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라멘 - 중화소바
식문화에서 당분간 클래식이라는 표현을 없애버리기 위해 쌍심지를 켜고 다니는 필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중의 표현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클래식이라는 표현 아래에 납작하고, 불분명해지는 표현들과 음식들을 두고 참지 않을 뿐이다.
메뉴판에 "클래식한" 이라고 하고 있지만 세상 끝의 라멘의 중화소바의 레퍼런스는 그렇게 오래된 곳에 있지 않다. 오사카의 카도야쇼쿠도カドヤ食堂이 그 주인공인데, 일반 중화요릿집을 라멘 전문점으로 개수한 것이 2001년이므로 그다지 길지 않은 라멘의 역사에서도 오래된 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클래식이 단지 오래된이라는 의미는 아니므로, 옛방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거나 혹은 옛것의 교훈을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은가? 전립분을 넣은 듯한 면과 저온조리에 더해 양념을 크게 입히지 않는 차슈까지 옛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음식은 전혀 아니고, 그렇다면 마지막 문제는 도대체 "중화소바의 전형적인 교훈"이 맛으로는 어떻게 그려지느냐 하는 데 있다.
일차원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건 중화소바라는 요리를 미분하는 방식이다. 중화소바는 중국 요리의 여러 요소들을 합쳐 뭉친 음식인만큼, 각각 이미 답이 정해진 것들이다. 칭탕(清汤)은 닭의 향기를 한껏 머금지만 뼈에서 젤라틴 따위가 지나쳐 끈적이지 않아야 한다. 차슈는 껍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방과 속살 모두가 있어야 하고 두터운 지방에 맞설만큼 강한 단맛과 짠맛으로 처리하고, 그 양념의 감칠맛으로 마지막 승부를 본다. 면만큼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으로 보급된 것인 만큼 지나치게 따질 필요는 없으나 스프를 충분히 머금을 정도의 관용이 필수적이다. 지나치게 두꺼운 면은 거의 NG로 흐른다.
그러나 하나 하나를 이렇게 완성한다고 해서, 좋은 재료들이 좋은 라멘이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1+1+1=3의 방식이 아닌, 2나 4가 나올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뒤섞어 맛보기 때문이다. 간장으로 미묘하게 잡아둔 국물의 균형은 차슈가 팔각향을 뿜으면서 흐뜨러질 수 있고 스프의 높은 염도가 차슈를 날고기로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결말을 내는게 주방의 재량이자 의무가 된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사람이 적당히 썰어내는 두께의 차슈, 그리고 기름이 뜨되 층을 이루지 않을 정도의 점도의 스프를 기반으로 값이 설정되며 여기에 별다른 기교 없이 완성하면 그나마 이런 중화소바를 "클래식"하다고 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세상 끝의 라멘의 첫라멘은 "클래식"하지는 않다. 수비드를 해서가 아니라 맛의 목표값이 위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스프는 닭기름으로 입은 촘촘히 코팅하는 수준은 아니며, 차슈는 향에 개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당히 물러진 지방의 마우스필도 제공하지 않는데 그 자리는 스프의 일번다시 뉘앙스가 메운다. 중화소바라는 기호가 전해주는 풍미와는 확실한 차이가 있으며, 굳이 좇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좋은 식사인가? 우리의 관심은 그쪽으로 향한다. "좋은"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해석의 문제에 부딪히는데, 나는 두 가지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서울, 합정에서는 좋은 식사이며 기호품인 라멘으로서는 좋다고 하기 어려운 식사이다. 뒤부터 이야기해보자. 가운데 덮은 김을 중심으로 노골적으로 카도야식당의 레퍼런스인데, 레퍼런스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지 않다. 닭육수를 바탕으로 한 중화소바에서 닭의 비중을 줄이고, 김이 가운데를 덮어 한술에 김부터 치우게 된다. 이 둘은 모두 카도야의 맥락 안에서는 일본인의 식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식 잘 구운, 깨기름향 솔솔 나는 김이 아닌 히젠이나 아사쿠사김 따위의, 강렬한 바닷내음은 그내들의 고향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스프에 베어든 다시 뉘앙스도 마찬가지. 김과 가쓰오 모두 그다지 없는 수입품 중(김은 정말 수입품일까?) 골랐을 테니 자연히 요리에서 경쟁력으로 나타나기 어렵다. 그렇다고 다시마를 미치게 우려 만드는-혹은 MSG의 도움을 빌어 만드는- 감칠맛 따위로 노골적인 캐릭터를 만들지도 않는다. 생존을 위한 거래가 축적되어 만든 중화소바의 "클래식"으로부터 이리저리 벗어났으나 가는 방향이 특별히 없다. 어릴 적 치기 어린 반항의 모습이 모두 엇비슷하듯이 이 요리를 왜 하는가의 이유가 그것이 유명하기 때문에의 요리가 보여주는 전형적 결말이다.
찾아가는 라멘으로서 아이디어의 번뜩임은 없는 가운데 외국의 명점이 국내에서는 무명이라는 점이 버티고 설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가게를 오픈때부터 아직도 들락날락 하고 있다. 일상으로 좋은 식사이기 때문이다. 일단 저녁때 잠겨있는 경우가 없었고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2층 입점의 힘으로 영업 자체도 견실하게 이어오고 있다. 아래에서는 동물권을 외치던 비건 식당이 사라지고 육가공품의 사진을 들이미는 육식 포르노그래피같은 가게가 들어올 동안 이 가게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적당히 청결하고, 넉넉한 테이블 간격이 있고 가격마저 적당하다. 보통 토핑을 올릴 수는 있어도 빼주는 경우는 잘 없는데 S옵션이 있어 독보적이다. 면의 맛이 썩 괜찮고 짠맛, 단맛, 감칠맛은 음식에 적당히 존재하므로 한 끼로는 무리가 없다. 감흥이 없는 식사인 만큼 반복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져 역설적인 장점도 있다. 대학교가 많은 곳에서 모르는 음식을 먹고 불행해질 수 있는 위험의 크기를 감안하면 세상 끝의 라멘은 정말 마구 권해도 괜찮은 음식을 한다.
나는 라멘 가게들에게 창조자가, 철학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라멘집들의 제문제는 공예(Craft/Handwerk)로서 훌륭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무수히 많은 일본의 라멘 명점들은 모 게이머의 "수백, 수천, 수억 게임을 했어요. 이 게임의 모든 것을 이해했어요"라는 말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가설 설정-계산-결론-환류의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정립된 삶의 궤적을 무기로 삼는다. 저 발언의 당사자가 패배로 유명해진 현실처럼 그렇게 해도 완벽이나 성공 따위는 쉽게 따라오지 않고, 단지 언젠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음식들은 이런 실행의 반복, 경험의 축적이라는 가장 전형적인 지혜의-"지식"이 되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기원으로부터 가게의 개성이 나타나야 하는데, 우선 타인의 개성을 들여오고 보니 고유한 강점이 드러나기보다는 옮기는 과정에서 결손이 더욱 눈에 밟힌다. 카도야도 완벽한 식당은 아닐진대 다시 그것을 이상향으로 치켜올리면 이상과의 거리는 가까워질 리 없다. 내가 이 가게를 찾은게 2018년 5월이 처음이고 이제 이만큼 시간이 지났다. 시바타쇼텐에서는 「중화소바NEO」를 출간했고 이제는 중화소바에 대한 수많은 해석례들이 일본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다. 과연 벌써 끝이라고 하기에는 섭섭함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