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 코코로 - "칸코쿠" 라멘?

토리 코코로 - "칸코쿠" 라멘?

그것은 어떤 폭거였다. 외출의 북방한계선을 간만에 돌파한 것이다. 중랑인가 노원인가, 육군사관학교의 북쪽으로 향했다. 내게는 파주, 동두천, 연천보다도 북쪽이요, 강원도보다도 동쪽이었다. 왜 이런 곳으로 향했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으나, 트인 시야에서 만날 수 있는 수락산과 불암산 자락만큼은 마음을 다스리기 좋아보였다.

니놈이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산이나 구경하고 왔을까? 역시나 찾는 것은 점심거리인 게 유객의 본모습이었다. 서울시내 4년제 학사과정 교육기관중 가히 가장 맛없는 점심거리를 가진 육사 근처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삼육대학교라는 학교 주변은 더더욱 낯설다. 그렇게 주변을 거닐고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닭마음(鶏心)이라, 아니 보통 읽는다면 토리/고/코로 아닌가, 아니면 아예 토리신이라던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점심 메뉴는 정해졌다.

소금을 넣은 라멘에 달걀 하나를 추가하고 음료까지 시키니 만 원에 동전 하나 남기고 계산할 수 있었다.

저온 조리에 가깝게 올린 닭가슴살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옛모습이다. 우리나라의 옛모습일까? 일본의 옛모습일까? 두 가지가 겹쳐 그려진다. 하코다테에서 만들어졌다는, 라멘의 가장 옛모습은 닭과 돼지뼈를 우린 육수에 소금간을 하여, 파나 죽순을 올려 완성한 국수였다. 일본의 국물 문화는 가다랑어와 다시마, 멸치 등을 뿌리로 하고 있었으니 완전한 외국 요리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벌써 그것이 한 세기 반이 지난 일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오랜 세월 닭으로 국물을 우려왔으니, 삶은 국물에 그 고기를 함께 먹고 국수나 밥을 말아먹는 것은 충분히 익숙하다.

그러나 닭을 먹는 우리만의 방법이 있었으니 라멘이라는 요리가 한국 기원이요같은 주장을 하기에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들이 곧장 등장한다. 먼저 김과 말린 죽순, 달걀과 같은 얹음새가 낯설다. 둘째로는 사실 국물을 내는 방법도 조금은 다르다. 우리는 다른 동물의 뼈끼리 섞지 않았고, 어린 닭으로 국물을 내는 궁중의 호화로운 요리가 있었으되 사정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던 반가나 민중의 음식에는 닭의 육수가 일반적인 재료는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 식탁을 장식하고 있는 아비아젠과 코브-반트레스의 개량종의 힘에 덧입어 우리는 곧 닭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런 품종의 특징은 무엇인가, 빠르게 자라서 어릴 때 잡아 고기를 얻기 위한 품종이다. 한 마리를 전부 먹는다는 데에 사람들의 만족이 있으므로 뼈에 살을 붙여 내는 방식이 자리잡으니 끓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치킨이나 백숙, 닭도리탕, 삼계탕 등 여느 닭요리 중 살만을 발라내어 내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요리는 없다.

이 라멘 한 그릇은 이러한 두 가지 배경 속에서, 일본의 과거에 한국에 독해를 올려낸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변형되고 어떤 요소들은 탈락한다. 먼저 닭만을 끓였다는 국물이 참으로 맑았다. 보통 라멘에 쓰이는 닭육수는 고기를 위한 부위들을 쳐낸, 목부터 척추, 갈빗대까지 이어진 커다란 덩어리(鶏ガラ)를 끓여내는데, 강한 불에 오래 끓여 뼈에서 콜라겐이 나올 정도가 되면 바이탕(白汤), 뼈가 녹지 않는 온도로 지방에 스민 감칠맛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맑은 것은 칭탕(清汤)이다. 그렇다. 이것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 요리의 국물의 분류법이다. 그것이 그대로 일본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파이탄(白湯)이랑 친탄(清湯).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친탄을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맑으니까. 그렇다면 곧바로 반문이 들어와야 한다. 중국 요리에서는 부이용이라고 부르며 청탕이 여전히 요리의 핵심 재료로 쓰이는데 비해 일본의 라멘 유행은 닭에 대해서는 파이탄만이 대유행을 하고 있습니까. 색이 불투명하니 콩국수같아서 신기하니까? 당연히 맛 때문이다. 이 육종들은 하나같이 어릴 때 잡고, 빠르게 살을 불리도록 만들어진 품종인지라 맛이 진하지 않을 조건은 다 갖추었다. 그래서 맑게 끓이면 맛의 경험의 총량이 모자라다. 그래서 다른 국물과 배합하여 맛의 층을 쌓거나, 화학적 변화의 정도를 높여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닭국물-토리친탄이라 꼭 불러야할까?-은 그러한 고민의 세월이 담겨있지 못했다. 「삼국지」에서는 뼈까지 건져서 식탁에 올랐으나 이제 뼈는 걸러주니까 좋은 시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다. 서울 복판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닭곰탕집들이 떠오르는 국물이다. 그들보다 나은 점이라면 염도는 올곧게 잡혀있다.

그렇다면 또 우리의 요리는 퇴화하는가 하고 말았겠으나 이 라멘을 둘러싼 경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관성에 기댄 복제가 먼저 행복의 끈을 부여잡는다. 말린 죽순과 김의 향은 확실한 더하기이다. 열심히 다듬은 파 또한 의도보다는 관행이라는 느낌이지만 김치와 더해 익숙함을 연출하는데 기여한다. 결정타는 달걀이었다. 하나 더 추가해서 그런게 아니라, 달걀의 색을 보라. 아지'타'마고는 바다를 건너오며 기억을 잃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쁘다고 결론지을수 없는 것이었다. 아지다마(味玉)의 본명은 아지츠케다마고(味付け卵). 양념에(味) 재워서(付け) 만든 달걀(卵)이 아닌가. 그러나 이 달걀은 이렇게나 새뽀얗다. 그렇다면 지금 그냥 삶은 달걀로 모독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었다. 달걀은 선명한 짠맛이 스며들어 있었다. 국물과 면, 그리고 이 달걀이 호흡을 맞출 때만큼은 감격적이었다. 일본이 아니라 고향집의 맛이었다. 개별 요소들이 빛나지 않다가 어우러지니 아주 다른 길을 비친다. 우리식의 닭국물 요리였다. 닭칼국수, 닭곰탕, 닭한마리.. 핏속에 흐르지만 외식에서는 곧 불행까지 선사하는 그런 것들의, 어딘가에 존재할 피안의 세계에 잠깐이나마 접한 느낌이었다. 식초 몇 방울과 달걀을 더하니 성큼성큼 나아간다. 전형적인 사궁도, 죽음의 그림인 줄 알았는데 패를 걸더니 패싸움을 이기고 완생으로 거듭났다.

"일본의 라멘과 얼마나 비슷한가", 또는 "일본의 특정 라멘들이 추구하는 맛 가치에 비견하였을 때 얼마나 완성도가 있는가"같은 잣대를 가져온다면 별로 재미 없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라멘은 그런 것들에 지나치게 무심하여 아주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식만의 느낌을 담아내었다. 물론 나쁜 점까지 담아내었으므로 완생이라 하여도 게임의 승리까지 닿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가능성을 느꼈다는 데에서 큰 감사함을 느꼈다. 만약 중국인들이 일본의 빈민들을 좇아다니며 '그것은 정통 중국요리가 아니오' 타령을 했다면 지금의 라멘이 있었을까? 자유분방함 속에서 요리의 새로운 가능성은 꽃피운다. 이 요리는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 물론 소비자가 구매하는 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완성품이어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주제가 일본 요리라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능성에도 엄청난 돈을 소비해주지 않는가? 라멘 한 그릇정도 또 그래도 별 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