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여행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빵 여행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그간 별 일 없으셨길 바란다. 어려운 시기, 외식보다는 포장이, 요리가 가까워진 요즈음이다. 위기의 시대라고들 한다.

위기의 시대라고 해서 침묵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또 몹쓸 버릇, 다른 분야 이야기를 해보자. 독일의 바우하우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현대 인류의 삶을 바꾼 집단이다. 그들에게도 생계는 항상 문제였다. 지금이야 칸딘스키니 미스 반 데어 로에니 하는 이들이 무언가 초월한 경지의 예술가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그들도 결국 무언가를 만든 걸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는 공사를 수주하기도 하고 전시와 판매로 수익을 얻기도 했다. 애당초 이러한 일상과 예술의 구분의 해체를 시도하기도 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갑자기 왜 바우하우스, 이런 긴장과 고통의 시련이 우리에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벼락부자가 쏟아지는 유래없는 호황이 온다면 그 때는 생업을 걱정하지 않고 무언가를 하게 될까. 그런 가정은 무익해 보인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때로는 주어진 맹목적 가치를 말하며 때로는 그 가치를 의심하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본 블로그에서는 단순한 방책으로 일상적인 식사(EATS)와 경우가 있는 식사(DINING)을 구분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물론 식사의 비용이 비싸다고 해서 반드시 경영진과 점원들이 더욱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많다. 다만 나는 그 의지를 읽는 것이다. 굳이 그런 그림 아래에서 굳이 그런 방식으로 사는데 그에 맞추어 우리는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빵집에서 사올 수 있는 빵들은 EATS라고 보아야 할까? 과연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다. 빵집에서 전채로 음미할 수 있는 요리부터 식사용 빵, 식사에 곁들이는 빵, 그리고 식사의 여운을 마무리할 과자까지 준비했다면 빵집은 총체적 경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일상적인 시각에서 빵에 접근해본다.

나는 바로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우리는 어떠한 식사에 대해 말할 때 식사를 경험한 환경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해진 식사 시간 내에 해치우고 돌아올 심산인 직장생활의 점심과 쉬는 날 약속시간까지 정해서 만난 이들의 점심 식사의 맛이 같기 어렵다. 바라는 바도 다르다. 빵을 포장하는 경우에도 그렇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침에 살기 위해서 씹는 빵을 오후의 커피에 곁들이는 빵과 같은 링 위에 세워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본 블로그에 종종 올라올 수 있는 빵에 대해 미리 이 부분을 밝히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빵을 올리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빵은 첫째로 일상의 식사로서의 기능을 중요하게 본다. 빵의 전형적인 취식 방식에 따라서 맛보았을 경우를 상정한다. 특별한 안내가 있다면 그에 따르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통상의 보관 방식을 취한다. 이를테면 바게트 종류는 햇빛이 들지 않는 건조한 장소에 보관하지만 72시간을 초과하지 않는다. 둘째로 빵을 제공하는 방식, 즉 가게의 이름과 제공하는 방식, 접근성 등을 고려하여 빵이 통상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경험의 시각에서 이러한 경험을 재구성한다. 이를테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기어이 먹을 수 있는 빵이라면 그것은 일상의 식사로 기능할 지언정 일상적으로 먹을 수는 없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안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 빵이-일상에 대한 조금의 변화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따라서 그러한 기대를 또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다. 만 원짜리 바게트가 있다면 그것은 바게트의 역할에 대한 일정한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래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빵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복제 가능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빵을 저온에 구웠을 때는 폭신폭신해서 좋다고 말하고 고온에 구웠을 때는 단단해서 좋다고 말한다면, 빵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을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중 하나만이 정답은 결코 아니다. 다만 노릇노릇하게 구우려고 했는데 덜 구운 빵과 촉촉하게 만드려고 했는데 마른 빵은 정답이 아니다.

이러한 깔개를 깔고 이제 빵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세 개의 크루아상과 한 줄의 바게트를 구매했다. 바게트는 요청해서 미리 썰어두었다. 최선의 방법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매일 바게트를 적당히 썰어서 보관할 열정이 없었다. 그러니 다음 날의 바게트, 다다음 날의 바게트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조심스럽다. 그렇다면 첫 날의 바게트는 어땠는가. 어떻다라는 답은 홀로 설 수 없다. 바게트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될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바게트는 무엇인가. 반죽의 모양이다. 통째로 잡아뜯어 먹으라고 만든 모양은 아니니 썰어내어 적당한 크기로 나눈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나는 버터와 소금, 그리고 적당한 양상추와 달걀을 곁들였다. 빵을 한껏 물어뜯으면 처음 느껴지는 것은 빵의 껍질이다. 빵의 껍질은 부서진다. 잘린다고 할 만큼 말끔하게 끊어지는 것도, 찢어진다고 할 만큼 저항하지도 않는다. 적당한 운동에너지가 전달될 때 빵의 표면 부분을 구성하는 부분만이 균열로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빵의 향이 퍼진다. 빵 굽는 데 난다는, 빵집의 향기다. 밀가루 내의 당분이 캐러멜화되며 형성하는 아이소말톨과 마이야르 반응으로 형성한 2-아세틸-1-피롤린과 같은 성분들이 우리를 자극한다. 2-아세틸-1-피롤린, 그래, 갓 지은 밥의 향의 바로 그 성분이다. 태생 밥만 먹고 자란 우리를 빵이 자극하는 비결이다. 본능적으로 그 향을 찾기 위해 쪼개진 빵을 입안에서 몇 번이고 다시 으깬다. 몇 가지 원인들이 결과로 나타난다. 밀가루의 무기질, 열의 마이야르, 탄수화물을 탐내는 인간. 미생물의 도움을 얻어 적당하게 부풀어오른 이러한 빵맛을 즐기는 무대가 된다. 빵이 커다란 껍질 덩이였다면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식사의 순간만큼은 피안으로 향하는 기분을 만끽한다. 바게트의 단단함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나도 아침부터 빵 씹는데 이에 힘을 주는 행위를 마냥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껏 물어뜯어서 이 향을 맡을 수 있다면 어찌 빵 껍질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공들일 가치가 있는 맛이다. 다 맛있게 먹고 싶어서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세 종류의 크루아상은 혼자 전부를 맛볼 수 없었다. 보관 시간을 길게 가져가지 않으려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과 나눴다. 대신 나는 이곳의 크루아상을 따로 방문해서 또 혼자 전부를 맛보기도 했다. 모두 시간의 간격은 넉넉하지 않은, 빵집에서 직접 먹거나 한두시간 여의 간격이 있었을 뿐이었다.

크루아상의 일상 속 위치는 나에게는 간식이다. 크루아상은 허기를 달래거나 영양 공급을 위해서 먹지 않는다. 즐기기 위해서 먹는 측면이 나에게는 강하며, 주로 커피나 홍차를 함께 먹는다. 음료를 곁들인다는 점은 전형적인 프랑스인들의 생활 양식에서 참고했지만 이걸 아침에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프랑스라고 뭐 전국민이 통일된 식사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우리는 프랑크인이 아니며, 크루아상의 가격은 프랑스와 다르다. 프랑스에서야 위대한 셰프들도 EUR 1 언저리에 크루아상을 팔지만 이곳의 크루아상은 KRW 3000을 넘으며 이것은 서울의 무수한 크루아상에 비견하여 크게 튀는 가격이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러한 배경에서 크루아상이 특별히 무언가를 곁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 자체가 완성된 맛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며 먹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빵에 더하지 않았다. 더해진 것은 보관한 시간 뿐이다.
간식 크루아상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역시 첫째로는 버터의 풍미이다. 체온 근처에서 녹아 풍미를 전달하는 버터가 먹고 싶어서 반죽에 버터를 밀어 넣었다. 버터는 단맛과 너무나도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달달한 맛 위에서 버터의 향을 맡고 싶다. 그러나 사람은 간사해서 지방이 지나치게 많으면 부담을 느낀다. 음료가 버텨줄 수 있는 선에서 버터가 선을 지켜야 한다. 바게트와 달리 굽기로 얻는 맛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다. 버터가 이미 입안을 가득 채워주는 덕이다. 돌덩이처럼 굳을 필요도 없다. 하늘하늘 날리는 크루아상은 청소에 곤욕이지만 맛이 있다면 마지막 한 장까지도 먹어치울 테니까.
배가 꽂힌 크루아상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보다 맛있게 먹어줄 수 있는 이에게 양보하고 나니 두 종류의 크루아상을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맛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크루아상보다도 초콜릿을 안팎으로 채워넣은 쪽이었다. 기본 크루아상이 주어진 환경에서 낼 수 있는 적절한 버터 맛과 잘 만든 반죽, 즉 좋은 일상의 간식에 머물러 과연 여전히 서울은 같은 좋음을 두 배로 비싸게 먹는 슬픈 도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검게 물든 크루아상에서는 흐릿하게나마 셰프를 읽을 수 있었다. 초콜릿의 쓴맛의 표준과도 같은 맛이 크루아상 위에 자연스럽게 맛의 층을 쌓는다. 그에 걸맞게 단맛 또한 덮인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도 기억이 남았냐 하면 여전히 잃지 않은 밀가루가 주는 만족감과 버터향이다. 코끝에 버터향이 아주 사라졌다면 이것은-초코 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을 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두뇌가 이름을 인식해서 보내는 신호였다. 야, 체리의 신맛이 스며들어야 포헤 누아 아니야? 내 생각은 그렇지만... 기분 좋게 먹었다는 기억까지 왜곡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 신 맛은 크루아상의 맛 값에 상정한 요소가 아니니까. 만약 그래야 한다면 그것은 아직은 일상의 영역이 아닐 수 밖에 없다. 일종의 의견으로서 성격이 더 짙어지겠지. 재량 영역내에서 판단을 존중할 수 있다.

고작 빵 좀 먹은 것 가지고 길다면 길게 이야기했다. 남의 빵을 먹은 기회를 빌어 내가 생각하는 좋은 빵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를 통해서 다시 남의 빵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맛있는 빵을 먹는 일이 모두에게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 되기를 바라므로, 지극히 일상처럼 고생하지 않고 손쉽게 빵을 사서 떠나 손쉽게 맛보았다. 내가 느낀 경험을 여러분이 온전히 느끼실 수 있도록, 보편적이지 않은 경험축이 더해져야 하는 비유나 기준이 없이 판단의 강약을 강조하는 표현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아마추어이기에 이 글은 내 스스로가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표현하는 재미와 나누는 기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것을 통해 나는 또 빵을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불완전한 글을 통해 나는 여러분이 맛있는 빵에 대해 어떠한 생각이 생기고, 또 그것을 다른 이와 또 나누며 빵에 대한 우리의 앎이 풍성해지고,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큰 꿈이고 작은 실천이다. 그래서 그 빵은 어디서 샀냐고? 공덕역에 뺑 스톡에서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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