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H. - 국제 네그로니 주간

한국어로는 발간도 되지 않는 매거진 「imbibe」에서 매년 개최하는 네그로니 주간은 호오를 떠나 칵테일 업계에서 썩 크고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았다. 전국 XX의 날 같은 마케팅은 정말 썩어나도록 많지만(특히 미국에는 더 많다) 임바이브는 잡지 자체가 재밌기도 하고, 네그로니 덕분에 먹고사는 캄파리라는 회사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덕분에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의미 있게 존재하는 축제가 되었다.

가볍게 운영하는 바에서는 행사를 맞아 스터나 많이 하면 되겠지만 이 행사를 발판으로 무엇인가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생각은 달라진다. 포 시즌스는 COVID-19 시기 푸어드 바이 포 시즌스에서 재미를 보았는지 이번 네그로니 주간을 APAC지역 포 시즌스의 협업 행사로 만들었는데, 그러다보니 한 편의 네그로니 코스가 차려졌다.

이런 종류의 기간 한정 메뉴를 구성할때, 특히 그걸 특정한 주제로 구성할 때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포 시즌스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럭셔리 호텔이 그렇듯이 오는 사람이 계속 오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크고, 그런 객이라면 자연히 기간 한정 메뉴는 전부 해치우겠다는 마음이 자리한다. 따라서 어쩌다 마시면 괜찮은 한 잔이 아닌 메뉴의 음료간 유기적인 연결이 필요하다. 음료들이 너무 같은 방향을 향해서도 안되고, 연출하는 방식에도 차이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네그로니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서는 안되니 과연 그런게 가능했을까?

Seoul Negroni. Charles H, Four Seasons Hotel Seoul.

나는 "카페 네그로니"를 제외한 세 잔을 롱 드링크부터 온 더 록, 숏으로 이어지는 순서로 마셨다. 다르게 말하면 이미 이런 방식으로 메뉴간의 유기적 연결을 선보이고 있었다는게 보이지 않는가? 정석인 네그로니와 유사하게 연출한 것은 한 잔 뿐이었고, 나머지는 네그로니의 맛 프로필을 바탕으로 연출한 다른 방식의 칵테일이었다.

첫 타자인 「서울 네그로니」는 기대 이상이었다. 바텐더와 이에 대해 일부러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아메리카노임을 직감했다. 그야말로 bright idea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그로니의 탄생 비화가 바로 아메리카노를 숏 드링크로 만드려고 했다는 데 있지 않은가? 키스 모시가 떠난 찰스 H.에서 두 바텐더가 만든 이 칵테일은 그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메리카노는 본래 서울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우리는 서울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또 다른 아메리카노를 떠올린다. 바로 카페 아메리카노다. 카페 아메리카노처럼 롱 드링크로 돌아온 네그로니라. 재밌는 주제였고 팔레트의 네그로니-스러움 역시 풍성하게 존재하고 있어 첫 잔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Carretera Negroni. BKK Social Club, Four Seasons Hotel Bangkok at Chao Phraya River

네그로니 하면 그래도 좀 이탈리아가 맞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있지만 BKK 소셜 클럽의 네그로니는 한국 포 시즌스 보도자료에 의하면 스페인의 도로라고 하는데 말도안되는 오역이라 생각한다. 방콕의 필립 비쇼프(Philip Bischoff)가 만든 칵테일으로 의도적으로 진이 아닌 메즈칼과 커피 등을 이용해 거의 캄파리 바탕의 새로운 칵테일을 빚어내고 있는데, 여기서 스페인어는 남미 스페인어라고 생각하는게 타당하지 않겠는가? 얼핏 듣기로는 뭐 나라 몇개를 관통하는 도로를 컨셉으로 했다고 해서 당연히 팬아메리칸 고속도로Carretera panamericana라고 생각했는데, 내 추측이 맞으리라. 아니, 작년 푸어드 바이 포 시즌스에서도 그가 출품한 제품은 남미 모티브가 아니었는가? 개탄스럽다.

부차적인 서류 문제를 떠나 그래서 음료가 어땠느냐 하면 솔직히 조금 놀랐다. 잔의 형태를 보면 알겠지만 잔에서 스터해서 완성할 수 없는데 그런 물성을 나름대로 비슷하게 모방한데다가 어린 에스파딘 메즈칼의 피트와는 또 다른 그을린 향이 미들 노트의 커피와 자연스레 엮인다. 팔레트는 열대과일 특유의 신맛으로 가벼움을 연출하면서도 향은 짙은 어두움을 연상케 하는 노트로 가득 채워 어느 쪽도 네그로니가 아니지만, 중간 즈음에는 네그로니가 있을 것 같은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Black Pearl. Argo, Four Seasons Hotel Hong Kong

포 시즌스 서울의 옛 헤드였던 로렌조의 출품작인 블랙 펄은 기함답게 지나치게 막강한 맛을 가지고 있어서 다음 잔으로 가려던 나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쯤 되니 아예 보틀 숙성, 즉 레디메이드로 완성해버리는데 원래 레시피가 이렇게 주어진 것인지 궁금했다. 찰스 H.라는 공간이 소비되는 현실적인 맥락을 감안하면-사실 국내 대부분, 어쩌면 세계의 상당 부분의 바와 레스토랑이 마찬가지다- 미리 만든 칵테일을 잔에 따라내건 단지 보여주기 위해 섞다 만 음료를 내건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온도와 농도를 얼음을 이용해 조절하는 칵테일이라는 액체 요리의 매력은 인위적인 힘에 의해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물성에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선대의 방식은 지나치게 영리했다. 나쁜 맛은 결코 아니었다. 불바디에에 치나르를 끼얹은 뒤 네그로니랑 불바디에 차이는 바로 거기가 아니겠느냐 농담조를 건네는 듯한 느낌인데 악력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악수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래도 여러 조치가 덧대지기는 했겠지만 네그로니의 형태는 구차하게나마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며 퇴로를 구할 수 있지만 로렌조의 네그로니는 자비를 허용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온도가 올라오면 풀뿌리 향이 더욱 다가와서 계속 심취하는 길밖에는 남지 않으니, 원래는 아태지역 곳곳의 포 시즌스 중 고작 3곳만 섭외한 점에 대해 아쉽다고 하려고 했는데 정작 서울의 카페 네그로니도 남겨놓고 나오게 되었다.

카페 네그로니는 기존에 있는 칵테일 기주를 공유하는 듯 보였으므로("피그 & 트러플", 물론 나는 겨울 메뉴인 트러플 마티니를 사랑한다) 큰 미련은 없었다. 네그로니 위크에 네그로니 빼고 전부를 마신 듯한 만족감이 들었으니 올해의 행사는 성공했다고 해야겠지. 연결되지 못한 세상 속에서 포 시즌스 서울은 싱가포르 칠리 크랩 특선부터 푸어드 바이 포 시즌스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호텔의 면모를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내부까지 온전한 상태로 버텨냈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이제는 좋은 일만 남았다.

게시글에 대한 최신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