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AKO IWAYANAGI SALON DE THÉ - 아침식사 여행

ASAKO IWAYANAGI SALON DE THÉ - 아침식사 여행

부끄러운 일이지만 꼴에 음식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삼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루에 식사 세 번을 챙겨먹지 않는다. 불행한 현대 도시인의 일원으로서 아침에는 에너지원보다는 중독성 물질에 더욱 목이 마르다-그것마저 자주 관두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아침 식사는 여러가지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20세기적인 가족상에서 아침 식사는 희생과 배려를 떠올리게 했다. 일부 고통스러운 공동생활의 기억에서도 그렇듯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굳이 다른 구성원보다 빠르게 기상해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감각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기도 했거니와 현대인은 아침부터 해야할 루틴이 막대하므로 식사는 가장 천대받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노고를 부담해야 한다. 이후에 아침 식사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불어넣어준 것은 중화권에서의 경험이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아직 아침 식사는 가정의 몫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중국 일부 대도시에서만큼은 아침 식사란 주로 사먹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량으로 조리할 때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메뉴부터 기호를 챙길 수 있는 것까지 선택지가 생기고 그 속에서 다양성도 발달하는 모습을 보고 아침 식사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 식사는 준비의 단순함, 취식의 간편함, 그리고 효율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예술이다. 물론 내가 살며 겪어온 아침 식사의 가장 많은 형태는 저녁의 연속, 즉 잔반식이었다. 탕국부터 나물까지 '먹고 남은' 라벨이 붙은 것들, 역시 지은 지 시간이 지난 밥 따위가 아침을 시작이 아닌 끝나지 않은 끝, 마치 화려한 피날레 뒤의 무대 철거 작업을 연상케 했다. 물론 그런 식탁에서도 약간의 사랑을 느낀다면 홀로 생기를 뽐내고 있는 노란 달걀 덕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현대 한국식 조식도 흥미로운 지점이지만, 오늘은 아침 식사로서의 빵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빵식과 밥식 중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따지지는 않겠지만, 외식으로서의 아침 식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문화는 빵식이다. 쌀 문화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중국인들 마저 아침 식사에는 정격의 쌀밥 식사보다는 간소화된 죽이나 전병 따위가 우세하다. 앞서 언급한 아침 식사에 요구되는 특성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 전철을 타고 15분 여를 걸은 시점에서 전형적인 아침 식사라는 그림은 무너진지 오래다. 당연하게도, 이날의 아침 식사는 하나의 연극에 가까웠다. 아사코 이와야나기 살롱 드 떼는 그야말로 한적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어, 아침 8시에 열지만 분주한 기색이 없다. 심지어 2층으로 한 층을 올라가기까지 해야 하니 아침의 황금률인 편리함과는 이미 작별한지 오래다. 다르게 말하면 그 정도 의지를 가진 거짓말쟁이들이 모였다. 인류가 지금까지도 내려놓지 못한노동의 굴레가 낳은 바쁜 일상의 맛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궁금한 사람들이 모여 한가한 아침을 보낸다. 그 메뉴마저도 참으로 역설적인, 아침에 먹는 파르페다.

계절 수프, 돼지감자와 크림, 그라인딩하지 않은 흑후추, 겨울 버섯, EVOO

파르페를 먹기 전에 먼저 따뜻한 음식을 마음껏 먹게 되는데, 사실 파르페 쪽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요식행위에는 큰 재미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 수프의 튼튼한 질감을 맛보고 아주 약간 후회했다. 얼마 전에 생긴 갈레트를 먹을 걸. 돼지감자의 향은 분명 잘 다듬으면 아주 아름답고, 이 수프가 그랬다. 미립자로 만들어버리지 않은 후추가 뽐내는 아침의 생명력은 얼마나 상쾌한가.

이 빵 덩이는 그보다도 큰 인상을 남겼다. 식빵. 어쩌면 동아시아권에서는 아침 빵의 왕좌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다. 크로아상에 커피니 잠봉 뵈르니 하는 구대륙의 역습이 있었지만 아침 식사는 커녕 일상의 영역에도 범접하지 못하고 있다(그 가격 때문에라도). 하지만 그 식빵의 위상에서 토스트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당장 지난 겨울에 다룬 식빵 역시 그랬다. 하지만 아사코 이와야나기의 식빵은 반동적이다. 위대한 발명가 오토 프레데릭 로웨더가 정의한 식빵의 표준 두께를 완전히 이탈하는 두께가 일상의 사물을 하나의 오브제로 만든다. 굽는 것은 어떠한가. 빵의 속을 한 번 강한 열로 굽는 토스트 식빵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덩어리 빵의 피가 흐르는 듯, 껍질은 단단하고 두터우며 속은 다소 느슨한 듯 여유롭다. 상단이 부풀어오르긴 했지만 사각 없이 표면적이 전부 단단하게 구워져 있어 단순히 반죽을 틀에 붓고 뻔한 온도로 굽는 식빵에서 이탈한 레시피를 사용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물론 아침부터 그런 것을 따지고 들기에는 어려웠다. 논쟁과 사고는 오전에 어울리는 작업이 아니기에(당신이 여행 중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만큼 파격적이며, 그럴 이유 있는 빵이었다는 감각만은 남는다. 주어진 식기가 튼튼한 크러스트를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므로 결국 잡아뜯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서서히 녹아드는 버터가 문명인의 긍지를 부여잡도록 돕는다. 따스한 표면에 두껍게 썰어놓은 버터가 천천히 녹아들며 이내 식빵은 한껏 젖은 상태가 되고 마는데, 버터를 바른 채로 기다리는 빵이라니 그 가능성을 왜 몰랐을까? 입안에서 버터를 녹여 먹은 경험은 무수히 있어도 빵에 버터를 바른 채로 녹을 때까지 기다려본 적은 없다. 그 위력은 실로 상당했다. 생크림을 넣은 듯 지방 느낌 푹신한 식빵에 다시 한 번 녹아든 버터는 편리함을 바탕으로 한 최소한의 만족감이라는 아침 식사의 규율을 넘어 쾌락의 아침 식사를 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아침의 파르페는 본격적인 쾌락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 역시 자리가 맞지 않았던 것일까, 감탄에 가까운 쾌락을 낳지는 못했다. 분명 재밌는 음식이고, 아침이 아니었어도 재밌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가타의 서양배라니 당연히 르 렉티에(Le Lectier)를 썼을 것이다. 서양배가 가진 특유의 화사한 향과 약간의 씁쓰름-쏘는 느낌(tangy). 최상단의 세이지부터 배와 홍차로 이어지는 상쾌함이라는 키워드는 영민하다. 서양배의 소르베 또한 정말 전형적인 기대를 충족한다. 하지만 이미 따스한 요리에서 마음을 꽉 채워버렸기 때문일까, 아침부터 파르페를 먹는다는 폭거는 좋은 식빵 앞에서 장난으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사코 이와야나기는 과거 "어디에서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똑같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면 타협하지 않겠다는 제과사로서의 마인드가 멋졌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소 충동적일 때도 있고, 덧없을 때도 있는 자유로운 세계를 그려나가는데 여전히 그녀의 열정은 통하고 있었다. 아침의 단맛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