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퀴진 50주년 0. 전쟁 이후 프랑스 요리

요리의 가장 큰 원칙은 있는 그대로 맛을 내는 것이다("Le plus grand principe de toute vraie cuisine, c'est que les choses aient le goût de ce qu'elles sont")는 말은 퀴르농스키가 1930년 게재한 기사 있던 글귀로, 그의 미식에 대한 견해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문구이기도 하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1928년 경부터 파리에서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새로운 요리법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었다. Gauducheau 박사는 인트라소스intrasauce라는 요리법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인트라소스는 장기가 작동하고 있는 동물에게 피하주사로 양념이나 허브 등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그는 이를 통해 고기의 질감이나 맛도 바꿀 수 있음을 선보였다.

The Australian woman's mirror, (1932년 8월 2), Vol. 8 No. 36, p. 41. 좌하단의 기사에 언급

퀴르농스키가 이러한 방식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고자 한 표현이 바로 위의 문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요리가 그렇다고 일부 일본 요리와 같이 건조 등을 제외한 어떠한 가미도 허용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식이었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856페이지에 달하는 장대한 양으로 프랑스 요리의 기록을 집대성한 「Cuisine et Vins」에서 소스는 프랑스 요리의 자부심이자 영광으로, 16세기부터 프랑스 요리의 우월성, 아니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는 탁월성에 기여해 왔다(Les Sauces sont la parure et l’honneur de la cuisine française ; elles ont contribué à lui procurer et à lui assurer cette supériorité ou plutôt, comme on écrivait au XVIe siècle, cette précellence que personne ne discute.)고 하여 일찍이 1920~30년대에 프랑스 요리에서 소스의 중요성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했다.

퀴르농스키는 도댕 부팡(Dodin-Bouffant)으로 더 잘 알려진 작가 마르셀 루프(Marcel Rouff) 등과 함께 궁정, 왕정 미식, 파리 미식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미식, 지역 미식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이들의 미식 개념은 단순히 맛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정치적인 것과도 연관되어 있었는데, 20세기 초 프랑스는 산업의 발전과 함께 눈부시게 발전해 인구수 300만을 기록하는 등 초거대도시로 발전한 파리를 가지고 있는 초강대국이었던 한편, 그만큼 이촌향도 현상이 크게 나타나고 파리 중심으로 모든 문화가 재편되는 것에 대한 불만 역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태였다. 1900년는 프랑스 지역주의 연맹(Fédération régionaliste française, FRF)이 등장하고, 지방 분권 개념이 입안되는가 하면 향토 문학이나 지방 언어를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등장했다. 그러나 1910년대 노동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더니 10년대 말에는 독일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프랑스 내의 애국주의에 떠밀려 지역에 대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만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었던 한편, 반대로 "무엇이 프랑스인가"를 정의할 필요성은 더욱 크게 대두되고 있었다. 19세기부터 등장한 프랑스 토박이(français de souche)에 대한 정치적 광기는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격화되어 프랑스인을 파리 기준으로 규격화하고 있었으며, 에스코피에와 리츠의 집도 아래 프랑스 요리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표준화되기 시작한다.투르느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 오마르 아메리칸(L’Homard à l’Americaine)퀴르농스키는 서적에 실을 당시 Amoricaine으로 오타를 냈다, 코트 드 보 올로프(Côtes de Veau Orloff), 후제 알라 콜버트(Rougets à la Colbert), 포타쥬 멩트농(Potage Maintenon) 등 화려한 이름과 정형화된 레시피가 자리잡은 것은 전적으로 에스코피에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퀴르농스키와 루프, 크로제 등은 파리에서 비롯된 프랑스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지역적 다양성을 프랑스 요리의 개념으로 포섭하고자 시도했다. 퀴르농스키는 요리를 다음과 같은 4단계로 분류했는데(설명 저자 의역 및 편집),

  • 오트 퀴진(La haute cuisine): 최고의 재료를 이용해 최고의 요리사가 만드는 호화로운 요리. 외교용 접대 만찬과 같은 것으로 일반인은 감당할 수 없는 비용과 노력이 든다.
  • 부르주아 요리(La Cuisine bourgeoise): 여주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정집에서 즐길 수 있는 소박한 프랑스 요리. 농촌의 농부, 도시의 노동자, 리옹의 카뉘(직공)이 즐기는 그런 요리.
  • 지역 요리(La Cuisine régionale): 각 지역에만 존재하는 요리. 이 요리를 맛보기 위해 해당 지역에 방문해야만 하며, 때로는 간판마저 없는 수수한 식당에서 발견되곤 하는 요리.
  • 즉석 요리(Quant à la Cuisine impromptue ou improvisée): 버려지거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단순하게 만드는 요리. 채집으로 얻은 야채나 조개와 게, 사냥으로 잡은 가금류와 우유, 버터 등을 이용하여 단순한 조리 도구로 만드는 요리

이전까지 프랑스 미식이 주로 첫 번째에 대해서만 주로 관심을 가졌다면, 이들 작가들은 그 관심을 2번째와 3번째, 특히 3번째로 옮겨놓은 데 공이 있다. 과거 프랑스 요리를 상징하는 것은 무엇보다 궁정 만찬과 외교 만찬이었고, 레스토랑의 경우에도 파리에 위치한 Maxims, La Tour d'Argent과 같은 곳들이 가장 유명했으나, 이들 미식 지역주의자들은 에스코피에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수준 높은 요리를 선보이는 발렁스의 Pic, 솔리외의 La Côte-d'Or 그리고 비엔의 La Pyramide를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격찬하며 미식 여행의 포문을 열었다. 특히 퀴르농스키는 앙드레 픽이나 페르낭 푸앙을 에스코피에와 맞먹는 요리사로 칭하거나, La Mére의 외지니 브라지에(Eugénie Brazier)를 세계 최고의 셰프라고 언급하는 등 다분히 의도적으로(그러나 설득력 있게) 지역 요리사들을 주목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비시 프랑스 시기와 경제적 빈곤을 겪은 이후 프랑스는 다시 부흥했지만 1960년대 이후 부르주아 요리와 지역 요리 문화는 크게 쇠퇴한다. 지역성을 강조하던 흐름은 20~30년대를 이끌던 비평가와 셰프가 모두 늙거나 사망한 상황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을 고 미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es deux tiers de nos foies arrivent dans des containers glacés d’Europe Centrale et d’Israël. C’est le plus légalement du monde qu’ils garniront une boîte de foie gras “du Périgord” ou une terrine “de Strasbourg.”[1]
간은 2/3이 중부 유럽과 이스라엘산으로 냉동 컨테이너에 담겨 도착하며, "페리고"산 푸아 그라 통조림이나 "스트라스부르산" 테린을 만드는 데 이런 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합법적인 일이다.

재료의 문제 이외에도 가스와 전기를 이용한 주방기구 도입, 도시 거주 방식의 변화 등응로 인해 과거에 발굴되었던 지역 요리는 특색을 잃거나 열화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과거에 비평가들이 발굴해낸 요리들은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얻을 만큼 널리 퍼졌지만, 지역적 특수성 등을 간과한 결과 결국 이름만 귀족에서 지역 이름으로 바뀐, 에스코피에의 악몽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앙리 고와 크리스티앙 미요는 이러한 문제가 낡은 기드 미슐랭이 따분하고 보수적인 과거 유명 레스토랑 이외의 곳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뀐 새 프랑스 민중을 위한 새로운 가이드를 주장하는 배경이 된다.[2]

  • 외지니 브라지에, 마리 부르주아(Marie Bourgeois, ✼✼✼), 폴레트 블랑(Paulette Blanc, ✼✼, 조흐주 블랑의 모친) 등이 선보였던 여성의 부르주아 요리, 그리고 그러한 여성 부르주아 요리를 기록한 가장 중요한 문헌인 Le Livre de cuisine de Mme E. Saint-Ange 역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나 분량 관계로 누벨 퀴진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1. “France, ta cuisine fout le camp!” Le Nouveau Guide Gault Millau, 1973년 7월호. pp. 23. ↩︎

  2. Mallory, H. A., (2011). The Nouvelle Cuisine Revolution: Expressions of National Anxieties and Aspirations in French Culinary Discourse 1969 – 1996[박사학위 논문, Duke University]. p.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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