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틴 - 라벤더

더 마틴 - 라벤더

이 신묘한 아이스크림을 몇 번이고 먹었다. 세 번? 네 번?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름이 지나면 사라지겠구만. 모로칸 민트 티의 운명을 빗겨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장르 내에서 탁월한 플레이어라도 요새 아이스크림에게는 셀링 포인트가 없으면 자리가 없다. 하지만 가장 최근까지도 이 라벤더가 매장에 있는 것을 보았고 이제는 결판을 내도 좋겠다는 확신이 섰다. 벌써 삼 년 째 나오고 있군. 이제는 말주머니를 좀 풀어보자.

처음부터 라벤더가 그렇게 기억에 남는 아이스크림은 아니었는데 올 여름의 배치는 잊기 어려운 맛이었다. 무엇이 이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드는가? 바로 쌉싸름한 끝맛이다. 탄닌과는 다른 독특한 자극이 이 아이스크림의 고유한 존재가치를 만든다.

라벤더와 유제품의 궁합은 식음료에서 매우 전형적인 것으로, 원래는 바닐라와 비슷한 용례로 사용되곤 한다. 우유가 지니는 비릿한 뉘앙스를 가리고, 단맛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이다. 밀크 티나, 냉침한 우유 따위에 쓰인다. 그러나 이 아이스크림에서 라벤더는 독특한 역할을 맡는다. 강렬한 꽃향과 단맛의 끝에 떫음이 강하다. pungent, 혹은 camphoraceous, sharp 등의 표현이 어울리는 이 끝맛은 통상적인 아이스크림에서는 결코 허용될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컵에 두 가지 맛이라는 설정에서는 묘한 맥락이 생긴다. 나는 그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여러 번 맛보았고 그 독특한 용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이 풍성하고 짭짜름한 맛이 당기는 종류와는 기가막히게 어울리는가 하면, 사진과 같이 카테킨의 쓴맛과 입맞추면 그나마 있는 단맛마져 가리워버려 엉망으로 끝나기도 한다. 반 컵을 무엇으로 채우냐, 혹은 앞서서 어떤 한 컵을 먹었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는 인상의 아이스크림, 그만큼 맛의 특징이 또렷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왜 라벤더는 이런 맛이 나는가? 말린 라벤더가 잔뜩 함유하고 있는 보르네올, 카포닐린 옥사이드 등이 공범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 수준에서는 '라벤더=리날룰'이지만, 건조한 라벤더에서도 그러한 감각이 그대로 통하지는 않는다. 본래도 톡 쏘는 향이 강한 지중해의 스파이크 라벤더나 그 교잡종들에 대해서는 정확한 계측값이 없지만, 보통 톡 쏘지 않는다는 영국 라벤더 품종이라도 건조하게되면 그 향의 인상은 변한다. 라벤더 증류액의 꽃향 일색이 아닌, 솔향에 가까워 특유의 상쾌함을 형성하는 alpha-muurolol과 beta-pinene 계통의 성분들이 꽃향을 대표하는 리날룰/리날릴 아세테이트에 못지않게 지분을 가져가며, 역시 라벤더 오일에서는 종에 따라 아예 검출되지 않기도 하는 보르네올 등의 쌉싸름한 향미 성분들이 대두된다. 심지어 말리는 과정에서 수분의 잔량이나 말리는 온도 따위도 이러한 향의 수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식을 이 아이스크림에 곧바로 적용할 수는 없다. 사실 깜깜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동유럽에서 주로 연구자료가 나오는데 라벤더가 불가리아가 지도하고 있는 전적으로 동유럽의 상품에 가까워진 현실 덕분이다. 그러나 식품 등급의 불가리아산 라벤더? 그런걸 주방에서 본 기억은 없다. 유기농 재료만 취급하는 이런 경우라면 더더욱 가능성은 없다. 결국 국산 라벤더를 다룰 때는 영국종이냐, 프랑스(지중해)종이냐만 따지는 수준인데 여전히 우리는 모르는 것도 너무나 많고, 덕분에 밭부터 숟가락 앞까지 과정 전체를 통틀어 이 라벤더 맛을 적절하게 통제하기도 벅차 보인다. 많은 이들이 라벤더를 보면 비누만 생각하고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좋은 라벤더의 느낌은 정말로 우리의 삶에서 찾기 어려우니까.

국내에 잘 존재하지 않는 강렬한 라벤더 맛의 아이스크림은 내게 많은 고민을 남겼다. 일단 라벤더 자체가 좀 주방에서 연구 대상이 되기는 되야한다. 생각보다 정말 얼굴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쓰임새도 풍성한 꽃 아닌가. 에르브 드 프로방스에 끼워넣을 수도 있고, 이렇게 우유를 다스리는데도 쓰이고.. 하지만 라벤더는 바닐라가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한다-반대로 바닐라도 라벤더는 넘을 수 없는 나무와 초콜릿 노트가 있지만-, 이 고귀한 쏘는 감각이다. 아이스크림을 연속해서 여러 가지 먹는 경우에, 이 감각은 지친 혀를 달래는 기막힌 휴게소가 되어준다. 반 컵이나 먹기는 버겁지만, 맛보기의 영역에 이른 아이스크림만이 품을 수 있는 고민을 담고 있다. 안젤로 코비토와 후안 로카가 아이스크림을 온도와 물성으로 분해하여 짠맛의 주방에서 되살렸듯이, 톡 쏘는 감각을 품은 아이스크림은 그 존재 자체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단맛을 찾으러 오는 전형적인 아이스크림 팔러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겠지만, 맛보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 있으리라. 아! 아이스크림이란 참으로 우습고도 재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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