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루카 바 - Et in Arcadia ego
산루카는 긴자의 텐더 계열의 가게 중에서도 상당한 중진에 속하는 곳으로, 이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는 클래식(スタンダード) 칵테일 위주로 다루었기에 놓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산루카의 오리지널인 아르카디아이다.
보드카, 칼루아, 미도리, 생크림과 노른자로 만드는 이 칵테일은 노른자와 크림이 빚어내는 걸쭉한 텍스처와 단맛으로 인해 마치 칵테일로 만드는 에그노그를 연상시키지만, 향신료를 배제하고 커피와 초콜릿의 어두운 뉘앙스 일색으로 표현해 차가운 온도에서 선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맛을 표현한다. 민트의 가니시가 약간의 신선함을 더하고 나면, 에그노그보다는 그래스호퍼나 브랜디 알렉산더 같은 계열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르카디아라고 하면, 단연 이 작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에 실존하는 지명이기도 한 아르카디아는 낙원으로 묘사되는데, 막상 이 낙원을 그린 그림에서 낙원의 목동들은 보통 부정적 대상인 묘비의 비문을 읽고 있다. 그곳에 쓰인 말이 et in Arcadia ego인데, 이 문장은 그 자체로는 동사가 없다. "나도 아르카디아에"라는 표현은 위 작품과 구에르치노의 작품 등에서 보이듯, 화자를 죽음으로 보아 "낙원에도 죽음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위 목동들은 죽음의 존재를 인지하고 두려워하는 자들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이 이처럼 일관된 것은 아니다. 이전에 이 문구는 명시적으로 죽음을 화자로 하는 듯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파노프스키는 연구에서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있다"만이 문법적으로 옳은 해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 그러나 이후 문학이나 예술에서 아르카디아는 그리운, 상상 속의 낙원의 성격이 더욱 강조되기 시작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아르카디아처럼 자유롭게(Arcadisch frei)라는 표현을 쓸 정도인데, 여기서 아르카디아는 죽음이라던지 하는 맥락이 제거된,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변모한다.[2] 아르카디아의 낙원으로서의 성질이 그와 대척점에 있는 죽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애가(비가)적인 표현을 위한 곳으로 여겨지다가 후대의 몇몇 영향력 있는 작품을 거쳐 향락을 위한 공간, 혹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의 성질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산루카의 아르카디아는, 후자의 덧없는 바람을 담은 낙원 같은 한 잔이었다. 분명 잔 속에 실재할 쓴맛, 알코올, 보드카 같은 것을 잠시 잊고, 단맛과 크림이 선율을 이루는 쾌락 속에 잠시 빠져드는 그런 경험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취기의 느낌에서, 약간 졸음을 느낄 때 나는 다시 위의 이야기를 느끼고 말았다.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던가. 결국 이 한 잔의 아르카디아에서, 나는 두 아르카디아를 모두 마주했다.
Panofsky, E. (1955). Et in Arcadia ego: Poussin and the elegiac tradition. In Meaning in the visual arts (pp. 295–320). Doubleday Anchor Books. ↩︎
Goethe, J. W. v. (1832). Faust: Der Tragödie zweiter Teil, Projekt Gutenberg. https://www.projekt-gutenberg.org/goethe/faust2/zfaus042.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