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참 - 제주 네그로니

바 참 - 제주 네그로니

미식을 지향하는 공간에서 시그니처 메뉴의 존재는 특별하다. 스스로가 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는 등 그것이 생성되기 까지의 과정은 통일적이지 않지만, 그 존재의의는 통일적이다. 그들의 요리가 가지는 독특한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요리가 바로 시그니처다.

이런 측면에서, 제주 네그로니는 참의 시그니처로 밀어붙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곳 메뉴의 특징들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가운데 만듦새에서 독보적이다. 칵테일 르네상스의 기법-인퓨징, 지역 식재료의 사용-둥굴레, 그리고 기반은 클래식 칵테일이나 뉴 에라 클래식의 변주-네그로니. 서울에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 편하게 만들어지는 메뉴가 족히 오십 가지는 되겠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많지 않은데, 제주 네그로니는 그 중 기억에 남는 몇 안되는 예외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존에 존재하는, 클래식 내지 타인의 아이디어 변주가 지루한 이유는 주로 변주에 잡아먹혀서 본인이 무엇을 하는 지를 잃기 때문이다. 더 비숍 정도면 가장 좋은 축에 속한다. 변주를 위해 사용된 기법이나 재료들에 잡아먹히지 않고, 토디의 들척지근함이 주는 편안함, 두 종류의 술이 섞여 연출하는 연말연시의 분위기를 잊지 않았으니 말이다. 안 좋은 쪽 이야기는 굳이 하지 말자. 객석에서 "신기하다" 이외의 반응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는 경우들은 이미 너무나 많다. 제주 네그로니는 다행히도 전자에 속한다. 이 칵테일은 네그로니의 레시피 뿐 아니라 네그로니의 맛도 무대로 삼으며, 이러한 칵테일은 그렇지 못한 것들보다 한 단계 높은 세계에 위치한다.

귤껍질향이 제스트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범 오렌지 계통의 탑노트가 감각을 도취시키지만 우리는 정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왜 네그로니인가. 진이랑 베르무트를 섞을 수 있는 레시피는 많다. 칵테일의 "왕" 마티니 선생님을 왜 미루었는가. 왜 이탈리안 베르무트인가... 네그로니는 그 스스로 답을 가지고 있다. 달디단 이탈리안 베르무트는 진-프렌치 베르무트가 가지는 청명한 조화를 생각하면 절대 틀릴 것 같지만, 프렌치 베르무트에게는 다른 친구들이 있다. 미국 위스키와 만나면 맨해튼이며, 마라스키노 리큐르의 도움을 받으면 마르티네즈다. 마르티네즈를 열어보면 네그로니의 답도 나온다. 진의 머리를 깨는 쌉싸름함과 베르무트의 뿌리맛은 이어지지만, 단맛의 짝을 찾는 데서 주로 문제가 생긴다. 마르티네즈라면 마라스키노 리큐르가 가세해 단맛과 쓴맛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네그로니에서는 캄파리가 플레이어가 된다. 기주와 강화와인이 팔레트를 이미 전부 장악한 상태이므로 수많은 부가물들은 단지 불청객으로 남지만, 캄파리는 살아남는다. 단맛과 쓴맛, 뿌리의 상쾌함과 과육이 남긴 rich-ness 모두와 어우러진다. 결론적으로 네그로니는 캄파리의 묵직한 존재감을 느끼면서도, 잔을 비울 즈음에는 여전히 기주와 베르무트가 기억으로 남는 웃기는 칵테일이 되어야 한다.

제주 네그로니는 이 완성된 레시피에 소주를 우겨넣는게 목적인, 일방통행의 칵테일이다. 우리술을 쓴다는 목적이 앞선다. 보통 이 목적에 잡아먹히는게 거의 대부분이다. 우리술 맛없으세요 하는 식의 협박이 대부분 아닌가. 다들 소주니 막걸리니 덮어놓고 맛있다고 하니까 그게 통하지만 글쎄올시다. 하지만 제주 네그로니는 그렇게 게으르지 않다. 오히려 이 문제를 신통한 처방으로 해결하는데, 둥굴레를 채운 고소리술이 주인공이다. 차조와 쌀으로 떡을 지어 만든 증류주, 즉 광의의 소주에 속하는 고소리술이 기주를 맡지만 마치 보드카 마티니가 성공하듯이-수구세력들의 존재를 알지만 보드카 마티니도 마티니다- 어우러진다. 보드카 마티니가 보드카를 위해 시트러스나 비터스를 올린다면 고소리술에게는 다크 초콜릿을 떠올리게 하는 팔레트의 노트가 그 자리를 맡는다. 스테비아로 편하게 더한 기주의 저급한 단맛에 제대로 된 얼굴을 불어넣는다. 팔레트까지 이어지는 시트러스향, 그리고 캄파리가 이어주는 쓴맛은 이 칵테일을 즐길만한 물건으로 만들어낸다.

독특한 초콜릿 노트는 이러한 아이디어가 단지 장난이 아님을 보여준다. 큰 설득력을 지닌다. 이에 더한 시트러스의 생존력은 음료에 대한 고민의 결실이다. 하지만 좋은 점들이 있으니 다 좋은 건 물론 아니다. 처방전에 따라서 조제했음에도 한계는 있다. 기주는 이미 시트러스 향을 지닌 진-탱커레이 텐-이 할 수 있는 일을 온전히 대신하거나, 그보다 낫다고 하기는 어렵다. 진이 지닌 유쾌한 쓴맛이 없고, 초콜릿 향이 강하되 향의 복잡함은 모자라 음료는 전체적으로 잘 만든 네그로니의 기준에서 단맛에 상당히 치우친다. 네그로니 레시피의 특성상 단맛을 덜어내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추구해야 할 방향도 아니지만, 제주 네그로니가 이 분야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네그로니는 이 바를 찾아갈 이유를 만든다. 어쨌거나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닌 무기들, 우리가 겪어온 삶의 시간들을 활용할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음료를 마시는 문화가 일상에 한 발짝 더 다가올 수 있는데 기여한다. "몇 년동안 마셨냐, 뭐 마셔봤냐, 얼마 썼냐"가 전문가의 자격을 수여하는-그래서인지 증류소 가이드 투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유튜브 채널이 한 두개가 아니다- 이상한 시대에 맛으로 말하는 몇 안되는 주장이며, 개중에서도 굉장히 들어볼만한 의견이다. 둥굴레를 재운 고소리술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맛보며 나는 이 도시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