. 쑥을 아이스크림으로 내는 것 또한 이미 서울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지방이 풍성한 젤라또부터 비건 옵션을 충족하는 종류, 공장제 기성품까지 그 안의 다양성은 이미 풍성하다. 그곳에서 이 아이스크림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결함을 읽는다. 서걱서걱함이다. 아이스크림의 카논에서 결코 그 절대성을 잃지 않는 것은 언제나 비단과 같은 질감인데, 이가 수직으로 운동에너지를 불어넣는대로 이미 형성하고 있는 결을 따라 마치 빙산이 무너지듯 갈라졌다. 이 아이스크림은 모양을 얻고 질감을 잃었다. 근현대에 무언가를 만든다는 데 있어서 이런 일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s follows function)고, 이제는 이 테제도 극복되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형태를 기능에 맞게 창조한 사례로는 역시 허먼 밀러의 에어론을 떠올려보라. 그 외형에는 오로지 장시간 사무노동에 적합하기 위한 기능만이 보여지는 그 의자는 새로이 떠오른 IT 기업들의 막대한 지지를 업고 실리콘 밸리의 사무실을 정복했고, 고풍스러운 가죽 의자와 함께 고전적인 기업의 경영방식도 몰아냈다. 세상은 가죽을 추앙하는 대신 월가에서도 에어론을 구매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무언가의 외형을 정한다면 방향은 항상 이런 방향이어야 한다. 아주 새로운 형태를 탄생시키는 것이 과제가 되어가는 오늘날 형태를 연출하기 위한 기능의 포기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스크림은 시각과 미각으로 경험했을 때 명백히 형태가 앞서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다음은 <생맥산>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생맥산부터는 시각 자료를 준비하지 않았다. 초가 지남에 따라 질감의 변화가 경각을 달리는 것이 이런 디저트류이므로 기계를 주물럭거리는 순간은 최대한 짧아야 한다.

한약의 일종을 디저트로 재창조했다는데, 앞선 쑥 아이스크림과는 달리 이러한 주제의 설정은 일견 훌륭하다. 일단은 이 서울에서 어쨌거나 존재하고 있는 음식인데 아무도 그 맛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던 종류의 물건이니까. 레스토랑의 <이보생맥산>의 유산이니 뭐니 하는 맥락을 다 제외하고도 한약의 맛이라는 주제도 이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나는 듣고 싶은 사람이다.

그라니타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거시기한 얼음 알갱이를 한껏 깔아내고 아이스크림에 다시 일종의 겔까지 올렸다. 이러한 질감의 구성은 자연스레 겔을 탑노트로 풀어낼 것 같지만, 얼음알갱이와 함께 뒤섞인 꿀이 탑노트를 지배한다. 그 다음은 아이스크림에서 새어나오는 미세한 맛이 따라서 큰 얼개를 그린다. 얼음 알갱이가 맛을 더하지 않는 주제에 입안에서 오래 잔류하므로 전체적으로 맛이 쉬이 희석되는 맹점이 있는 가운데, 생맥산의 풍미 하면 떠오르는 익은 과실의 신맛이나 뿌리나 덩굴의 맛은 크게 떠오르지 않는다. 한약 특유의 향을 상징하는 당귀나 천궁같은 재료가 부각되는 방향은 아니고, 그러한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가운데 풍미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서구의 고전적인 손을 빌었다. 아이스크림의 질감이 미묘하게 좋지 않다는 인상이 이어지지만 많은 양이 아니었으므로 유보한다. 전체를 즐기는데 큰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며, 올린 허브와 잣 등이 개입은 절묘하여 한 컵이 지루하지 않다는 것은 영리한 설계.

하나의 완성된 디저트라고 보았을 때는 감히 완성되지 않았노라고 본다. 첫째로는 다양한 질감을 구현하고자 시도했으되 전체를 어우르는 매개체vehicle의 부재다. 크게 보아서 젤로 구현된 생맥산과 조청이 지배적인 풍미를 이루는, 크게 복잡하지 않은 컵 형태의 디저트지만 매개체 없이 물로 빚은 그라니따는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여, 제과에 있어 반죽의 역할의 자리가 비어있어야 할 이유는 느끼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끈적한 액체부터 얼음 알갱이까지 이어지는 질감의 복잡성을 구현하고자 시도한 것은 높이 사나 취식 과정에서 어스러지므로 도로아미타불이다. 부피의 분배에 있어 겔이 가지는 비중에 비하여 풍미에 있어 겔은 짙은 풍미를 내기 어려우므로 아이스크림과 겔 사이에서 혀는 방황한다. 잣을 맛보는 순간에는 잣이 전체를 순간적으로 아우러주며 다양한 풍미가 입안에서 복잡하게 어우러지는 높은 수준의 경험이 일어나지만, 잣이 사라진 뒤에는 녹는 부드러움과 씹히는 부드러움 사이에서 명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크림은 절대 안돼"라는 문장이 디저트를 옥죄고 있는 인상이다.

"질감의 대비"는 즐겨 쓰는 어휘지만 그것은 카논에 적혀있지는 않다. 오로지 부드러운 것들로만 이루어진 디저트, 혹은 음식도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무수한 얼음 알갱이들이 그것을 가로막으므로 이것은 문제가 된다. 먹지 않으라고 하기에는 좁디좁은 포크는 퍼올리는 역할을 하지 않으므로 자연스레 스프를 먹듯 잔의 끝에 전체를 모아 긁어 올리게 되고, 얼음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처음부터 둘레까지 가득 채우지 않은 형태임을 감안하면 이렇게 취식하는 것이 의도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균형감각이 대단하지 않은 입장에서 한 입 한 입이 진행될 때마다 균형이 무너지는 것 또한 경험해야 했는데, 이러한 불균형을 감싸줄 Airy한 무언가의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지나치게 전형적인 컵 형태의 디저트만의 시각을 관철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도 해보았지만 역시 이러한 생각을 바꿀 일은 적은 듯 하다. 크럼블이나 크림의 부재는 뼈아프다.

마지막으로 <흑윤>이다. 조선시대 서적에 올라온 요리를 부활시키겠다고 하는 그 포부에 나는 감동했다. 이미 우리는 그런 19세기~20세기 서적의 부활을 본 블로그에서 몇 번 목도했다. 나는 이 조선시대 서적 중심의 한식의 고급화라는 방향을 결코 반기지 않지만, 그것은 그것이 단지 옛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맛 이외의 무언가로 자꾸 지배를 하려 들기 때문이다. "왕이 먹었다"같은 것은 어떠한 요리가 고귀해야 하는 이유중 가장 끔찍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맛이 잊혔음에도 그것을 다시 찾아내야 할 만큼 훌륭하다면 나는 감동하고 그 맛을 흩뿌리고 다닐 준비도 되어있다.

먼저 그 원본을 알기 위해 찾아보았으나, 근래 번역되었다는 책을 단지 이 한 요리를 위해 구매할 정도의 의지는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뒤를 보았다-<흑윤>은 <황윤>, <백윤>과 일종의 시리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더해 그 레퍼런스로 제시된 <임원경제지>외에는 그 어디에도 흑윤(黑閏)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없었다. 민중부터 왕까지 당시의 사람들 중 누군가 먹었다면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단 한 권에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원인을 말해보자. 이 흑윤은 한국 요리가 아닌게 아닐까. 한국 서적에 있지만, 생각건대 이건 바깥 문화권의 요리일 수 있다. 저자가 <정조지>에서 60번 인용한조송식. (2016). [임원경제지] 에 나타난 서유구 (徐有榘) 예술론의 체계성과 특징-명말 고렴 (高濂) 의 [준생팔전 (遵生八箋)] 과 비교를 통하여. 미학, 82(3), 39-88. 명에서 작성된 <遵生八箋>이라는 책에 이 의문의 요리가 등장 먼저 등장하는데, 그 간격을 매울 만큼 조선시대 문헌에 전승된 기록이 없다. 서유구가 태어나기 백 년하고도 오십년 전 중국에서 작성된 이 책의 흑윤, 황윤, 백윤이 세기를 건너뛰어 갑자기 부활한다. 생각건대 그 이유는 이 책이 민중사, 혹은 궁중사 어느 쪽이건 실생활에 있는 것을 기록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애초에 이 책은 전형적인 한국 요리만을 기록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요리는 다 기록하려고 도전한 사전이다. 당장 흑윤의 다음으로 넘어가면 가수저라, 즉 카스텔라가 나온다. 가수저라는 다른 문헌에도 여러번 등장하는 틀림 없는 카스텔라다. 카스텔라를 조선시대 전통 한식이라고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면 흑윤도 외국 요리가 아닐 이유는 없다. 심지어 흑윤은 그 어떤 보충하는 기록도 없는데, 정조지에서 언급하는 오미갈수나 숙수 등 음료들은 쉽게 교차확인이 되는 것과는 큰 차이다. 거기에 준생팔전과 정조지에는 3윤 뿐 아니라 송자해, 와사, 교맥화, 설화수도 겹친다.

갑작스레 이야기가 <흑윤>이 한국 전통 요리가 맞느냐에 대한 방향으로 흘렀는데,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단지 이것이 조선에서 발간된 책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맛이 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정조지>를 읽었더라면 가수저라도 봤을 것이다. 그것도 선택지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흑윤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보았어야 한다. 흑윤은 김치가 될 수 없다.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추억이나 문화적 경험까지 떠올리게 만드는 종류의 음식이 아닌, 인지절차를 거쳐 비로소 가족이 될수 있을지도 모르는 낯선 남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맛은 반드시 높은 수준에서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신선로에서, 구절판에서, 비빔밥-골동반-에서 그 실패를 느껴왔다. 나는 그 반복을 바라지 않는다.

<준생팔전>은 원문이 무료 열람이 가능하기 때문에(비록 그 시대의 중국어지만), 나는 단지 <준생팔전>의 흑윤만을 알고 있으므로, <정조지>의 흑윤이 어떤 조리를 제시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준생팔전 흑윤은 흑설탕이 주제가 되는 디저트다. 설탕이라고 하면 아마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준생팔전의 삼윤은 백설탕, 흑설탕 그리고 캐러멜이 각각 주제가 되어, 이것을 당로라는 것과 함께 불에 은근히 녹인 뒤 볶은 밀가루와 섞어 만든 반죽을 코끼리 눈 모양으로 빚는 요리다. 당로는 우유에 설탕을 넣고 은근히 졸인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못참고 이 원고를 구겨넣고 발품을 팔아 <임원십육지> 정조지를 손에 넣었다. 원문을 확인하고 나는 좌절에 빠졌다. 허탈함. 바로 같은 요리가 맞았다. 참고문헌으로 당당하게 준생팔전이 인용되어 있지 뭔가. 매우, 매우 허탈했다. 교차할 수 있는 문헌도 하나 찾았는데 그것도 똑같이 준생팔전을 인용하고 있었다.

「리프레쉬먼트」의 흑윤의 재료를 살펴보면 이 준생팔전 흑윤과 크게 겹치는 가운데 주제의식만큼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검은 비스퀴가 시각을 사로잡지만 이른바 흑당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풍미가 지배적이지 않은 대신 가장 먼저 와닿는건 오히려 익숙한 초콜릿이다. 놀라우리만큼 초콜릿만이 존재하는 가운데 개념을 푸는 열쇠는 매콤한 감각이다. 통상 초콜릿이나 견과 등이 제공할 수 있는 견과의 풍미와 같이 초콜릿과 이어질 수 있는 흔한 풍미의 짝이 모두 사라진 조선의 책 안에서 찾아낸 해결법이었을 터이다. 적절히 어울린다. 다만 이러한 구속구들이 수백년의 시간으로 우리를 구속하려 할 때 결국 디저트는 단지 불완전한 것으로 밝혀진다. 달걀과 크림의 부재에 명나라는 답이 될 수 없다. 여러가지 더한 풍미들이 베이스 노트의 단계에서 디저트의 인상을 개선하지만 지방이나 반죽의 풍미 등이 일부 결여되어있는 상황에서 근본적인 해답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놀라운 지점은 질감이다. 타르트인데 끈적하다. 흑윤을 떡으로 부른 만큼 떡의 질감을 모사한 것인지, 반죽을 가르면 안에 채운 것이 칼끝에 따라나오는데 정말 마치 떡을 만든 듯 했다.
그렇다면 왜? 밀도 높은 탄수화물을 탄수화물이 아닌 것으로 모방해낸다. 끈적임을 무마하고자 엄청난 양의 당로 크럼블이 구강을 배회하는데, 통상 타르트에 올라가는 크럼블들이 가지는 맛을 가지지 않은 당로는 그 역할을 온전히 모사하지 못한다. 타르트와같은 전형적인 형태의 요리를 연출하면서 질감에만 엄청난 회전을 걸었다.

전체적으로 풍미를 통해 주장하는 바가 또렷하고 그것이 의도의 산물이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합목적성에 대해서는 유보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다양성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재료의 운신의 폭, 혹은 특정한 재료의 조합에 대한 인상을 넓히겠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요리는 재료의 합 이상이어야 하며, 그 통로는 언제나 맛을 거쳐야 한다. 맛에 앞서는 목적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되어야 한다. 마트 냉동고의 하겐 다즈보다도 모자란 가짓수의 케이크들만을 가지고 놀아야 하는 비극적인 과자의 도시 서울에 대한 문제제기에 매우 동의하고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이것이 만족스러운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요리를 재료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재료만능주의와 생맥산의 고향인 한약방에서 터져나와 이 나라를 삼켜버린 식재료 효능우선주의의 고약한 망령으로부터 맛을 구해줄 줄 알았는데.

  •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신라호텔 애플망빙"을 연상시키는 망고 케이크도 보았다. 그것이 한식이 가야할 길에 등장하지 않을 이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