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로지 - 형태의 요리, 베린

트릴로지 - 형태의 요리, 베린

지난 글에서 미뤄두었던 <바이올렛> 이야기를 해보자.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베린"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이 한 컵에 대해서 말이다.

아직은 이 형태가 주방의 관습으로 정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플라스틱 컵의 사용은 본래 유리로 만든 잔을 사용한데서 따왔다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듯 보이나, 아직 이것이 첫 실행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참작 사유를 인정할 수 있다. 추후 이 형식이 이 도시에서 폭넓게 인정받는다면 나는 반드시 이것이 유리잔에 담긴 형태로 변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인가? 이 베린이라는, 형태를 중심으로 인식되고 정의되는 요리의 만트라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첫째로는 투명성이다. 이는 전통적인 제과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개념으로, 일종의 반-제과라고까지 할 수 있다. 어째서인가? 본지의 게시물 알림이 올라가고 있는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라. 크림과 초콜릿 코팅에 둘러쌓여 꽁꽁 감추어진 속을 어떻게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카메라들의 무수한 노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먹기 위해서가 아닌 촬영하기 위한 칼질에 주방만큼이나 식탁에서도 "맛본다"라는 개념이 소외되는 것에 불행함을 느끼지만, 이러한 제과의 폐쇄성이 제공하는 반전의 경험은 그만큼 그것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린은 투명한 그릇을 통해 자신의 골격마저도 전부 드러낸다. 나체라고 말하기에도 모자라서, 방사선을 투사한 듯 그 구조의 전체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둘째로는 취식의 방향성이다. 원통형의 벽을 두른 베린은 쌓는데 있어 자유롭다. 물론, 설탕과 크림 두 가지를 이용하여 에펠탑도 지을 수 있는 것이 제과이지만, 주방의 손의 개수는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 "비교적" 자유로움은 창작에 큰 도움이 된다. 먹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수직 방향의 높이는 섬세한 영향을 미친다. 숟가락과 컵의 깊이에 따라서, 비교적 단순한 풍미를 추구하는 베린의 경우 한 번에 바닥까지 내리꽂는 크기라면 전체를 한 번에 아울러 먹는 경험을 중심으로 맛을 인식하게 되며, 복잡성이 높은 베린은 컵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하거나 작고 짧은 숟가락을 제공하여 일부의 층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취식하게 하여 한 컵에 서사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오로지 숟가락과 한 손에 잡히는 잔만이 취식의 장비가 되므로, 전체적인 질감은 부드러움에 크게 의존한다. 통상적으로 복잡성이 높은 베린이나 맛에 반전의 요소가 있는 경우에 단단한 요소를 추가하며, 쿨리와 겔과 같이 입안을 가득 채워도 부담스럽지 않은 요소들이 베린의 주요 주제가 된다.

현대 개념 미학이 주창된 이후, 일종의 창작품 혹은 예술품으로서 요리의 주제 또한 무한히 확장해온 가운데에도 일종의 관습은 있다. 베린에서는 주로 질감이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높은 복잡성의 베린이란 단순히 많은 재료를 우겨넣기보다는, 풍미에 있어서는 큰 그림이 유사하더라도 단순히 휘저어 만든 크림과 한천이나 펙틴을 이용해 뭉친 액체를 대비시킨다거나, 기존의 디저트의 하단의 매개체와 상단의 지배적 풍미의 구조를 반전시키는 등 전형적인 제과와의 차이점을 대비함으로서 그 의도를 선명하게 표현하는데 종종 사용된다. 물론 그것만이 베린의 존재의의는 아니겠으나, 본지는 베린이라는 디저트를 이러한 제과의 외형의 기능에 대한 질문으로서 중요하게 평가한다. 단순히 컵에 담는 제과라면 불투명한 컵에 담기는 수플레도 있고, 컵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종이에 담긴 컵케이크도 있다. 그 차이를 읽을 수 있는 요리가 좋은 요리이며, 그것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 본지의 존재 의의이다.

일반론이 길었다. 그래서 독자가 궁금해하는, 「트릴로지」의 베린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일견 눈에 띄는 점은, 복잡성이 높지 않다는 부분이다. 이는 시각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이것이 곧바로 결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복잡성이 낮은 베린으로 그것이 복잡한 것이라고 주장될 때에만, 그것을 기만이라고 볼 것이다. 이 베린에는 그러한 주장은 담겨있지 않은 듯 보이는데, 특히나 플라스틱 컵과 비교적 열악한 취식의 공간이 이러한 요리의 비격식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두 번째로는, 복잡성이 높지 않다고 해서, 또 현실적인 요소들이 눈에 띈다고 해서 그것이 질적으로 낮은 요리라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블루베리와 제비꽃myrtilles et violette이라는 주제는 시각적으로 명쾌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데, 풍미로써 풀어지는 맛의 핵심은 신맛이다. 잘 발효된 요거트와 그만큼이나 잘 익은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신맛은 오늘날 많은 디저트가 해내지 못하는 식사의 마무리의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 나는 이 깊이의 컵을 바닥까지 내리꽂는 베린으로 이해하고 맛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신맛을 맛보기 위한 단맛의 균형이 절묘했다. 비록 블루베리가 프랑스 제과의 아주 전통적인 요소는 아니지만-블루베리의 고향은 북아메리카-, 레몬이나 열대과일을 이용한 제과가 일상화된 서양 제과의 역할에 꼭 맞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이 비록 그 과일을 누가 키우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희망이 없는 곳이라도, 반대로 그 맛의 본질을 또렷하게 그려냄으로서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세 번째로, 이 베린은 단순히 멀쩡하게 만들어진 요리라는 점을 살짝 벗어나는 즐거움이 있다. 바닥면에 레이디핑거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한창 젖어있어 나는 그것이 레이디핑거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와중 흰 크림이 덮고 있는 그림을 보고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디저트의 왕, 티라미수를 떠올렸다. 반죽을 직접 하지 않고 기성품을 사서 매개체vehicle로 쓸 수 있는, 애증의 디저트 티라미수. 같은 바닥을 딛고 섰지만 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역설적으로 티라미수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맛있는 과자로서 사보이아르디를 만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웃기는 형국에 티라미수 바깥에 이 과자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썩 재미있었다.
맛에 있어서, 한껏 젖어버려 전체를 지탱할 수 없게 된 덕분에, 오히려 컵 안에서는 훌륭하게 어우러진다. 작은 삽 하나에 의존하여 굴착하는데 걸리지 않고 전체가 떠오르며 입안에서는 씹을 새 없이 녹아든다. 베린이라는 형태의 선택의 이유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질감의 조합은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오로지 기능만을 위한 선택이고, 그러한 선택의 이유만을 드러내는 기능이다. 얼마 전 기능을 망각한 요리에 대해 앓는 소리를 했는데, 그 정 반대편에 있었다. 여기서 변명하기를, 나는 미니멀리즘만이 가능한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유치한 존재가 아니다. 같은 미니멀리즘을 두고도 일상, 민중과의 밀착을 주요한 기치로 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아 내지 자본에 대한 무한한 사랑밖에는 읽히지 않는 미니멀리즘 "코스프레"도 존재한다. 또한 어떤 것이 단지 기능적 쓸모가 없다고 해서 사회적인 쓸모가 반드시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관습적 기능으로부터의 단절을 선언하기 위한 장치는 통상적인 기능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은 그 의도과 발현의 양태이고, 그것이 현재의 사회에 대한 올바른 진단에 근거하고, 또 또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존중하는데서 그친다.
개인적으로 진단컨대, 맛보는 행복이라는 기능에 대한 경시와 효능(?)이라는 비과학적 공포에 기반한 기능에 대한 숭배가 현대 한국 식문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에 더해 맛보는 음식을 피사체로, 맛보는 사람을 단지 관객으로 환원시키는 지겨운 유행, 요리를 단지 재료의 합 이상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기술경시적 시각, 그리고 좋은 요리는 곧 특정한 재료(자재?)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는 시대착오적 발상 또한 이 문화권의 오랜 병폐다. 그 속에서 KRW 8500의 가치를 지닌 제과는 적당한 일상성, 그리고 약간의 주관성을 지니고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맛보는 경험에 즐기는데 필요하지 않은 요소들이 적을수록, 그럼에도 맛보는 즐거움에 필요한 것들이 많을수록 우리가 제과를 먹어야 할 이유는 커진다. 이 "바이올렛"이 딱 그 짝이다.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해봐도 이것을 원통 형태의 용기에 담아내는 것 이상의 방법을 떠올리기 어려우며, 높이 형성된 잔의 벽을 따라 부드러운 덩이들을 긁어올릴 때 그 기능의 편리함을 새삼 느낀다. 거의 모든 것이 단지 입안으로 향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다. 주방의 사정이 넉넉했다면 사람의 손이 물건을 쥐는 형태를 조금은 고려한 컵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나아간다면 세계는 한 발짝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급진적인 형태였다면 나는 더욱 큰 감탄을 준비했겠으나 아직은 도시와 주방 모두 그에 대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듯 하다. 현재 그런 형태의 제과를 무리 없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피에르 에르메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데, 추측컨대 피에르 에르메는 그곳이 오픈한 이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쪽이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는 쪽이다.

명문으로 소량만을 제공하고 있다는 제품인 만큼 이것을 꺼낼지 말지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구매에 있어 일정한 자격을 요하지 않으며, 긴 대기와 같은 사실상의 자격도 요구하지 않는 만큼 맛보지 못할 가능성의 위협보다 서울에 몇 존재하지 않는 형식의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익을 더욱 크게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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