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라 - 만 원의 벽 2

라무라 - 만 원의 벽 2

지난 글에서 라멘의 "천 엔의 벽"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정작 라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냈다. 만 원 위의 라멘이란 어떤 모습이고, 사견에는 어때야 하는지 이야기할 거리.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벽인 만큼 정말로 만 원을 넘는 메뉴를 내는 라멘은 생각보다 잘 없다. 당장 앞선 오레노라멘마저 미쉐린 가이드를 등에 업고서도 9천원에 묶여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본래 라무라 이외에 만 원 이상을 받는 가게 두어 군데를 더 섭외할 예정이었으나 매진 및 임시 휴업 등으로 뭇매를 맞고 쫓겨났기에 라무라 이외의 곳은 취재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안되길 다행이다".

애초에 만 원보다 비용을 더 치르는 한 끼 식사에서 라멘을 생각하고 떠난 길이므로 사이드까지 전부 주문하려 했으나 한 가지만 준비가 된다고 해서, 음료까지 대략 KRW 20000 언저리의 식사를 차려보았다.

먼저 라멘 이야기부터 해보자. 사실 곁들이 음식이야 라멘이 좋다면 정말 지옥도여도 함박웃음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일단 가격, 비싸다(KRW 13000). 만 원의 벽을 폴짝 뛰어넘었다. 달라진 것? 일단 그림이다. 고구마순을 둘러서 만들었다는 둥지, 둥지 크기에 맞는 알, 그리고 통 닭다리. 자, 살림살이가 여러분을 설득하는가? 그동안 여러 파이탄-닭 기반의 라멘들을 먹으면서, 여러분에게는 아, 조금의 비용을 더하더라도 "플레이팅", 혹은 어떤 동화적인 그림을 라멘에서 즐기고 싶다. 라는 요구 있으셨는가? 글쎄, 나는 이것이 플레이팅이 추구해야할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여느 동네 구석마다 있는 작은 과자가게의 로투스 비스킷이나 오레오를 박아넣은 쇼트케이크들을 떠올리게 한다. 문법이 없는 글, 단지 모사를 목표로 하는 그림. 확실히 느껴지는 것은 "어쨌거나 다르다" 이다.

그럼에도 둘러낸 고구마순은 라멘의 맛에 크게 겉돌지 않는다. 적당히 숨을 죽여놓아 풍미를 크게 더하지는 못하되 식감의 변주 정도의 기능은 해낸다. 그러나 과도하게 둘러낸 차슈의 산을 보고있자면 그림은 좀 더 또렷해진다. 그릇 위에 백화점을 차릴 셈인가!Bean, T., & Fowler, W. (2002). Russian tanks of World War II: Stalin's armoured might. Hersham, Surrey: Ian Allan.- 사실 이 유명한 "포탑 백화점"농담은 러시아어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보관 온도가 낮은데 비해 적절히 데워서 내지 않아 실제 온도에 비해 더욱 차게 느껴지는 닭 가슴살은 짙은 국물의 짝으로 그나마 봐줄 수 있다. 순살로 저며낸 작은 차슈는 조금 더 전형적인 차슈의 역할도 해낸다. 문제는 이 가격을 설득할 하이라이트, 닭다리에서 폭발한다.

언뜻 보기에 차슈의 문법을 그대로 닭다리로 옮겨왔을 뿐인 이 막대기는 차슈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첫째로는 지방이다. 차슈와 유사한 조리법을 응용했을까? 닭중에서는 기름이 풍성한 부위에 속하지만 돼지고기의 비계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닭다리는 면-국물의 가락에 맞추어 부드럽게 취식할 재간이 없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풍미도 오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토치질을 해서 살려내려는 발버둥을 쳐보려 하지만 전체적으로 껍질부터 가장 안쪽까지 살아있을 때보다도 흠뻑 젖어 물러질 대로 물러진 상태였다. 지방이 한껏 빠져나간 느낌의 닭다리살은 그야말로 잉여였다. 양념이 짙게 밴 차슈처럼 풍미의 층을 더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전체적인 편한 요리의 만트라에서 벗어나지는 않아야 하는데, 친절하게도 취식을 위해 추가적인 도구까지 이용해야 하는 현실이 이 다리의 존재 이유를 0으로 수렴하게 만든다. 돼지고기 차슈와 비교해 어느 한 곳 앞서나가지 않는다. 도저히 씹을 수 없는 뼈가 있고, 바싹하거나 부드럽지 않고, 풍미가 옅다. 이것을 위해 얼마를 더했나. 뼈를 담을 접시까지 더하면 더 이상 한 그릇 요리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끝난다면 본지에 게재할 이유가 없는, 관광지 요리같은 것으로 치부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스프가 지나치게 멀쩡하다. 그래서 닭다리는 더욱이 필요성을 잃는다. 이미 이 닭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액화의 과정을, 화학적 변화의 극을 겪었다. 두텁지는 않지만 크게 모자라다고 꼬집을 정도는 아닌 스프의 지방에 이미 얹어진 파부터 테이블에 놓여있는 것들까지 국물 위에 적당히 얼굴을 그릴만한 부재료들도 이미 있다. 닭이 보이지 않지만, 더욱 완전한 닭 요리. 닭 라멘. 원래 그런 요리다.
그러나 그 닭이 접시 위에 살아 돌아오자 우리는 더더욱 당황한다. 이 닭다리를 뺀다면, 즉, 다시 메뉴판의 만 원 이전으로 돌아가면 더욱 완전한 요리가 될텐데. 이미 완성에 다가왔을 요리가 만 원의 벽을 넘으려다 공연히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것이 철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덜 나은 음식과 더 나은 음식, 일상의 음식과 특별한 날의 음식을 나누는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 라멘은 이미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그것도 먹을 수 없는(한국에서는 먹는다만) 닭발이나 잔뼈까지 우려서 만든다. 한국에서 통상의 조리법인 튀김으로는 도저히 먹을 재미가 나지 않는 부위들이 액화함으로서 그 맛을 꽃피운다. 먹기 편할 뿐 아니라 양 또한 든든하게 불어나므로 한 그릇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우주가 된다. 미국에서는 베이컨, 일본에서는 멸치와 다시마같이 감정적인 부분마저 자극하는 요소들이 개입하는 곳 또한 스프다. 라멘이 일상을 넘어 특별함의 영역으로 넘어가려면 생각건대 그러한 요소가 위치해야 할 곳은 역시 스프다. 그런데 이 라멘은 대신 스프 위에 산을 쌓아서 그것을 극복하려 든다. 심지어 그것들이 특별하지는 않더라도 일상에 머물기에는 좋다고 해도 좋을 스프를 가리는 지경이다. 도대체 왜? 이유야 간단하다. 궁여지책이다. 무언가 특별한 라멘에 대한 필요성은 느낀다. 그것이 바로 이곳이 되면 라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도, 또 생계가 달린 자영업자로서, 또 피고용인으로서도 모두 윈윈 아닌가. 그러나 숨겨진 패배자는 있다. 바로 미래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급 외식, 특별한 식사를 찾아 나설 서울의 누군가. 바로 이 글의 독자들과 나.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좋은 라멘이라는건 이런 길로 얻어질 수 있는게 아니다. 카메라의 피사체 내지 농담거리는 될 수 있어도 좋은 라멘은 아니다. 혹시 몰라 누누히 밝히지만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무리" 이런 주장을 하는게 아니다. 도쿄의 「UMA TSUKEMEN」이나 「Due Italian」처럼 시각적으로 전혀 다른 기호를 보내도 좋은 라멘집일 수 있고 나는 이들을 긍정한다. 이유가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거기도 시선을 끌 목적이 0%인, 순수한 합리성과 심미안의 결과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또 완벽하게 동의하지도 않고. 그러나 최소한의 설득력. 그것이 요리의 특별함이다. 무엇이 상수이고 무엇이 변수인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값의 조절, 혹은 차원의 변형에 이르기까지.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모든 요리가 무한으로 떠나지는 않는다. 조금더 가까운 예시로는 닭에 돼지고기, 완탕까지 토핑으로 백화점 차리기로는 비슷해보이는 「Hommade Ramen 무기나에」는 어떤가. 무기나에의 라멘에 토핑을 종류별로 올렸다고 해서 결코 그 스프가 가려지지는 않음은 물론, 토핑들이 가락의 만트라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무언가 다르다면 왜 다른지에 대한 설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접시 안에 담겨있다. 이 닭다리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저 인스타그램을 장식하고 싶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나는 만 원의 벽이 깨지기를 내심 기대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깨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못 만든 음식이나 가격만 비싼 음식보다 나는 이렇게 비싼 가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경우가 더 두렵다. 특히나 정서적인 측면이 강한 한 그릇 요리, 만 원 이하의 끼니 단위의 식사에서 이러면 곤란하다. 유독 토리파이탄을 두고 한국인들은 삼계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설마 그 재림인가? 언제까지나 닭이 "회식 자리에서 닭다리 두 개 연속으로 먹은 누구" 이야기를 곱씹는 사람들의 농담으로 남을 수는 없다.

  • 키오스크가 없이 점원이 접객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입장부터 퇴장까지 서비스 있어서는 매우 높이 산다.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서비스 마인드를 지닌 라멘가게라 불러도 좋다. 심지어는 콘래드 서울의 누들 바보다도 훨씬 긍정적이다. 차라리 음식은 평범하되 서비스만 경험했다면 나는 가격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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