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퍼 - insipidus.

스쿠퍼 - insipidus.

이상하리만치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들어찬 종로 일대의 아이스크림 가게들을 전부 갈무리한 적이 있다. 알키미아, 더마틴, 피오르.. 일부러 스쿠퍼는 뺐고, 나머지 가게들도 거의 전부 다시 가지 않는다. 그나마 가까이라도 다시 갔던 곳이 피오르? 피오르는 에쎄레의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는데 그나마도 자주 닫혀 있던 기억만.

스쿠퍼는 끼아로 젤라떼리아 시절을 떠올렸기에 굳이 포함시킬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펠리치따를 위시로한 질보다 양 스타일의 레시피와 쏙 빼닮았는데 간판을 바꿨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모종의 사정이 있어 한달음에 스쿠퍼를 찾았다. 바로 바닐라다. 본 블로그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가지는 위지의 각별함을 떠올려보라. 게다가 끼아로 시절(KRW 4000)과 비슷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으니 불행인가 다행인가?

입구에서는 칼피지아니의 고급 교육과정을 수료했다는 명패가 당당히 놓여있다. 불과 수 년 전까지 서울에서 정말 대학교로 대접받았던 이 명패는 이제는 숨겨도 좋을텐데라는 생각이지만 아무렴. 하지만 굳이굳이 밝히자면 이건 본인들이 대학으로 이름을 붙이건 성당으로 붙이건 학교가 아니라 단지 학원이며 이념이 아닌 창업비용에 대한 증표일 뿐이다.

거두절미하고, 바닐라와 피스타치오 두 종류의 맛을 선택했다. 바닐라는 내 선택, 피스타치오는 매장 쪽의 선택이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은 어땠냐고? 먼저 눈에 띄는건 두 가지의 극단적인 대비이다. 참으로 잘 녹지 않는 질감, 그리고 공허한 맛. 피스타치오의 향은 존재하고, 질감도 일관적인데 맛이 희미한 이유는 역시 레시피에 있는 듯. 피스타치오의 함량을 높이면서 질감을 유지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당도와 고형분만 맞춘 뒤 질감의 오차는 업소용 안정제로 뒤덮었기 때문은 아닌지? BASE50, BASE100 등의 업소용 안정제 믹스가 만들어주는 전형적인 마법의 질감이다. 피스타치오의 맛을 진하게 한다라는 목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맛이다. 진하지 않은 아이스크림? 과연 이것이 굳이 추구해야 할 방향일까? 현재는 「피에트라」가 하고있는 브론테 피스타치오를 몇 년 전 끼아로의 계정에서도 보았는데 과연 그런 걸 젤라또에 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피스타치오의 맛을 더욱 강하고 진하게, 그 자체를 존중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물론, 가공원료 목적의 수입식품은 검역만 통과했다고 되는게 아니고 식약처장한테 신고를 해야하니 현실적으로 다시 이런걸 쓰라는 주문은 전혀 아니다. 단지 예전에는 절차를 지켰을지 의문일 뿐.

바닐라는... 그래, 다루긴 해야지. 언제나 말하지 않는가? 서울에서 우유맛 피하라고. 바닐라는 그 우유의 끝장나는 맛없음을 덮어주기 위해 담뿍 쓰여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가공용으로 만들어지는 밋밋한 단맛의 화이트베이스의 그 맛 그대로. 노른자의 색은 코빼기도 안보이는 가운데 그래도 바닐라 빈 눈은 보인다고? 그런건 아무런 보증도 해주지 않는다. 바닐라의 품질 수준에 따라 바닐린 함량은 열 배 이상도 차이난다.

바닐라는 그 자체로는 아이스크림 제조공정의 물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정말 성심성의껏 깎아 넣는 것만으로도 초보 제조자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메뉴이다. 물론 이에 더해 바닐린의 녹는점을 감안하면서 가공한다면 더욱 그렇고. 그런데 이 아이스크림은 둘 다 아니다. 반 컵을 해치우기 버거운 화이트 베이스의 불쾌한 텁텁함이 바닐라를 이긴다. 생산량 위주의 홀스타인이 반겨주는 뒷맛과, 우유가 아닌 시럽에서 오는 풍미 없는 단맛. 우리는 두 가지를 가정할 수 있다. 하나, 바닐라 원가가 아까우니까 바닐라 없는 바닐라팀을 결성했다. 둘, 익스트랙이 포함된 반완성 제품을 기반으로 당도만 맞춘 레시피라 바닐라 함량은 아예 고려대상에 없었다.

글만 보고 나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종류같지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고가품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다. 당장 여기서 걸어갈 수 있는 카페 큔의 아이스크림의 아성만큼은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서울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한 컵 4000원 리그의 플레이어에게는 그에 맞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겠나. 비슷비슷한 원가율, 비슷비슷한 레시피에서는 비슷비슷한 맛. 물론 바닐라는 이 리그에서도 특출나게 떨어지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아이스크림마저 그리 많지는 않았으므로 사람들에게는 작은 목적지가 되곤 했는데, 이제는 서울의 각 행정구마다 하나씩은 있게 되었으므로 목적지로서는 기능하기 어려운 맛이다. 일상에는? 솔직히 일상의 경쟁력은 더 떨어진다. 밴 앤 제리스의 바닐라를 두고 이 바닐라를 다시 먹을 이유가 정말 단 하나라도 있을까? 과거 로마에 가서 몇대 젤라또 이런데 가면 광명이 있으리라 기대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한국을 지배하는 음식 담론이 여전히 원가, 재료 위주에 머무르기 때문에 기술에 대해 주로 논하지만, 원가를 싸게 잡는데 기술이 좋은 곳이라는건 개념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를 잠식한다. 소규모 생산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그럼 어디인가? 아이스크림은 그 성질상 소규모 제조가 나은 품질이나 섬세한 관리를 보장하지 않는 웃기는 상품인데, 소규모 업장들은 날이 갈수록 범람하고 있다. 젤라또를 너무나 사랑해서 블로그도 만들었던 그가 아닌가? 어째 그 시절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