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 제면소 - 중요한 실행

부엉이 제면소 - 중요한 실행

쾌창한 날이었다. 인연이 별로 없는 강서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지만 결심은 녹지 않았다. 가양이라고 했던가.

혹여나 이 도시의 옛날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비단 서울 뿐 아니라, 문명의 혜택이 가장 흐리게 닿던 곳에서 희망의 빛이 되주는 맛이 있었다면 그게 나에게는 생선이었다. 등 푸른 생선과 흰살 생선이라는 분류 사이에서 어느 쪽도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날은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연어나 참치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여전히 이 바다의 뻔한 고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게 등 푸른 생선이다. 청어, 꽁치, 삼치, 한식에서는 잘 먹지 않지만 전갱이나 정어리, 살림살이가 좋을때는 커다란 삼치가 또 그렇게 탐스럽다. 등 푸른 생선들은 바다의 생태계의 핵심으로 우리를 비롯한 포식자들을 살찌웁고, 또 대양을 횡단하며 그야말로 탄탄한 맛의 농도를 갖추고 있다. 다른 쪽에서 사랑받는, 버티기 위한 지방질로 무장한 심해어들과는 동거를 거부한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의 삶 속에 등푸른 생선의 자리는 생각보다 비좁다. 가장 먼저 쫓겨난 생선은 청어였을 테다. 나쁜 것까지 옛스러운 곳들에서나 스끼로 청어를 낸다. 가시까지 전부 품고있는 지독한 형태의 청어구이지만 또 그런게 그리울 때가 있다. 청어의 맛이 좋은 계절에는 더욱이 생각난다. 그 다음은 고등어일까. 길바닥에서 사먹는 고등어는 눈에 띄도록 맛이 없을 때가 잦다. 다른 등푸른 생선들도 다 마찬가지지만 이름이 같다고 맛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흔한 것이기에 방치하는 수준의 조리도 이러한 죄악에 한 몫 거든다. 딱히 생선에 관심이 없는지 종류도 다양한 고등어지만 철에 맞게 나오는 경우가 드물기에 단가를 타협하지 않는다면 대서양의 냉동 고등어가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선택지이다. 그러나 당연히 좋은 환경에서 접할 수 있는 우리 고등어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하기 어렵다.

생물로만 유통되며, 잡다하게 뒤섞이는 가운데 선별하는 눈이 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럼 고등어를 먹으려면 전국민이 고등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또, 그렇지 않다.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내 점심 한 끼는 바다의 위대함을 느끼고자 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가기 위해서, 한 시간여의 허용된 일탈동안 고민을 잊기 위해서. 마주한 이와의 시간을 소중히 하기 위해서. 그게 도시인의 점심밥이다. 열정적인 취미인의 고상한 설명보다 쌓일 만큼 쌓인 지혜의 손길이 더욱 절실하다. 시장에서도 고가에 낙찰되는 대물 고등어가 아니라, 지루하고도 푸석한 고등어의 살결을 살려줄 인간의 힘이 필요하다.

그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게 옛 시절에는 건조였을 테다. 반건조 생선은 서울에서는 거의 접할 수 있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수준이지만 생선이 뭍에 나오면 썩는게 당연했던 시절에는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었다. 연기를 쐬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하는 과정이 추가적으로 개입하며 맛과 향을 돋우고 수분이 빠지며 맛 자체도 진해진다. 이런 걸 그리워하는 일이 단지 급냉동하거나 항공으로 운송하여 날것에 가까운 상태가 잘 보존된 생선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대의 엉터리 노스탤지어는 아닐 테이다. 그 맛은 그리울만 하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선을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가장 익숙한건 역시 조림일 테다. 양념에 한껏 졸여놓은 생선은 속살까지 간이 골고루 베어 한 마리를 남기지 않고 먹어도 좋을 정도로 알찬 요리가 된다. 우리말로 조림이라고 하면 주방, 재수가 없는 경우는 식사하는 식탁 위에서까지 가스불을 틀어놓고 액체와 함께 끓여내는 일이 떠오르지만 바다 건너편에서는 보존식품으로서의 조림이 있다. 즈쿠다니佃煮나 칸로니甘露煮가 있다. 간장에 감미료를 더해 불로 졸이고 시간으로 재워낸다. 과거에야 돈이 많으면 와삼봉이니 오키나와 흑설탕이니 썼겠지만 현대 인류가 즐기는 설탕으로도 충분하다. 여러가지 맛이 미리 덧입혀진 생선은 편리하게 먹기에도 좋고 맛도 그만이다. 유통망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유통을 위해 발명한 아이디어인 만큼 가공품으로 유통하고 현대 도시인들에게도 적격이다.

그런 생선조림을 밥반찬으로 먹어도 좋지만 일본인들의 상에 오르는 것 말고도 찬거리야 있으니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은 국수요리와의 조합이다. 국수집 가서 저육이니 제육이니 수육이니 삶은 고기 하나 시키는게 흔한 서울인데 파는 쪽 입장에서야 객단가를 높이니 좋겠지만 경험에서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양념장 찍어서 심한 경우 쌈까지 거드는데 그 자체로 완성품이지 국수를 먹는 경험과 조화롭지 않으며, "잘 삶았다" 정도가 최고의 칭찬으로 대우받는 현실을 감안하면 주문하려는 말끝이 흐려지기 일쑤다. 설득력이 잔류하는 지점은 역시 식탁에는 고기가 있어야 해, 같은 당위론이다. 착잡하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이런 점심 식사는 어느 이상으로 불편하면 안된다. 반복해도 좋을 만큼 맛도 그렇지만 비용도 편리성도 그래야 한다. 이 도시의 모든 이들이 살아가기 위한 바람이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면요리, 국물에 말아내는 면요리는 그 자체로 완성될 때 가장 빛난다. 접시 바깥으로 나와도 좋은 것은 도저히 국물 안에 담겨서는 안될 "클렌져" 뿐이다. 김치와 같은.

으레 국물으로 자신을 소진한 재료는 도저히 먹어서는 안될 상태인 경우가 되므로 어떤 고명을 얹어낼 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고명은 확실히 필요하다. 국물이 전체적인 맛의 인상을, 국수가 이를 즐길 수 있는 무대를 설정하고 이 두 개의 변주만으로도 우주를 노래할 수 있지만 역시 구성요소는 셋 부터가 완성된 느낌이 드는게 인간이다. 서양의 면요리에는 고명의 개념이 흐리다고 비판할 지 모르지만 국물과 소스가 내는 맛의 완성도의 차이, 그리고 서양인들의 식문화에서 샌드위치 형태의 음식이 계속 발을 넓혀가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나는 여전히 고명의 역할을 역설하고 싶다. 일상적인 경우, 고명까지가 국수가 가야할 길이고 전문 요리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 요리사의 삶이 연장될 수 있도록 비용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매일 라멘이니 타령하는 이유가 있고 바지락 칼국수를 사랑하면서도 오래도 씹어댄 이유가 있다. 라멘을 빼더라도 이미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많은 국물요리에 고명은 흔하다. 배달로 받아보는 짬뽕에는 불필요한 껍데기들이 나뒹굴며 쌀국수의 이름은 쓰이는 고명에 따라 정해진다. 예외적인 상황은 있겠지만 고명은 굳이 내 주장이라서가 아니라 이 도시의 보통의 값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이정도면 설득했으리라 본다. (연구비가 주어진다면 연구용역을 맡아보겠다만)

하여간 왜 고명 얘기를 이렇게 지루하게 했느냐, 바로 그 고명이 모자란 요리가 이 서울에 하나 있는데 바로 메밀로 만든 국수요리이기 때문이다. 막국수부터 냉면, 비빈 것과 국물 있는 것, 일본의 소바까지 닿지만 고명은 그야말로 있어야 하니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기 주문을 철저히 외주화로 소화해내는 대부분의 냉면들은 그야말로 구색에 지나지 않는 콜드 컷 한 장정도로 갈음하고 있다. 오이나 배, 달걀과 같은 요소들이 갖추는 논리적 정합성이 있고 차게 내는 고기라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관심이 많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한 가운데 나는 가끔 이 요리가 절실히 생각난다. 달달하게 졸인 생선을 올린 전형적인 서민음식이다. 저렴하기 그지없는 생선의 뒤에는 집요하게도 열심히 끓인 따뜻한 국물이 있다. 국물의 감기는 감각이 뱃속을 채울 즈음이면 부서지는 살결 사이고 짭짜름하고 기름진 생선이 파고들 때, 그리고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국수가 빨려들어올 때가 그립다. 그래서 가양동까지 온 일이다.

서울에서 이 요리를 전문으로 내세우는 곳이라면 신세계가 운영하는 <호무랑>을 가거나 서초동의 <미나미>를 가야 한다. (<미미면가>는 빼달라.) 가양동의 생활인은 아니지만 사실상 여기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내가 이 고생을 했을까. 그 값을 보상받는 것 같은 감동도 있었지만 돌아서는 길이 착잡했다. 다시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네이버와 인스타그램에 고등어소바니 사바소바니 검색어를 바꿔가며 찾아봐도 고등어를 올려주는 소바집보다 스시집이 많이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일상이 이상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 고등어 소바는 먼저 철저히 일상에 자리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가장 빛나는 요리이다. 그런 점에서 <부엉이 제면소>의 고등어 소바는 거리가 멀지 않은 이들에게 충분히 특혜를 부여할 수 있는 곳이다. 일상에 걸칠 정도로 충분하다.

분명히 예비 창업자들을 열심히 교육하고 있는 사설 요리학원들은 별 신묘한 재주들과 먹지 않는 요리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여전히 이 도시에 그런 맛들이 일상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점은 씁쓸한 일이다. 고등어를 올린 이 국수만 봐도 <스시 조>부터 하방식으로 내려오는게 빠르다. 오해가 빚어지고 먹는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굴러간다. 그래도 부엉이 제면소의 고등어 소바는 올바르다. 덜어내지 않아도 좋고 한 그릇을 전부 먹어도 좋다. 이 맛이 이 도시의 관습으로 굳어가는 과정에서 부엉이 제면소는 단연 주목해볼 만한 실행이다. 더 이상에 대해 꼬집고 들어가는 것은 지금은 가능하지 않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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