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야 호코리 - 모방 의식, Homo Mimeticus
지난 글에서 지로 라멘이라는, 라멘의 파생 장르의 일반화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글 작성 당시에는 마천에 위치하고 있던 이 호코리였다. 몇몇 라멘의 분파들이 한정판 따위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지로는 이제 수도권에서 여러 형태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 멘야 호코리가 새 자리로 옮겨왔을 때, 나는 당황했다. 그들의 간판이 샛노란 빛이었기 때문이다. 노란 간판은 무슨 의미인가. 「라멘 지로」의 레퍼런스중 하나다. 지로 라멘을 하는 곳들은 본점을 본따 노란 바탕에 검정이나 붉은 색의 글씨를 무던하게 새겨넣는 간판을 쓴다. 간판 규제가 있는 교토 정도를 예외로 하면 나름의 룰이 있고 이것은 신자(?)들과 목회자(?)들 간의 일종의 교리 체계가 된다.
대략 이런 싱크이니 과연 복잡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최초는 아니다. 「코이 라멘 지로」의 간판도 노랗다. 그러나 새로이 등장한 이 간판은 나를 또 다르게 생각하도록 한다.
지로 라멘이라는 요리 자체에 대해서는 일전에 언급한 바 있고, 맛에 대해서 논할 이익이 큰 요리도 아니므로 오늘은 접고, 이러한 행위 자체를 나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로의 수입, 또는 일종의 카피. 레시피에는 저작권이 없다는게 요식업계의 통설이고, 인터넷 레시피를 의식할 뿐이어서 지루하다는 이야기는 유럽의 파인 다이닝 업계에서도 나오는 소리다. 국내에서도 당당히 어디서 받은 레시피니 하는 소리를 아는 사람들끼리 돌려서 하지 않는가. 일본 유명 스시집의 레시피, 꼬미나 스타지 시절 해외에서 얻어온 레시피 등등, 레시피고 요리야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호코리의 요리는 나에게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는데, 지로의 간판과 요리의 문법만이 카피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판기에서는 마늘과 야채, 라드 등의 옵션이 존재했다. 흔히 지로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러한 토핑 선택을 또 하나의 절차적 의식으로 만들었는데, 마늘을 넣으시겠습니까ニンニク入れますか?고 묻고 대답으로 나올 수 있는 선택지들을 자판기에 우겨넣은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복제의 격차는 현실적 고민의 산물들이다. 이 가게는 지로를 아주 본격적으로 카피하고 싶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맥락을 알 거라는 기대가 어렵기 때문에, 친절한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일 이 가게가 성공해서 지로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다면 서울에서도 우리가 "닌니쿠 이레마스까"하고 묻고 한국인들이 "야사이또 쇼유또 닌니쿠 마시마시" 하고 있는게 우리의 목표일까?
차슈나 야채를 풍성하게 먹는다면 반드시 이 방법이 유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왜 이 라멘이 유행했을까 하면 역시 이러한 제의의 힘을 나는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혹자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제의적 행위는 어떤 견해나 의견이 아니며, 합리나 과학같은 기성의 논리체계를 통한 이해의 이익도 없다. 단지 만족을 목적으로 하며 만족을 얻는다. 차라리 전혀 목적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으며, 그냥 그렇게 행위하고, 그 다음 만족이 자리한다. 이런 서양 철학자의 주장도 딱히 검증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제의라는 것이 무시되거나, 또는 단편적으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지로는 일종의 컬트다. 묻고 답하기는 단순한 질의응답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콜コール이라 불리는 절차다. 사실 우리가 이런 것을 숭상할 필요는 없는게, 멀리서 보면 그들만의 희극이 아닌가. 여러분은 비빔밥을 비비거나, 택시 기사들이 기사식당에 가는 행위에 이름을 붙이는가. 식사 후의 믹스 커피에 별명을 붙여본 적이 있는가. 행위 자체에 특별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특별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명백히 지로의 관람객들, 어떻게 보면 일본 라멘 씬의 관람객이다. 본 블로그에서 "일본의 유행"-"한국의 복제"형식으로 라멘을 종종 다루었는데 이 땅에서의 특권처럼 이러한 카피가 일어나고 있다. 깐깐한 이 라멘의 수행자들은 특정한 형태의 요리를 하는데 정통성 따위를 요구하면서 가게 계파도를 그리고 앉아있다. 그 사이에서 간판부터 주문의 방식까지, 접시 바깥에는 요식행위가 생기고 그것이 그들을 구분짓은 제의행위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무던하게도 그것을 서울에서 베낀다. 앞서 말했듯, 레시피에는 저작권이 없다. 요리야 합리성만 갖춘다면 여느 곳에서 현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요리 이외의 것들을 복제하고자 할 때,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여 변형될 때, 우리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이미 그런 재현의 꿈은 흔들리고 있다. 이 우롱차마저도 그런 형식의 일부인데, 오리지널은 가게 앞 자판기에서 뽑아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업소의 자판기에서 함께 주문할 수 있고, 친절하게도 캔을 따서 잔에 따라준다. 이쯤 되면 애초에 그런 복각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어렵기까지 하다. 지로의 의식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을 위한 팬 서비스일까. 그렇다면 팬이 아닌 이들에게는 무슨 의미로 이 도시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현상에 대해서 나는 이곳을 탓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런 디테일들을 덜어내고 나면 완성도가 좋은 라멘을 팔지 않는가. 라멘을 먹는 도중 주방에서 블렌더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괜찮은 노하우를 알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가게가 생각보다 없지 않은가. 편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로도 감지덕지다. 애초에 같이 붙은 덮밥집과 사이드로 주문한 치킨난반을 보면 그냥 또 다른 일본의 복사본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 곳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싱크로가 높아지니 낯익음에서 오는 두려움unheimlich을 느낄 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지나치게도 늘어나고 있고 나는 불유쾌함을 느낀다. 업계 자체가 지저분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특히 일본을 베끼는 경우가 그렇다. 베끼는 것도 베끼는 것이지만 음식, 요리, 문화에 대한 고찰이 "일본 모 명점의 것이므로"에서 "그러므로 좋습니다"로 논증이 끝나기 때문이며, 또 판매의 방식에 있어 그 레퍼런스를 모르는 사람은 마치 그것을 오리지널로 받아들이게끔 침묵하기 때문이다. 서울이 파쿠리의 도시가 되거나 말거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단지 일본 어디께에서 빌렸기 때문에 좋은 요리, 좋은 인테리어가 되고 소비자들은 그것이 어디 요리인지 누구 그림인지 모르니까 창작품인 줄 알고 산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의 가능성은 죽고 나아질 가능성도 현저히 낮아지는 것은 지극히 이치에 부합하는 일이다. 차라리 멘야 호코리는 그런 치들에 비하면 매우 정직하고 올바른 편이다. 알아보기도 쉽고 물어보면 알려줄 의향도 충분하다. 간판에 써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한 번의 검색으로도 레퍼런스를 알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해도 좋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는 이런일들 '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이다. 특히 일본을 원류로 하는 경우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곳부터 한 끼 식사로 간단히 떼울만한 한 그릇 요리까지 "일본-따라서 좋다-그리고 레퍼런스에 대해서는 적당히 침묵"이 반복되고 있다. 같은 공식에서 "이스파한/바닐라 타르트-따라서 좋다-피에르 에르메에 대해서는 침묵"도 있다. 이 도시 전체에 있는 피에르 에르메 모작들보다 에르메 본인의 포트폴리오가 더 다양해 보일 지경이다. 아방가르드 셰프로 유명세를 얻은 피에르 에르메도 일종의 공동체 문화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감이나 동지의식(?)을 함께 제공하는 라멘 지로도 이 도시에서는 본능을 자극하는 비주얼 정도 이외의 요소들은 소거되고 그 존재는 유명세만이 남아 착취된다. 그런 점에서 멘야 호코리는 가장 희망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너무 좋은 곳이라서 이 지로 이외의 메뉴가 자주 품절되는 점이 나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해준다면야 기쁜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