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집시 - 시에라 네바다

서울집시 - 시에라 네바다

을지로 <서울집시>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본지의 등재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면(이는 예외로 언급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원칙이다) 한남동 서울집시는 충분히 사정권에 들어온다. 웨이팅 없는 워크인의 쾌감, 물론 맥주 마시기 좋은 시간에 맥주를 마시려면 약간은 서두를 필요가 있다. 이름은 집시지만 더 이상 집시는 아닌 것으로 기억하는데, 집시 브루잉/홈브루잉 문화가 꽃피우기에는 마이크로브루잉을 위한 인프라가 좋지 않은 국내의 여건에서 서울집시가 그 이름과 실질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이는 없다. 다만 본격적인 시설 투자가 이루어졌다면 다음 차원이 잘 준비되어있을까 뭇 사람들은 궁금해하기 마련.

가장 먼저 매장을 방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씨앗" 2022년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캐스크에 숙성한 사워 방식에 다른 나무통 숙성 양조주(사케부터 셰리까지)에서는 결코 정도라고 할 수 없는 크래프트 맥주만의 무기, 부가물을 사용한 가향에 더해 사용했던 오크를 썼다고 하니(아마도 위스키 숙성에서의 캐스크 피니시 정도의, 숙성 기간 대비 짧게 가져간 듯) 그 탄생이 참으로 복잡다단하도다. 그래서 어땠는가, 결코 가볍지 않은 입안에서의 무게, 탑 노트에서 팔레트로 이어지는 핵과 향의 뉘앙스에 더해 발효로 얻은 신맛이 우아하게 피어난다. 곡물 발효로도 위대한 신맛에 근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사한다. 하나 잡히는 것이라면 주요한 셀링 포인트로 내세우는 샤도네이 배럴의 기능이다. 나파의 샤도네이 배럴을 사용한 맥주의 뿌리는 당연하게도 위대한 서부의 개척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곳의 샤도네이 배럴 숙성 맥주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짚이는 이유가 있다면 일단 맥주는 와인에 쓰이는 뉴 오크와 어울리게 만들기 까다롭기도 하겠으나 뉴 오크의 원가가 발목을 잡으니 자연스레 와이너리에서 쏟아지는 중고 배럴이 만만한 실험 대상이 되었으리라. 조금 더 점잖은(또는 미약한) 숙성의 뉘앙스는 사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더라도 사워를 사워로 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 거기에 샤도네이의 향이 밴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샤도네이라고 하면 생산자와 떼루아를 드러내는 중립적인 품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샤도네이의 향이 난다는 설명에는 빈 칸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서울집시의 씨앗은 찾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즐거움을 품고 있고, 특정한 장소가 아니면 판매하지 않는다는 영리함의 손을 들어줄 정도가 된다.

바이에른식 헬 스타일의 "미션 헬레스"는 EBC 기준 10 내외의 밝은 느낌으로 거품을 주요 포인트로 내세우는데, 단백질이 한껏 엉긴 느낌의 거품에 이어지는 고소함이 좋다. 다만 잔은 조금 작은 지금 크기가 오히려 적당한데, 알코올도 강하지 않고 홉 역시 강하지 않은 편이라 계속 구미가 당기기보다는 입맛을 돋우는 정도가 낫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뮌셰녀 헬(오리기날).

음료들도 튼튼했지만 무엇보다 서울집시를 빛내는 지점은 안주거리였다. 맥주와 술의 관계는 국내 뿐 아니라 어느 세계에서도 술을 위한 음식의 관계보다는 음식을 위한 술의 관계가 압도하는데 반해 국내 여느 곳의 크래프트 맥주 펍을 들러도 음식은 열악한 경우가 많다. 제한된 자산을 주로 음료에 배분하기도 하고, 애초에 음식을 얕보는 느낌이 드는 곳도 많다. 그에 반해 서울집시는 분명한 포인트를 내세우는데, 적당한 키치함, 자유로운 레퍼런스-그리고 주로 파는 스타일의 맥주를 적당히 반영한 느낌을 주는 조미의 스타일까지. 서울집시는 비어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러운 맥주와 안주의 쾌락을 선사해낸다.

20세기 중반 쯔음 시작된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운동은 끔찍해진 미국식 묽은 라거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위스키 업계에서도 유명한 그 사람 맞다)이 작성한 맥주 교본은 경전이 되었고, 잭 맥컬립Jack McAuliffe, 찰리 파파지안Charlie Papazian같은 1세대 마이크로브루어/홈브루어가 신호탄을 쏘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크래프트 맥주가 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의 세를 가지게 된 데에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라면 역시 서부의 시에라 네바다와 켄 그로스먼Ken Grossman, 동부의 보스턴 비어와 짐 코흐Jim Koch다. 시에라 네바다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폐업한 맥컬립의 마이크로브루어리 프로젝트와 다르게 셰 파니스와 같은 레스토랑과 손을 잡고 공간을 조성해 지역의 명물로 거듭나면서 드링크 로컬이라는 크래프트 맥주 무브먼트의 방향성을 제시한 공이 있다. 물론 홉을 강렬하게 때려넣은 스타일의 IPA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서울집시는 여러모로 서울의 시에라 네바다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밝은 공간, 밝은 사람, 밝은 맥주, 밝은 미래. 물론 캘리포니아만큼 넓지는 못해서 곧 기다리는 행렬이 생기고 말지만, 감히 그들에게 당신의 주말을 베팅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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