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파사르, 여전히 '정점'에 있는가?
알랭 파사르와 라르페주의 전설이 가진 위대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6년부터 3성의 역사를 30년째 지켜오고 있는 그의 레스토랑은 프랑스 요리의 신전이며, 70세의 나이에도 드넓은 정원과 주방을 오가며 열정을 불태운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다. 게다가 파사르의 주방은 가니에르를 제외하면 한국인에게 문호가 열려 있던 곳으로도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는 곳이다.
여름을 맞아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는 셰프들의 대결이라는 주제로 지면에 두 셰프를 비교해 비평하는 6부작을 연재했고, 얼마 전 마무리되었다. 이런 형태의 저널리즘이 으레 그렇듯 흥미 위주라던지, 결국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다는 입발린 칭찬 아닌 무언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한국어권 외식 저널리즘에서 비롯된 편견이리라.
물론, '대결'이라는 콘셉트 자체는 여러모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기획으로 보이지만, 지면에 쓰인 기사 하나가 단순한 흥미본위를 넘어서 프랑스 미식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전설적인 셰프의 요리라는 것이, 과연 그 전설에 대한 존중을 배제하고도 여전히 가치를 발하는가? 기사의 작성자인 스테판 뒤랑-수플랑은 빅토르 위고의 글 한 줄을 인용하며, 두 거장을 여전히 노인이 아닌 아티스트이자 셰프로 맞이한다.
"젊은 이의 눈에서는 불꽃을 보지만, 노인의 눈에서는 빛을 본다."
- 빅토르 위고, "잠든 보아스"
기사의 전문을 인용하지 않겠지만, 실은 이 빅토르 위고의 인용문이 소개되는 것은 두 요리사를 치켜세우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는 "뻔한 항의 편지를 받아들게 될 미래를 알면서도"라고 스스로 말하며, 기억에 남는 요리가 떠올리지 않아 이렇게 말을 빙빙 돌려야만 한다며 작심어린 비평을 시작한다.
알랭 파사르의 요리에 대해 그는 프랑스의 뛰어난 3스타 레스토랑들과 비교했을 때 한참 아래(bien en dessous)에 있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이는 동물성 단백질의 부재-알랭 파사르는 작년 레스토랑에서 벌꿀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성 재료를 배제하는 결정을 내렸다-를 고려하지 않고도 그러하다는 점에서 평가는 가히 충격적이다.
물론, 피에르 가니에르에 대해서도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요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수십 년간 뭇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뜨렸던 요리들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지만, 가니에르의 과거를 회고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한 아쉬움이 언급된다. 아마 오로지 프랑스 요리를 위해 프랑스를 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느꼈을, '피에르 가니에르를 여러 번 가는 기회 비용'에 대한 고민에서 공감을 살만한 감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사르와 가니에르를 비교했을 때, 저자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가니에르의 판정승을 선언한다. 파사르는 분명 비슷한 위상을 가진 요리사들이 이미 완성된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팬서비스를 위한 시그니처 요리에서 여생을 정체로 보내는 것과 대조하면 급진적인 요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매혹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일부분을 인용하자면, 평가는 극단적이다. 동물성 지방을 배제한 채 무엇으로 농도를 냈는지도 모를 소스는 질감이 거칠고, 채소는 쓴맛의 강도를 통제하지 못한다. 프랑스를 수놓고 있는 요리사들은 더 튼튼한 근력, 훨씬 더 풍부한 상상력, 훨씬 더 큰 야심, 압도적인 긴장감으로 완성된 '어느 하나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요리의 향연을 선보인다면, 파사르의 요리는 텃밭의 마법에 기대고 있다.
와인리스트 또한 평론가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다. 리스트를 새로 인쇄하기를 포기하고 소진된 와인을 취소선 처리하는데, 너무나 많은 와인들이 취소선 처리된 것이 마치 빛나던 과거가 사라진 흔적처럼 남아 있다.
평론가가 다른 객석에서 있었던 일을 전문으로 전하는 것은 통상 독려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는 라르페주가 북미의 관광객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식당이 되어버렸음을 말하기 위해 하나의 장면을 인용한다. 화이트 와인은 너무 차갑고, 서비스 직원들은 모든 요리가 대단히 특별한 것처럼 소개한다. 그 결과 손님들은 "amazing!"(백합, 그린빈, 연보라색 라벤더 소스), "oh, my god"(양배추 롤, 번행초, 체리-비트-시소 소스) 같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가니에르의 요리에 대해서는 특유의 여러 요리를 한 번에 수놓아 엮어내는 스타일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고, 따로 놓고 보면 훌륭하지만 연결했을 때 의도를 알기 어려운 지점이 늘어났다는 정도의 비평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번 기사가 향하는 방향은 개선문이 아닌 앵발리드에 칼끝을 겨누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최종적으로 두 요리사는 이런 점수를 받아들었다. 참고로 전날에 게재된 브르타뉴를 주제로 한 지면에 위고 로엘링어와 크리스토퍼 쿠텡소는 각각 총점으로 18점을 받았다. 기드 미슐랭과 다르지 않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 기사는 지금까지 두 거장이 이뤄낸 그 어떤 것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을 역사책 속의 존재가 아닌, 살아 있는 요리사로 보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도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있다는 생각이 있어 소개해 보았다. 위대한 셰프의 요리라면 반드시 위대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요리는 매일이 달라지는 살아 있는 예술행위이기에, 특정한 시점이나 장소에서의 영광이 다른 실행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실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위대한 철학자의 문장이라고 해서 모든 글귀가 금언인 것이 아니고, 위대한 미술가의 손길을 거쳤다고 해서 모든 그림이 역사를 바꾸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요리야 어떻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주방에서의 경험도 아닌, 미디어에서 연출된 요리사의 성공에서 주방의 성공을 추론하고, 그 주방의 성공에서 다시 인간 자체의 위대함을 추론해낸다. 위대한 셰프의 손을 거치면 공산품도 맛이 달라져야 하는, 그런 환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고, 그 현실을 보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 마지막의 배경으로 가져온 요리의 소개도 의미심장하다. 라르페주는 직접 가꾸는 정원에서 온 채소를, 가니에르는 파리의 '오트쿠튀르 농부'로 유명한 야마시타 아사후미의 채소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