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틴 - 아이스크림 플로트 혹은 아포가토

더 마틴 - 아이스크림 플로트 혹은 아포가토

앞선 글에서 아이스크림을 일종의 다듬어진 요리재료페란 아드리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elaboracion로 볼 수 없을까 하는 욕구는 사실 생각보다 단순한 방식으로도 채울 수 있다. 맥도날드나 롯데리아에 가서 아이스크림 플로트를 먹으면 된다. 대형 프랜차이즈들은 단순히 공산품보다 소량생산품이 낫다는데 기대고 있는 작은 가게들은 쉽게 어기는 황금률, 햄버거에는 셰이크라는 규칙을 지킨다. 심지어 요새 맥도날드는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내놓으며 선택지도 썩 늘어났다. 비록 돌고돌아 흰색을 이기기는 어렵지만, 아이스크림에 우유만으로도 썩 그럴싸한 후식을 즐길 수 있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함께 즐긴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셰이크를 먹기 위해 햄버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다소 부담스럽다. 그리고 햄버거 가게에서는 어쨌거나 주인공은 햄버거니까. 아이스크림 플로트, 혹은 셰이크를 주제로 하는 요리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틴」의 젤라또 라떼라는 다소 어색해보이는 메뉴를 다시 살펴보니 바로 그랬다. 까망베르 치즈 풍미의 아이스크림에 우유, 커피, 아몬드 과자가 뒤따른다. 설명에는 플랫 화이트를 곁들였다고 하지만 뜨거운 커피와 영하의 아이스크림이 만나는 설정 때문에 커피는 직접 조립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에스프레소 샷을 붓기 전의 물건은 영락없는 밀크셰이크처럼 보인다. 우유가 폼을 형성하지 않으니 물 대신 우유로 거꾸로 만드는 롱 블랙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블렌더가 없는 장소(원두 분쇄기에 아이스크림을 돌릴 수는 없다)이므로 아이스크림을 갈아버리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우유에 띄웠으니 밀크셰이크처럼 먹을 수는 없고, 뜨거운 커피를 붓는 것으로 화학적 변화를 더하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까운 쪽은 메뉴에도 자리하고 있는 아포가토의 변형이다.

큰 틀에서 아포가토와 플로트, 두 가지 아이스크림을 활용한 요리의 교차점에 대해서 몇 가지 고민을 곧바로 도출해낼 수 있다. 애초에 아포가토와 플로트, 두 음료 모두 어떤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아포가토부터 이야기해보자. 익사시키다affogare는 말뜻을 지니기는 했지만 잔 안에서는 거꾸로 일어난다. 아이스크림을 커피에 빠뜨리는게 아닌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붓는다. 물론 본 사안의 경우 이미 우유가 깔린 데다가 아이스크림은 바닐라나 우유맛이 아닌 치즈 맛이므로 아포가토가 맞냐는 답변에는 "그렇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우유의 존재에 대해서는 체리를 붓는 아포가토affogato all'amarena나 초콜릿을 붓는 아포가토affogato al cioccolato로 답변을 갈음하고, 바닐라가 아닌 아이스크림이 허용되냐는 질문에는 하겐 다즈의 레시피로 갈음한다. 애당초 남들이 안된다고 하면 안할 것도 아니고, 아포가토는 엄격한 형식이 요리가 아니다. 애당초 리큐르를 붓는 것도 전형적인 형태인데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서울에서 지구 반대편의 맥락은 별로 중요치 않다.

결과적으로 아이스크림의 표면은 높은 온도에 반응해 빠르게 녹아 잔 아래에는 혼합물이 깔리는데, 본격적으로 맛을 보는 부분은 아직 잔 바닥으로 흘려내려가지 않은 음료를 붙잡고 있는 덩어리의 겉부분이다. 물론 이를 음료의 일종으로 보아 빨대를 꽂고 마지막까지 빨아 마시기도 하지만, 가장 맛있는 부분은 숟가락으로 퍼먹는 윗부분이다. 이 부분은 커피를 붓고 별안간 녹아버리기 시작하므로, 훌륭한 상태는 굳이 추구해야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잠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역시 두 종류를 동시에 맛보는 즐거움이다. 커피는 아이스크림으로도 못 만들건 없지만, 아이스크림은 통상 입에 들어간 이후 녹아가면서 풍미가 드러나는 반면 잘 내린 커피는 잔에서부터 후각 신경을 지배한다. 거기에 더해 아이스크림으로 쑤어서는 끌어내기 어려운 커피의 풍미들까지 더해지니 한층 더 다양한 맛을 한 번에 즐기자는 욕심을 채울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아포가토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첫째로는 당연히 좋은 아이스크림이다. 아이스크림이 모든 맛보기의 핵심이다. 자바요네, 리큐르, 커피, 초콜릿, 그 어느 것을 뿌리더라도 아이스크림과 함께 맛보아야 하고, 아이스크림은 그에 지지 않는 풍성한 풍미-즉 지방-를 지녀야 한다. 녹아도 좋을 만큼 촘촘한 질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다음은 이제 재량의 영역이다. 다만 굳이 하나의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지 않아야 할 이유를 보여야 한다. 그랑 마르니에로도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오늘날 단순히 두 가지가 만난다는 사실 만으로는 설득하기 어렵다.

이 음료(음식?)에서 설득력이 드러나는 부분은 다름아닌 커피였다. 정확한 추출 프로필은 알 수 없지만 풍성한 산미와 무게감을 지닌 커피는 아이스크림이 지니지 못한 과일 등의 풍미와 견과의 향을 더한다. 실재하는 견과가 가볍게 질감의 다변화를 추구하면서 연결고리로 둘을 잇는다. 아마도 매장이 바쁜 덕에+그리고 내가 사진을 찍는동안 주저하는 덕에 커피가 살짝 식어서 아이스크림을 무너뜨리지 않고 촉촉히 적신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그 다음, 플로트, 혹은 쉐이크 유사의 음료로서 우유가 존재하지만 정말 날것의 느낌이라 말을 덧붙이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구성요소의 존재 의의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커피를 위해서라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 음료는 플로트에 커피를 붓는다기보다는 아포가토에 우유를 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 우유는 강한 풍미를 지닌 두 주인공의 빛에 가려 잡아먹힌다. 시각적으로 음료 위에 아이스크림을 덮는 형태이나 실질에 있어서는 플로트와는 여러모로 무관하다. 투명한 잔에 빨대를 꽂아 마셔버리는 설정의 음료가 아니므로 더더욱.

그렇지만 또 다시 이러한 아포가토 유사의 메뉴를 선택할까라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이 그 자체로 좋고 커피가 또 그 자체로 좋다면 굳이 따로 내지 않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과 설탕의 산인 아이스크림에 고압력으로 강하게 우려낸 에스프레소는 이미 논리적인 결함이 적다. 외려 옅게 내린 커피라면 엉망진창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 다만 아이스크림과 함께 맛보았을 뿐이므로 커피의 상세한 신맛이 컵 홀로 서도 유쾌한 부류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유보한다.

나는 이곳의 아이스크림의 팬이지만, 반복해서 먹어본 새 응용 음료는 적절하다('decent')고 표현함이 옳다고 느낀다. 개별 요소들이 잘 갖추어져 있고, 기본적인 문법에서 틀리지도 않는다. 그 다음이 문제인데, 밀려드는 객들과 재빠르게 유리창에 붙는 매진 안내를 보면 그 다음은 기약 없는 기다림이겠지만, 어쨌거나 재료로서 아이스크림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목격할 가치는 충분하다. 보통 오븐이 있으면 아이스크림 기계가 없거나 파코젯이고, 아이스크림 기계가 멀쩡하면 오븐이 없으니, 둘 다 있는 곳에 자꾸 발길이 가는게 필연적이다.

첨언하자면, 많은 아이스크림의 결함들은 장비보다는 사람에게 있어 보인다. 미쉐린 스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세계 유수의 레스토랑의 주방에서도 낡아빠진 카르피지아니 기계로 메뉴 전부를 커버하고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고 심지어는 롯데리아에 들어가는 테일러사의 기계를 갖춘 곳도 보았다. 파코젯을 쓴다면 오히려 이들에 비하면 대단한 장비를 쓰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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