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그랑 자트 - 몽 블랑, 타르트 몽 블랑

라 그랑 자트 - 몽 블랑, 타르트 몽 블랑

"가을이면 몽 블랑" 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슌(旬)을 좋아하는 옆나라 덕은 아니더라도 생선같은 것은 철에 따라 먹는 일이 흔하지만 디저트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을까. 이전에 디저티스트의 몽블랑에 대해 "디저티스트 답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디저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사계절 내내 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그들의 존재의 이유가 되주고 있으며, 몽 블랑이 그들의 책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밤의 문제는 함께 해결할 일이지 단순하게 떠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몽 블랑이라는 과자는 밤이 아니면 맛있어질 수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을 찔린 기분이다. 몽 블랑이 고작 '군밤 너머'라, 이 케이크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참으로도 슬프고 가혹한 글이었으리라. 좋다. 나의 몽 블랑 사랑을 이야기해주지.

몽 블랑이 뭔가? 별로 관심 없는 뿌리를 찾아가면 밤을 크림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알다가도 모를 만큼 예전이고, 애초에 전혀 다르게 생긴 과자도 나온다. 유래건 이름이건 우리는 별 관심이 없고, 보편론으로 접근한 몽 블랑을 왜 먹는지에 대한 기초는 앞서 검토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몽 블랑에 대해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했을 부분에 대한 점을 파고 들어가보고자 한다. 몽 블랑이 좋은 디저트고, 고전이라면, 누가 정했는가? 과연 이게 정말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인가?

당연히 뒤에 따르는 이야기는, 몽 블랑의 역사에서 이 과자가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가진 시간은 길지 않으며, 처음부터 고전의 반열에 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몽블랑은 특히 일본에서 대히트를 친 프랑스 과자로서 중요한데, 이유야 모르지만 밤이라는 소재가 낯선 서구 식습관과 일본의 전통적 과자를 이어주는 매개로서 먹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그래서 몽블랑은 프랑스에서 관심이 꺼져가는 사이에 일본에서 번창한다. 몽 블랑의 본가인 <앙젤리나>가 일본에 상륙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프랑스 과자의 대표주자로 전국토를 뒤덮을 동안 프랑스에 이 과자는 현대 과자들의 발전에 치여 묻힌다. 특히나 가볍고 원재료의 맛을 강조하는 누벨 퀴진의 시대 이러한 과자의 자리가 넓었다는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상할 수 있다.

어쨌거나 양 나라에서 <앙젤리나>가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몽블랑을 사먹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제과에서 재밌는 주제로 많은 파티셰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근래의 일이다. 불과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몽-블랑은 파리의 파티셰 씬에서 '아웃사이더'였다고 L'Express나 Le Figaro같은 매체들이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몽 블랑이 지금과 같이 프랑스에서 파리의 상징적인 디저트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첫째로 결정적 기일Critical Date은 2005년 <앙젤리나>가 베르트랑 그룹에 인수된 날이다. 아르누보와 벨 에포크의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것은 더 이상 프랑스인들의 향수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들이 앙젤리나를 사지 않았다면 앙젤리나의 몽 블랑은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고, 그래서 잊혔을 것이다. 둘째의 결정적 기일은 2007년 4월이다. 셰프 Sébastien Bauer가 앙젤리나에 영입된 직후이다. 피에르 에르메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던 바우어 셰프가 베르트랑 그룹 아래에서 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는 그들의 유산, 몽 블랑과 라프리캉 핫 초콜릿을 현대의 유행으로 재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서 사용하는 밤을 Imbert에서 독점으로 받기 시작했다.(지금은 크렘 드 마롱도 자체 라벨로 나온다. 역시 Imbert 공급.) 그 다음으로 핵심의 지점은 바우어 셰프의 해석이었다. 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그는 몽 블랑이 입 안 가득 부드럽게 적시는 것을 원했다. 따라서 머랭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머랭이 부드러울 경우 이미 속을 크림으로 가득 채운 앙젤리나의 레시피에서 머랭이 가세하면 밤이 흐려질 수 있는, 과잉의 상태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머랭을 단단하게 굳혀 시간차를 둠으로서 밤의 풍미 이후의 여운의 자리에 머랭을 위치시켰다. 밤 크림이 입안에서 녹는 사이 머랭이 제 노릇을 못하는 동안 그 자리를 채울 역할은 풍성한 크렘 푸에테가 맡았다. 휘핑한 크림은 섭씨 4도에서 오버런 70%에 맞추어진다. 왜? 그가 생각한 최적의 밤크림과 정확하게 동시에 녹기 위한 설정이다. 그렇게 크렘 드 마롱과 휘핑 크림은 입안에서 동시에 녹아내린다. 좋은 밤을 사용하여 밤 자체의 풍미의 복잡성과 농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밤 크림 자체의 농도를 조절하고 크렘 푸에테를 개입시켜 구황작물이 주는 무거운 인상을 지운다. 그래서 그의 몽 블랑은 "가볍다"는 인상을 얻는데 성공했다. 몽 블랑의 혁명이다. 가벼운 몽블랑에 끈적하기까지 한 고전적인 핫 초코, 라프리캉이 만나니 고전이 역사적인 현대화의 순간을 맞은 셈이다.

세 번째 결정적 기일도 있을까? 정확하지는 않다. Christophe Appert이 앙젤리나의 새 셰프로 부임한 2012년~2013년부터 몽 블랑은 완전히 파리의 핵심적인 디저트로 떠올랐다. 앙젤리나의 새 브랜딩을 위해서 그는 앙젤리나를 재해석, 8가지 케이크로 그들의 유산의 가치를 표현했다. 물론 몽 블랑도 한 번 더 변했다. 휘핑 크림의 단맛을 더욱 줄인 새 버전이었다. 그가 동시에 내보낸 "에끌레흐 몽블랑"은 앙젤리나의 유산이 자유로운 창작의 도구로 쓰임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파트에 밤을 넣은 몽블랑 앙베르제나 타르트지에 올린 타르트 몽블랑과 같은 것들이 파리를 대공습하기 시작했다. 불과 이삼 년 만에 파티셰들은 그의 이러한 도전을 기회삼아 제각기 몽블랑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바닐라 샹티 크림으로 극단적으로 가벼운, 그러면서도 지방을 떠올리지 않게 만드는 고다흐의 몽블랑, 2014년~2015년경에는 피에르 에르메의 "페티시 몽블랑" 컬렉션과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그의 방대한 포트폴리오부터 토슈 오 마롱을 먹던 어린 시절까지 녹여낸 거대한 컬렉션이 몽 블랑으로 그려졌다. 이후 우리가 접하고 있는 무수한 몽블랑들은 이러한 21세기 이후의 몽 블랑이다.

여기까지, '라 그랑 자트'의 몽 블랑을 이야기하려고 지루한 이야기를 보시느라 정말 고생하셨다. 어떠한가, 아직도 몽 블랑이 단순한 계절 음식으로 보이시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밤을 맛본다"라는 기본값 아래에 자신의 인생과 철학을 녹여내기 시작한 것이 몽 블랑의 유행의 이유다. 높은 칼로리로 인하여 멸시받아 저칼로리, 덜 단 맛의 몽 블랑을 만들고, 밤을 즐기기 위해 피에르 에르메는 꼬냑을 더했다. 밤 특유의 스모키한 향을 증류주로부터 얻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바로 이 몽 블랑 타르트의 레퍼런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바로 Claire Damon이다. 그녀는 갈색의 몽 블랑과 흰색의 몽 블랑(프랑스령 카리브 해의 영토에서 유래한, 코코넛 케이크) 모양으로 새로 정형하고, 그녀를 상징하는 고전적인 원형과 원색을 지닌 타르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끌레르 다몽을 끌레르 다몽으로 만들어주는-카시스를 몽 블랑에 삽입했다. 고온에서 충분히 구운 타르트에는 그에 걸맞는 아르데슈 밤이 상대로 맛의 칼날을 겨눈다. 그러나 둘의 감각 사이에서 헤롱대는 사이 치밀하게 발린 카시스 콤포트가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이것이 끌레르 다몽의 몽블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곧 받아들이고, 다음 한 입을 위해 곧바로 칼날을 부여잡는다.

다행스럽게도 끌레르 다몽의 모양을 따라하지는 않은 라 그랑 자트의 몽 블랑은 정확히 그녀를 레퍼런싱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북이 쌓인 크림이 형성하는 반구형의 모습은 다몽의 표절로 자리할 속셈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밤 크림의 만족도는 아슬아슬한 가운데 크렘 샹티가 전반적인 맛의 경험을 지배한다.

그래서 맛이 없었는가? 어느 정도는 좋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유일하게 제공되는 차의 핸들링도 불만이 없었기에 둘의 호흡은 마치 프랑스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마리아주 프레르를 맛있게 마신 거의 일 년여만의 경험이다. 참 잘 어울렸다. 그러나 크림의 과잉을 감당할 맛으로서 카시스는 납작 엎드린 모양새였다. 결국 고생은 더했지만 고전적인 몽 블랑의 맛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 맛의 설정을 좋아하니 그것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타르트지가 곧바로 잉여로 다가온다. 몽 블랑의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하셨다(위를 참조). 몽 블랑은 부드러운 맛이야. 머랭은 거들 뿐. 타르트지는 특유의 단단함과 넉넉한 포션으로 먹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구운 과자의 맛을 낸다. 이는 크림과는 곧잘 어울리지만 밤까지 어우르지는 못한다. 과일의 역할이 여기서 중요한데 여러모로 실착에 가깝다는 인상을 남긴다.

니가 좋아하는 맛이라며 왜 불만이야. 나는 8800원을 지불했다. 동행이 있었기에 객단가를 위해 구움과자도 함께 주문했다. 케이크를 한 사람에 하나씩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맛보기는 지양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최선의 타협점을 찾았음을 이해해달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바닐라 타르트를 보고 나는 다른 갸또를 맛볼 의지를 잃었다. 설마 이거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한 종류로 만듭니까. 그렇습니다. 오 이런, 마다가스카르 바닐라로만 만드는 타르트 바니의 불행함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한 바 있다.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케이크는 먹고 싶지 않다. 그것도 KRW 9000정도를 지불하라니. 호텔을 제외하면 서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가격을 받는다는 점은 스스로가 알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라 그랑 자트 스타일로 재해석'했다는 몽 블랑은 거대한 의문점이었다. 타르트지로 몽블랑을 굽는 건 썩 오래 전부터 있던 형식이고 쁘띠 갸또로 재해석해 지금과 유사한 모양을 만든 것도 적어도 Christophe Appert 이후로는 단순히 모양만으로 설득될 수는 없다. 이미 본가에서도 매년 11월이면 몽 블랑 주간을 갖고 갖은 바리에이션들을 쏟아내며 그 중 이런 몽블랑 타르트도 물론 있다. 최소한 오 년동안은 나오고 있는 단골 손님이다.

두 가지를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두 셰프의 몽 블랑 타르트와 빗대었을 때 각각 완전 똑같지는 않다. 당당하게 표절하는 곳도 있는 서울에서 이정도면 괜찮지. 그런데 가격이 KRW 8800이다. 나는 라 그랑 자트의 호두과자와 같은 시도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가격을 받는 만큼 자신만의 디저트를 만들겠다고, 케이크의 설명에도 '라그랑자트 스타일'이 언급되며 계산하면서는 '독창적인 시각과 스타일'이라는 문구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가격도 높게 받는다. 구움과자의 가격은 곧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다면 소비자로서 나는 감당할 수 없다.

스스로 그런 기준에 만족하는 디저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는 서울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라 그랑 자트의 스타일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몽 블랑을 보고 깨달으셨는가? 몽 파리, 바닐라 타르트와 함께 있을 때는 깨달음이 오는가?
나는 결코 서울의 파티셰들을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피에르 에르메도 포기한 시장이지만 누군가는 결코 프랑스인들, 여느 파티셰들에 뒤지지 않는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디저트를 만들고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결코 서울의 디저트라고 해서 현저히 낮은 기준으로 평가할 생각이 없다. 왜 서울 소비자는 적당히 남의 것을 참고하다가 만 디저트를 두고 칭찬만 쏟아내야 하는가. 이 몽블랑은 KRW 8800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못해도 올해가 이걸 만드는 게 삼 년이다. 충분한 가격이고 충분한 시간도 있었다. 모양을 보면 만드는 기술도 결코 부족하지는 않다. 그 다음이 필요한 때다. 몽 블랑의 맛이 무엇인가. 몽 블랑은 우리 사회에서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몽 블랑을 나는 먹고 싶다. 번역의 과정에서 생기는 오탈자가 느껴지는 듯한 디저트는 이제는 그만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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