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볼리 가든 에스코피에 디너
반복해서 재현하기 어려운 경험에 대한 게시는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모든 평론이 그렇듯이, 본지의 게시글 또한 원본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원본의 경험이라는 것도 다분히 자의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평면 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더라도 거리와 각도 따위가 다르지 않은가? 그렇지만 아예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나 접근할 수 없는 경우와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창고에 숨겨둔 그림을 두고 평론을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룰 주제는 원래는 다룰 의미가 크게 없는 물건이다. 방이라고는 20개도 되지 않는 호텔 투숙객, 그 중에서도 특정한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끼리만 진행한 식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주제 때문에 간단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평론의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정찬의 방식을 따르는 식사임에도 단순하게 다루는 것으로 갈음한다.
그래서 무엇이 글감인가? 지난 여름 님 호텔에서 니콜라 살(Nicolas Sale)를 불러 개최한 디너 파티이다. COVID-19로 호텔 레스토랑이 임시 휴업하기 전까지 리츠 호텔의 주방을 이끌었던 그는 현재 에스코피에의 제자들이 결성한 "국제 에스코피에 제자 협회(Disciples Escoffier International)"의 회장으로 에스코피에가 물려준 가치를 이어받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협회의 이전 회장으로는 자크 마콩, 티에리 막스 등이 있었으며, 리츠 출신으로서도 각별한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에 대한 입바른 칭찬은 이정도로 하고, 그래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에스코피에를 기념하는 식사다. 에스코피에는 생전 티볼리 가든을 찾아 왕실을 위한 식사를 개최하는 등 의외로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어 님 호텔에서 디시플 에스코피에와 이벤트를 기획한 것이다. 니콜라에게 모든 작업을 일임한 것은 아니고, 님 호텔 측 주방장으로는 이브 르 레이(Yves Le Lay)가 선임되어 이날 식사를 준비했다.
랑구스틴을 다른 말로 노르웨이 랍스터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북해 인근에서도 풍성하게 잡힌다. 에스코피에의 교본에 실린 랑구스틴 요리는 대부분 충분히 익히고 껍질을 풍성하게 활용하는 방식이지만 이날 식사는 단순히 에스코피에 요리책을 연습해보는 자리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레몬에 오세트라/바에리 교잡종 캐비어로 맛을 내는 방식을 택했는데 보수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우리는 굳이 망고나 패션프루트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날의 방향성을 짐작케 만들었다.
프로방스식 토마토는 에스코피에보다 줄리아 차일드가 떠오르지 않나 싶었지만 프랑스의 전형성을 나타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리였다. 참고로 프로방스식 토마토란 토마토에 마늘, 빵가루, 파슬리 따위를 넣고 오븐에 굽는 요리이다. 남부 요리답게 버터가 아닌 올리브 오일을 사용해 지중해 요리라는 정의가 더욱 부합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거스르기가 어려운 재료만 사용하는 만큼 핵심이라면 결국 토마토일 것이다. 조미의 정도가 토마토의 밝기를 결정한다.
라따뚜이와 파니스를 얹고 소스 피스투까지, 지중해-프로방스에 대한 레퍼런스가 계속 이어지는데 여름이라는 계절도 이유가 되었겠지만 굳이 파리나 부르고뉴 스타일을 빗겨나간다는 느낌도 있었다.
비둘기와 양파, 순무라는 마지막 요리만큼은 전형성의 끝을 가지고 있어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적색육 요리에도 여러 방향성이 있지만 의외로 놓치기 쉬운 부분이 단맛의 균형인데, 비단 비둘기 뿐 아니라 쇠고기를 요리하더라도 소스나 가니쉬의 단맛이 가지는 역할이 크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맛을 아예 겹치도록 하는 경우는 잘 없는데, 그 이유는 단백질 그 자체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생명력이 녹아있었던 것이다.
에스코피에의 레시피를 그대로 개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이 디저트인데, 영락없는 페슈 멜바이다. 바닐라 시럽에 졸인 복숭아와 라즈베리 퓨레, 그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지는 디저트이다. 그 규칙을 뒤틀어 복숭아를 퓨레로 만들고 라즈베리는 과육으로 현현하는 재치를 부렸는데, 노른자를 넣고 만든 옛방식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즐거운 질감, 그리고 복숭아의 가공이라는 조리의 이유를 빛내는 응축된 복숭아향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첨언하자면 인위성을 그 가치로 뽑는 디저트 영역에서 시각적 완성도 또한 일정한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는 없겠지만 크넬만 간신히 떠낸 아이스크림을 뻔한 타르트 위에 올려놓거나 튀일 하나 꽂은 것을 만나고 나면 두 가지로 속이 상한다. 이걸 먹어야 하는 나,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주방. 접시가 넓은 것이 항상 비어있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은가.
여러모로 현대적으로 힘을 뺀 요리처럼 보이지만 100년 전의 전형성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요리라는 점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반복되지 않을 식사에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은? 같은 요리를 하더라도 레시피의 이유를 의심하는 자세가 아닐까.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쩌면 따라할 수도 없는) 레시피의 언어화를 중심으로 이 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