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공간의 사랑할 수 없는 서비스

사랑받는 공간의 사랑할 수 없는 서비스

호스피탈리티 서비스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넓은 범위에서 용역을 제공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호스피탈리티, 환대를 제공하는 것은 개인의 성품이나 선한 의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는 19세기 들어서 등장한 여행업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엮여 있는,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잊고서는 훌륭한 호스피탈리티를 만들 수 없다.

호스피탈리티는 기본적으로 나의 공간에서 낯선 이를 맞는 초대와 환영의 원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의 연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손님을 응접하기 위한 공간-바로 근대적 호텔이라는 형태와 연관되며 그 이전에 존재하던 '주인집 어른의 따스함'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호스피탈리티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주인과 손님'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환대 산업이 발달하던 시기가 19세기, 즉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연구에서 다뤘던 것과 같이 본격적으로 자본가들이 궁정 에티켓을 따라하던 시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환대의 공간은 겉으로는 세자르 리츠의 말처럼 '손님은 왕'이라는,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는 환상을 구현해야 하지만 손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얼치기들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됐다. 요리를 제공하는 방식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내는 식기의 사용 순서, 이름으로는 결과물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이름의 요리-이는 누벨 퀴진 시대에 혁파된다-, 엄격한 드레스 코드와 간접적인 의사 소통 방식 등이 열린 호텔 문 앞에 벽을 쌓았다. 손님은 '왕'으로 대접받는 만큼 격식을 갖춰 행동해야 했으며, 주인은 손님이 규칙을 준수하는 한에서 가능한 모든 배려를 제공하며, 이러한 친절함과 상냥함 또한 정해진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고급 호텔 체인도 첨단 기업을 따라 온라인 자료와 영상 등을 활용한 교육을 진행하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공간에서는 여전히 서비스의 경전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당신은 그것을 읽어보고 싶지도, 읽을 수도 없겠지만 잦은 방문을 통해 자연스레 그 내용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 하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이 시대의 손님, 즉 '왕'은 당연히 그에 대한 비용을 기꺼이 치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고귀한 핏줄도 교회의 축복도 받지 못한 자가 '왕'으로 서려면 적어도 돈 앞에서 궁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물이나 샴페인을 권할 때 유상이라는 점을 언급해주지 않아 불쾌했다면, 여러분은 지난 시대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루 투숙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공간에서도 럭셔리 디자이너의 이름이 커다랗게 박힌 티셔츠와 유쾌하지 못한 반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로비나 라운지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오늘날 이러한 환대는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 같지만, 적절히 준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을 만난다면 여전히 우리는 환대의 기쁨을 누려볼 수 있다. 당신이 통로를 지나면 직원은 자연스레 비켜선다. 당신이 레스토랑이나 바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의자를 넣어줄 것이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면 냅킨을 다시 접어둘 것이다. 와인을 따를 때에는 호스트가 먼저 가볍게 맛을 볼 것이고, 여성의 잔부터 채울 것이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절차를 거치며 당신은 존중받는 법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교한 연극에 가까우며, 당신은 관객이자 배우로서 이 무대를 만끽하게 된다.

어느 날 작은 카페에서의 일이었다. 따스한 햇볕이 들고, 정겨운 분위기가 좋아서 이전에도 찾았던 곳이다. 오랜 세월 동네를 지킨 사람들이 주인 부부와 각별한 관계를 가꾸어 나가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 접시 위에 오르는 것이 프랑스식 디저트였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그들처럼 사랑할 수 없었다. 모두가 사랑받는 속에서 두 가지가 사랑받고 있지 않았다. 하나는 먹는 사람, 둘은 그 사람이 먹는 요리. 사람 사이가 좋은 나머지 매개체인 요리에 대한 사랑이 비어 있었다. 위 사진에는 그 두 가지 결점이 담겨 있다.

일상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환대만을 위한 공간의 기준을 들이밀고 싶지는 않다. 서랍장으로 된 수저통과 일회용 종이컵은 불쾌하지만 인건비에 대한 부담을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직원이 주방에서 만드는 요리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이 흠 잡을 일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무지로 완성되는 이러한 문제는 참으로 딱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가장 친절한 아마추어의 환대보다도 가장 차가운 프로의 환대가 더욱 따스하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던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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