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로지 - 비터스윗 혹은 사틴

트릴로지 - 비터스윗 혹은 사틴

이전에 다룬 적이 있는 곳을 다시 다루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같은 글을 다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의미 없는 글을 쓰자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독자들을 생각하면 결코 질 낮은 글로 보답할 수는 없다.

이전 오픈 이후 일정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트릴로지를 찾았다. 오픈 메뉴부터 주방의 철학을 드러낼 것을 의도하는 레스토랑의 주방에는 오픈 메뉴 테이스팅도 큰 의미를 갖지만, 기존 메뉴가 일부 유지되나 주방의 설비가 바뀌는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여유가 더욱 중요할 것이라 보았다. 매장을 즐기는 객의 집단도 바뀔 것이고 주방에도 그에 따른 새로운 규칙이 설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각설하고, 그래서 찾은 트릴로지에서 두 개의 디저트에 차 한 잔 곁들여 새로 나온 메뉴의 의도에 집중하며 먹었다. 공간의 거의 전부가 주방으로 구성된(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곳에서 개당 KRW 8000~9000에 이르는 작은 케이크를 판매하는 만큼 케이크 안에서 그 가치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두 개를 묶어서 논하기는 마땅치 않아 글을 분설한다.

쓰면서도 달다는 이름 "비터스윗"을 이름으로 내세운 작은 케이크를 두고 이 단어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옮기기 어려운데, 단지 쓴맛과 단맛이 병존하는 경우에 쓰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가 동시에 다가와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모호한 상황을 가리키거나, 단맛이 통상적으로 위치하여야 하는데 쓴맛이 우세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지칭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복잡하다면 복잡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단어는 음식보다도 사람의 감정에 대해 더 자주 쓰이는데, 맛과 감정을 엮는다는 데에서 이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은 잘 맛보기 위한 선결문제가 된다.

이 표현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맛 이전에 감정을 말하는 수단이다.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표현이다. 21세기 아직까지도 Bittersweet라는 말이 우리 삶을 배회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리스의 시인 사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이에 대하여, Carson, A. (1986). Eros the bittersweet.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3.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을 달면서 쓰다γλυκύπικρον고 말하자 전 인류가 그 의미를 느끼고 흐느끼며 전승해왔다. 사랑이란 달고 쓴, 저항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그 짧은 감상의 울림은 2천년을 이어져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달아야 하지만, 쓴 맛이 나고, 그렇기에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전달해주며, 밉지만 사랑스럽고, 후회스럽지만 그리운, 어떤 차원에서는 불합리적이지만 다른 차원을 소환하여 합리화 할 수 있는 그 감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리스 고전을 강독하는 시간은 아니므로, 서구 문화권에서의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한 맥락의 소개는 이쯤에서 멈추겠다. 여러분도 인간으로서 이 감정을, 이 맛을 느낀 기억들이 제각기 떠오를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감각이 어떻게 맛으로 구현되는가이다. 그리스 문화의 후손들은 이 감각을 식물에서 처음으로 감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양조에 쓰이는 사과들이 떠오른다. 탄닌이 매우 풍성한 극단적인 쓴맛의 사과와 평평한 단맛 위주의 사과 사이의 사과를 지칭하는데 이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렇게 삶과 맛은 이어진다. 삶에서 맛이 나고 맛에서 삶이 보인다. 나는 그 맥락을 서두에 밝히고 싶었다.

이 케이크의 이름이 이러한 사고들을 불러일으킨다면, 칼로 잘라낸 단면이 곧바로 떠오르게 하는 기호는 피에르 에르메였다. 또 에르메, 혹은 간만에 에르메, 지긋지긋한 그 이름을 다시 불러내본다.

나는 만물 피에르 에르메 기원론자인가? 결단코 아니다. 나는 초콜릿에서, 커피에서, 한식 디저트에서, 종종 피에르 에르메를 소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케이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과장 보태서 피에르 에르메는 이 케이크가 존재하기 위한 선행조건conditio sine qua non으로까지 보인다.

어째서? 우리는 피에르 에르메의 <사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르노트르의 두 창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에르메의 <사틴>의 본질은 치즈케이크이다. 과연 흰 치즈를 사용하는 이 치즈케이크는 그것의 맛을 만족스럽게, 부끄럽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가? 흰 치즈에게 이상적인 질감은, 이상적인 짝은 어떠해야 하는가? 피에르 에르메는 그것에 대해 패션프루트와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답으로 제시했고, 그 이름을 「물랑 루즈」의 니콜 키드먼의 이름을 빌려 완성해냈다. <사틴>의 탄생, 2002년이었다.

<사틴>은 본질적으로 흰 치즈를 다루기 위한 요리로 시작한 만큼, 그 지방이 전해주는 압도적 행복함이 가장 먼저 자리한다. 그러나 그것을 PH의 눈은 불완전함으로 인식한다. 누군가는 발화자가 피에르 에르메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 고오급 치즈를 듬뿍 쓰지 않아서"같은 핀잔을 들었을 도발이다. 바스크 치즈 케이크의 (곧 잊힐 그리고 또 잊을) 숭배자들의 눈에 얼마나 이단적인가! 그는 이곳에 패션프루트의 신맛으로 환상을 그려낸다. 강렬한 신맛과 과실향은 곧바로 지방을 탐하게 만들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움이 지배하는 질감은 그 욕망을 아낌없이 품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사람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단맛이 아니라 놀라운 쓴맛이다. 시트러스의 껍질에서 발견되는 Zesty로 표현되는 그 쓴맛이 화룡점정이다. 피에르 에르메는 이 세 가지를 조율하여 작은 과자에서는 크림 치즈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마카롱을 만들기도 하지만, 베린이나 아이스크림, 플레이트 등의 형태에서는 오렌지와 패션프루트가 고속으로 들이받아 신맛과 쓴맛으로 사람을 휘어잡는다. 패션프루트의 신맛이 입을 한껏 벌리게 만드는 사이 오렌지의 제스트와 크림 치즈, 설탕이 달콤-쌉싸름의 세계를 연출한다. 모든 것이 파멸로 끝나고 마는, 그렇지만 멈출 수 없는 탐닉. 이 단맛-신맛-쓴맛의 화음이 바로 피에르 에르메의 사틴이다.

「트릴로지」의 케이크는 흰 치즈로 패션프루트와 금귤 마멀레이드를 감싸 곧바로 이 피에르 에르메의 사틴을 레퍼런싱하고 있었다. 껍질의 쓴맛에 있어서는 한참 모자란, 그래서 사랑받는 금귤이 제스트를 대신하고 있는데, 종종 에르메가 그랑 마르니에를 쓰기도 하는 만큼 큰 그림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잘라 입에 넣는 순간 이 미묘한 감정선이 폭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편안해서 거꾸로 불안했다. 치즈의 풍성함에 따라오는 패션프루트의 신맛은 무대에 화려한 조명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신맛 위에 펼쳐지는 단맛-쓴맛이 아닌, 단맛 위에 펼쳐지는 쓴맛의 2차원적 설계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당돌한 맛을 주장하고 있는 금귤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지 그것이 과실negliegence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었다. 쓴맛의 미약함을 바라보니 신맛은 풍성한 편이었고, 그 이유는 단맛 바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이들에 대한 우려가 보였다. 이것은 도약을 위한 밑걸음이었다. 단지 납작한 단맛만을 사랑하는 도시에서 신맛과 쓴맛은 아직 디딤발을 딛는 단계에 있지 않은가.(이 도시의 과일들의 맛을 떠올려보라) 그렇다고 하면 언젠가는 뛸 것이므로 이 균형의 그림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 질감만큼은 참으로 올바르기 때문이었다. 멈출 수 없는 부드러움을 지닌 치즈 껍질은 사틴의 질감의 만트라를 관통하고 있었다. 크림이 입안을 가득 메우는 사이에 향을 피워내는 기본적인 맛보기의 구조는 올바르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가장 봉긋하게 솟아오른 꼭지점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잠깐 피워내고 마는 쓴맛은 모자람이 아닌 조심스러움으로 읽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 그 이름만큼은 "비터스윗"이 아닌가? 적어도 주방에서는 이 요리가 가져야 할 맛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다만 걱정할 뿐이다. 그런 요리는 종종 이 도시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주 핍박받으므로.

총체적으로 만족스럽다고 하겠으며, 완성되었다고 하지는 않겠다.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혁명의 성패가 달렸다고 본다. 여름의 마지막까지 바닐라 타르트의 곁을 지키고 있을 수 있을까?

  • 나는 이곳에서 항상 차를 선택하지만 커피가 이제는 교토 스타일 타워, 즉 콜드브루 한 가지 뿐임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침출하기 위한 장비는 보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요리에 알맞은 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나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나 누군가는 그 답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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