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틴 - 피스타치오, 장미

더 마틴 - 피스타치오, 장미

칼라브리아에는 왕자를 케이크로 굽는 전설이 내려온다면 이란에는 왕자를 유혹하기 위해 마성의 케이크를 구워 진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세몰리나를 넣고 반죽해 고소하고 로즈워터گلاب를 넣어 매혹의 향을 더했다는 이야기이다. 갑자기 왜 이 이야기를 했느냐? 아이스크림이 그런 맛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더 마틴」에서 수년간 여러가지의 피스타치오를 맛보았지만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은건 몇 년 전이다. BABBI社의 헤이즐넛 페이스트를 써서 만들었던 것과 함께 견과류를 맛보는 즐거움을 주던 맛들이었는데, 각자 어떤 사정에서인지 이제는 다시 나오고 있지 않다가 하나만 부활했다. 하지만 다시 부활한 피스타치오는 미국산 피스타치오를 사용한 전혀 다른 맛이었다.

몇 차례 개역개정을 거친 「더 마틴」의 피스타치오는 왕도를 거부한다. 흔히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라 하면 초콜릿, 바닐라, 피오르 디 라떼와 함께 젤라또 업계가 가진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는 전형 중의 전형이다. 단맛과 유지방 위에 그 자체의 맛 말고 어떤 것도 불필요하다. 하지만 이곳의 피스타치오는 피스타치오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본래 극단적으로 건조한 지방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잘 키운 피스타치오는 살짝 볶아주는 것만으로도 진한 향과 약간의 달콤한 힌트가 느껴지지만 미국산 피스타치오는 극단적인 풍미, 지방 모두 약간 모자라기에 그 자체per accidens가 되지 못했다.

이런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할 수 있을까. 이곳의 아이스크림들은 주로 맛을 여러 겹으로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예컨대 트러플과 카망베르 치즈, EVOO와 후추 블렌드로 만드는 기억의 지속이나 포트 와인으로 피니쉬를 한 티라미수 따위) 피스타치오 역시 그러한 창작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로즈 피스타치오'라는 이름의 맛은 기본적으로 풍성한 지방 위에 피스타치오를 볶아 만든 고소함이 대들보 노릇을 하는 가운데 덩어리가 녹는 순간 강한 장미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단맛에 대한 욕망을 이끄는 향이지만 아주 약간의 신맛을 떠올리게 하는 효과도 있다. 실제로 신맛의 매개체가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미향은 그런 착각을 가능케 한다. 장미향을 매개로 신맛-라즈베리, 단맛-리치의 그림을 그린 의 이름은 우리가 몇 번이고 되뇌었던가.

무슈 카밀 에르메가 꿈꾸는 페르시아가 꽃향기 가득한 정원과 같은 풍경이라면 중근동의 긴 전통을 잇는 이곳의 페르시아는 작열하는 대지와도 같았다. 유지방, 피스타치오 그리고 마이야르 반응으로 얻어낸 구운 맛은 그 자리에 주저앉도록 무겁지만 강렬한 장미향은 한 입 더를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완성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무엇이 모자랐을까? 생각건대 시간차를 두고 느껴지는 개별 향을 잇는 레토릭의 부재이다. 무엇으로 이을 것인가. 로즈워터와 등화수와 같은 아랍/페르시아 특유의 가향 매개체는 20세기를 거치며 바닐라로 대체되어 서방의 제과에서 쓰이는 비율이 현저히 떨어졌으니 한반도에서는 빌릴 지혜가 마땅치 않다. 원래 이렇게 글을 마무리지으며 앞으로를 두고 보는게 내 글이지만 이번에는 굳이 말을 얹어보겠다. 앞선 전설을 다시 들먹여보자. 전설의 케이크는 무엇으로 만드나? 피스타치오와 장미에 카르다몸 그리고 아몬드 가루 혹은 세몰리나로 완성한다. 허브류의 신선한 자극부터 시트러스 느낌까지 아우르는 카르다몸 달콤함을 연상케 하는 로즈워터의 조합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반죽에 직접 섞지 않고 뿌리는 피스타치오의 견과향을 당겨오기 위해 자연스레 케이크 반죽에서부터 고소함의 씨를 심어둔다. 이런 케이크를 두고 영미권에서는 Persian Love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먹어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맛이 난다. 무에서 유를 창작하는 기쁨도 있겠지만 페르시아인들의 것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맡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 나는 타히티 바닐라 때문에 이곳을 찾지만 피스타치오와 같이 견과를 쓴 젤라또를 빵에 넉넉히 발라서 먹으면 정말 죽음의 맛이 난다. 땅콩 버터를 잔뜩 바른 식빵이 날개를 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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